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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호주제 폐지 초읽기!

호주제 폐지 운동 펼쳐온 한의사 이유명호가 처음 털어놓은 “그간 호주제로 인해 내가 겪은 아픔 ”

“이제부터는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정신적 호주제 없애기 위해 전념할 거예요”

■ 글 ·최호열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2005. 03. 10

여성계의 최대 이슈이던 호주제가 드디어 폐지된다. 지난 2월3일 헌법재판소가 호주제 관련 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 호주제 폐지 운동을 펴온 한의사 이유명호씨를 만나 호주제 폐지가 갖는 의미와 개인적 체험담을 들었다.

호주제 폐지 운동 펼쳐온 한의사 이유명호가 처음 털어놓은 “그간 호주제로 인해 내가 겪은 아픔 ”

지난 2월3일 헌법재판소가 호주제를 규정하고 있는 민법 일부 조항에 대해 사실상 위헌성을 인정하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해당 법률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위헌 결정으로 인한 법적 공백을 막기 위해 법개정 때까지 일정 기간 해당 조항의 효력을 유지하거나 한시적으로 중지시키는 결정이다.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지면 국회는 해당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민법개정안의 국회통과가 곧 이뤄질 전망이다. 국회는 이미 지난해 12월 여야가 호주제 관련 조항을 개정하는 법안을 올 2월에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일부에서 개정법률안이 통과된 후 헌재가 ‘합헌’결정을 내렸을 때의 법적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모든 장애가 사라진 셈이 되었다.
곧 열릴 임시국회에서 민법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존의 호적제도가 폐지되며, 이를 대신하는 ‘개인을 기준으로 한 가족기록부’ 형태의 새로운 신분등록제도가 이르면 2007년 말 시행에 들어간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호주제는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기초해 호주승계 우선순위, 혼인·자녀 등의 신분관계 형성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함으로써 많은 가족들의 불편과 고통을 불러오고 있다”고 밝혔다.
여성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0년 11월 호주제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하는 등 오랜 기간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얻어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간 활발히 호주제 폐지 운동을 펼쳐온 한의사 이유명호씨(53) 역시 이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어요. 특히 고은광순씨는 14차례나 호주제 폐지 유인물을 만들어 국회의원들에게 일일이 배포하며 국회의원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일조했죠. 저희 어머니도 한몫 했어요. 지난해 겨울 여성단체들이 매일 국회 앞에서 조속한 법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힘내라며 아침마다 따뜻한 커피를 만들어 주셨거든요(웃음).”
쉰이 넘었는데도 소녀 같은 얼굴에 작고 여린 외모를 지닌 그가 누구보다도 당차게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그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 전까지는 여성문제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던 평범한 한의사였다고 한다.
“78년에 한의원을 개원했는데, 종종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아들 낳는 처방을 해달라고 찾아오는 여성들이 있었어요. 그럼 한의서에 나와 있는 대로 약을 지어 주기도 했어요. 그때는 그게 남녀차별이란 의식도 없었어요. 그러다 88년에 이혼을 하면서 뭔가 우리 사회가 불합리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죠.”
결혼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아버지 호적에서 남편의 호적으로 옮아갔다가 이혼을 하자 이번엔 동생의 호적으로 옮겨졌다.
엄마가 자식 통장 하나 못 만들어줘 가슴 친 이혼여성 많아
“동생 내외가 말은 안 했지만 자신들의 호적에 보기 싫게 빨간 줄이 그어진 제가 붙어 있는 게 달갑지 않았을 거예요. 아이들 결혼할 때 지저분한 호적을 보이게 되잖아요.”
여자라는 이유로 자기 이름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걸 보며 ‘왜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그는 후에 여자도 단독호주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당장 그렇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호주가 되었다고 끝은 아니었다. 그가 먹이고 입히고 키우니까 당연히 자기 밑으로 따라올 줄 알았던 아이들의 이름이 그대로 아이 친아버지의 호적에 남아 있는 것.

호주제 폐지 운동 펼쳐온 한의사 이유명호가 처음 털어놓은 “그간 호주제로 인해 내가 겪은 아픔 ”

