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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사랑을 나눠요

재활용품 가게에서 판매 봉사하는 주부 김은영

■ 기획·최호열 기자 ■ 글·송구슬 ■ 사진·정경택 기자

2005. 01. 03

세 아이의 엄마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주부 김은영씨(32). 작은 나눔이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아름다운가게’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물건 파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그의 봉사활동 체험기.

재활용품 가게에서 판매 봉사하는 주부 김은영

아이들을학교에 보낸 후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마무리하고 시할머니 점심까지 차려놓으니 벌써 오후 1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늘은 화요일, ‘아름다운가게’ 판매 봉사를 하는 날이다.
‘아름다운가게’는 헌옷과 책, 가방, 신발, 가전제품 등 자기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지만 아직 충분히 쓸 만한 물건을 기증받아 손을 본 후 다시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그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재활용품 가게다. 자원의 순환을 지향하고 나눔을 실천하니 그야말로 헌 물건을 ‘두번 살리는’ 셈이다. 이곳은 물품 수거부터 관리, 판매까지 대부분 자원봉사로 이루어지는데 나는 지난 봄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네 시간 동안 판매봉사를 하고 있다.
결혼 후 세 아이 키우고 살림하며 ‘언젠가 나도 여유가 생기면 뭔가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10년이 넘도록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항상 ‘아이가 입학하고 나면’ ‘내 집을 마련하고 나면’ 하는 핑계 아닌 핑계거리만 댈 뿐이었다.
그러던 중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골목길 청소를 하는 이웃의 한 아주머니를 알게 되었는데, 그 아주머니의 “이게 내 일이야. 이렇게 안 하면 밤에 잠을 자도 개운하지가 않아!” 하는 말이 가슴에 다가왔다.
‘그래, 봉사가 별것이 아니지. 남을 위하는 마음 씀이 바로 봉사야. 내가 거창한 사회봉사를 마음에 품고 작은 실천을 외면해오는 동안 이렇게 보이지 않는 손길이 사회를 따스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주변의 작은 일부터 시작하고자 마음 먹으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2시15분 전. 조금은 여유롭게 가게에 도착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없는 물건이 없는 ‘작은 백화점’이기 때문에 이맘때면 물건은 제자리를 잃고 뒤죽박죽되어 있기 일쑤다. 오후 판매를 담당하는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물건 제자리 찾아주기. 편지지 위에 놓여 있는 헤어밴드를 액세서리 코너에 갖다 놓고, 풀어진 가습기 끈을 묶어 스카치테이프로 정리한다. 그렇게 흐트러진 물건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나니 물건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물건을 가져온 청년들과 함께 서둘러 박스를 가게 안으로 옮겼다. 누군가의 첫 출근과 함께 했을 법한 양복 재킷이며, 시집갈 때 친정 엄마가 골라주셨을 그릇이며, 하나같이 소중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은 화려한 백화점 상품처럼 번쩍거리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색깔로 반짝이는 것 같다.
새로 도착한 물건들을 판매대에 정리하기 바쁘게 가게 안은 몰려온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손님 중엔 물건이 들어오는 요일과 시간을 알고 그때 맞추어 가게를 찾는 이들도 제법 많다. 이런 알뜰파들은 나보다 더 재고 파악을 잘하고 있을 정도다.
“어, 이 좋은 물건이 아직도 안 나갔네, 토요일에 들어온 건데.”
“그거 잘 골랐네요. 여기서 구하기 힘든 건데…. 안 사실 거면 저한테 양보하세요.”
아이들도 헌 물건 함부로 하지 않는 습관 생겨
단골들은 다른 손님들에게 꼼꼼히 상품 설명을 해주는가 하면 은근히 구매를 부추기는 바람잡이(?) 역할까지 한다. 헌 물건을 나눠 쓰는 것만으로 훈훈한 정이 느껴지기 때문인지 이곳에서는 종종 누가 손님이고 점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누고 아끼는 것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든다.

재활용품 가게에서 판매 봉사하는 주부 김은영

김씨는 판매 봉사를 통해 봉사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나눔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저것 묻는 손님들에게 제품 설명과 가격을 이야기하고 혹시 제품에 문제가 없는지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는데, 아이 손을 잡고 함께 책을 고르는 젊은 주부가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아이에게 비싼 새 책을 척척 사주는 엄마보다 더 많은 걸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헌 물건의 가치와 남을 돕는 뜻에 동참하겠다는 나눔의 사랑…. 아이는 깨끗한 새 책을 집안 가득 쌓아놓고 있는 아이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이곳을 알게 된 후 달라진 게 많다. 헌 물건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푸대접받던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며 자기들 딴에도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일도 없어졌다.
아이 엄마가 고른 책을 유모차에 실을 수 있도록 노끈으로 묶고 있는데 빵모자를 쓴 할아버지 한분이 커다란 박스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신다. 당신이 가지고 계셨던 것은 물론 주위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모아 이곳에 기증하러 오신 모양이다. 할아버지의 정성을 생각하니 물건을 들여오느라 조금은 뻐근했던 몸에 다시 힘이 솟는다.
오후 6시.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다. 매장 밖에 진열한 물건들을 가게 안으로 들여놓고 흐트러진 물건은 없는지 다시 한번 둘러본다.
“오늘 많이 팔았어?”
“어, 많이 팔았어.”
동료 자원봉사자와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마치 내가 이곳의 주인 같다. 하긴 오늘 판 만큼 물건이 재활용되고 수익금을 유익한 일에 쓸 수 있으니 나는 틀림없이 남는 장사를 하는 행복한 장사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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