“이혼할 때 전 남편에게 아이들을 어떻게 할 건지 선택하라고 했어요. 둘 다 데리고 가든지 둘 다 내가 키우게 하든지 선택하라는 거였죠. 그런데 남편은 아들만 데려가더니 1년 만에 힘들어서 못 키우겠다며 다시 데려왔어요(웃음).”
그가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그는 법적으로 동거인일 뿐이었다. 심지어 주민등록등본에도 친자식에 대해 ‘동거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과 실랑이 끝에 그 ‘동거인’이란 말을 삭제하긴 했지만 대신 ‘호주 000’이라고 전 남편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호주제라는 게 귀찮은 부분이 참 많아요. 엄마가 아이들에게 여권도 못 만들어 주고, 통장 하나도 못 만들어 줘요. 그럴 때마다 같이 살고 있지 않은 ‘호주’라는 이름의 아이 아버지에게 연락해 도장과 서류를 받아와야 하죠. 저는 전 남편과 앙금이 남아 있지 않아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기 때문에 덜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혼 여성들은 그것 때문에 가슴을 칠 때가 많았다고 해요.”
그는 호주제를 “국가가 여성을 단지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로만 규정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법적으로 전혀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
“여성계의 불만이 폭발할 때마다 내용을 조금씩 수정했지만 근본은 바꾸지 않았어요. 심지어 전에는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아이를 아내의 동의 없이 입적시킬 수 있었어요. 반대로 아내가 밖에서 낳아온 아이는 입적이 불가능하죠. 그래서 극단적으로 남편이 사망했는데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아이가 나타나 호주가 된 경우도 있어요. 더 우스운 건 여자가 단독호주일 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는 입적시킬 수 있어도 친자식은 입적시킬 수 없다는 거였어요.”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극심한 폐해라 할 수 있는 남아선호사상을 부추긴 게 바로 호주제라고 했다. 여자는 남자의 호적에 입적하고, 자식은 무조건 남자의 성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기는 탓이다.
“모계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대가 끊기는 게 아닌데도 법적으로 그 집안은 대가 끊긴 것으로 만들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성차별이 생기죠. 딸은 어차피 출가하면 호적이 옮겨지니까 기대치가 낮아지고, 투자도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제가 자랄 때만 해도 아버지가 아들은 대학에 보내면서 딸은 오빠 밥해줘야 한다며 대학에 안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죠.”
그는 이런 의식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얼마전 재방영되고 있는 ‘겨울연가’를 보다 깜짝 놀랐다고 한다. 최지우가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의 집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 예비 시아버지가 “이제 회사는 그만두라”고 이야기하자 최지우도 당연하다는 듯 “지금 하던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그만둘 것”이라고 말하더라는 것.
“드라마 설정을 보면 최지우네는 가난해서 그가 돈을 벌어야 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도 사직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또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 딸을 낳아 키우면 손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여자가 이혼 후 재혼을 하면 호주제로 인한 고통은 더욱 심각해진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가장 먼저 부딪치는 게 새 아버지와 아이의 성이 다르다는 것. 새 아버지에게 아이가 있으면 형제끼리도 성이 달라 아이들이 더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재혼가정들도 많고, 심지어 아이에게 성이 다른 형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절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 재혼여성도 있다고 한다.
“재혼한 여성들은 하나같이 호주제 때문에 아이들도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에 신경을 쓰게 된다고 말해요. 학교에 제출했다가 선생님이 관리를 잘못해서 아이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걸 보면 가슴이 메인다고 하더군요.”

호주제 폐지 운동 펼쳐온 한의사 이유명호가 처음 털어놓은 “그간 호주제로 인해 내가 겪은 아픔 ”

부계 뿐 아니라 모계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명호씨와 어머니 유영숙씨.


이제 헌재의 판결로 호주제 폐지가 결정되었지만 아직까지 호주제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호주제가 없어지면 가족제도가 파괴된다’는 것. 이에 대해 그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며 오히려 호주제는 한 호주 아래 있는 구성원만 가족으로 보기 때문에 분가한 둘째 아들이나 딸들은 가족이 아니라는 이야기라며 “호주제야말로 가족제도를 무너뜨리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호주제 폐지되면 근친상간 가능하다는 주장은 새로운 ‘신분등록제도’ 몰라서 하는 말
또한 엄마가 재혼할 경우 아이의 성을 새 아버지의 성으로 바꾸는 게 가능해진 것에 대해서도 문제가 많다는 주장이 있다. 극단적으로 설명을 해서 어린 남매를 둔 부부가 각각 아이를 한 명씩 데리고 이혼을 한 후 여자가 재혼해서 아이가 새 아버지의 성으로 바뀌었다고 했을 때 성인이 되어 우연히 만난 남매가 서로에게 끌려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호적도 없고, 성도 다르므로 둘은 남매라는 걸 전혀 모른 채 결과적으로 근친상간을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이 달라 4촌이나 6촌과의 근친혼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는 것. 이에 대해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한다.
“새로운 신분등록제도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개인을 기준으로 한 신분등록제도가 시행되면 모든 자료가 전산화되어 오히려 친인척 여부를 지금보다 더 확실히 알 수 있어요.”
현재 정부에서 추진 중인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는 개인별로 자신의 신분등록표를 하나씩 갖게 하고 거기에 출생 이후 일생 동안의 모든 신분변동 사항을 기재하는 방식이다. 여기엔 부모, 배우자, 자녀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도 포함돼 이혼가정의 자녀로 성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모와 생부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유지해 친족관계 확인이 가능하다.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눈을 돌려보면 성이 없는 나라도 있고, 자신이 맘대로 성을 바꿀 수 있는 나라도 있어요. 성에 대해서는 좀 더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호주제가 폐지된 후에도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거예요. 앞으로 엄마 성을 따라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성만을 따라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선택의 기회를 넓히자는 거니까요.”
그는 4년 넘게 호주제 폐지운동을 하며 국민의 의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이번에 호주제가 폐지된 것도 국민적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그런데 그는 헌재 판결이 났다고 해서 호주제 폐지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제도가 바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 방송인과 교육 관계자, 공무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데 매진할 것이라고 한다.
“어느 중견 탤런트가 아침방송에 나와 며느리의 팬티가 아들 팬티 위에 놓여 있는 걸 보고 며느리를 야단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황당하죠. 앞으로 그런 가부장적인 의식, 정신적인 호주제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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