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윤락가를 탈출해 숨어 지내다 결혼을 하고 새 삶을 살던 김정란씨(가명·24). 자신을 아끼는 남편, 두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던 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지난 8월이었다.
지난 8월2일, 시집에 가던 중 대구터미널에서 지갑을 분실해 터미널 인근에 있는 파출소에 신고하러 간 김씨는 경찰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과거 자신이 일했던 윤락가의 업주가 선불금 9백90만원을 갚지 않았다며 그를 사기 혐의로 고소해 기소중지가 된 상태였던 것. 생후 20개월 된 큰아이와 함께 유치장에 갇힌 김씨는 다음날 여수경찰서로 넘겨졌다가 여수성폭력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경찰에게 남편은 저의 윤락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절대 알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어요. 그런데 경찰이 업주에게 저를 잡았다고 연락하는 과정에서 업주가 저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었나 봐요. 업주가 대신 남편에게 선불금을 받겠다며 찾아갔더라고요.”
업주는 김씨의 남편에게 “당신의 아내가 선불금을 받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다가 돈을 안 갚고 도망갔으니 대신 갚으라”고 요구했다. 남편이 “그게 무슨 소리냐,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따지자 업주는 김씨가 업소에서 일할 때 찍은 사진까지 보여주며 김씨의 과거를 폭로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과거를 도저히 말할 수 없어 숨기고 결혼했어요. 대신 남들보다 1백배는 더 노력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았는데….”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 사람(업주)이 말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냐”고 물었고, 그는 “거기에 팔려 간 것은 맞지만 일(윤락)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은 제 등을 두드리며 ‘당신의 말을 믿겠다’고 했지만 저에 대한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겠죠. 아이들을 데리고 당분간 할머니 집에 가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남편의 직장 동료로부터 ‘(남편이) 아직까지 출근하지 않았다’고 전화가 왔어요. ‘혹시 늦잠을 자고 있을지 모르니까 우리 집에 가보라’고 했죠.”
김씨의 집을 찾아간 남편의 직장 동료는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남편이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당분간 떨어져서 살자”는 편지만을 남긴 채 집을 나갔다는 것.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집을 나갔겠어요. 저에게 ‘어떻게든 선불금은 갚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 돈을 갚아야 당신이 발 뻗고 자지 않겠냐’고까지 말하며 절 위로하던 남편인데….”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로하고 감싸준 남편 생각에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김씨는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자신이 없어 휴대전화를 놔둔 채 집을 나간 남편의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며 울먹였다.
“남편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는데 못 찾았어요. 남편이 집을 나간 이후부터 아무 일도 못하고 몸져누웠죠. 집 나간 뒤 전화 한통 없던 남편이 8월 말 전화를 걸어와 ‘애들이 너무 보고 싶다. 나 없는 동안 잘 키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래도 널 사랑한다’면서 전화를 끊었어요.”
둘째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김씨는 마음고생으로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해 아직도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충격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그는 큰아이는 시어머니에게 젖먹이 둘째아이는 친정 할머니에게 보냈다. 시어머니는 아직 이 사건의 전말을 모르고 있다. 아들이 부부싸움을 하고 홧김에 집을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이제 어느 정도 제 몸과 마음을 추슬렀으니 시어머니에게 맡겨놓은 큰아이를 데리러 가야죠. 남편이 가출한 이유를 모르는 시어머니가 ‘아이 둘을 혼자 힘으로 키우기 힘드니 둘째아이를 고아원에 보내고 큰 아이라도 제대로 키우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그럴 수는 없죠. 부모 없이 자란 설움을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은 제 손으로 키워야죠.”
그의 뇌리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남아 있지 않다. 막 돌이 지난 딸을 남겨둔 채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무위도식하던 아버지는 그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세상을 떠났고 노쇠한 할머니가 부모 역할을 대신했다.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다방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 유흥업소에 첫발을 내디뎠다.
“고2 때 학교를 그만두고 다방에서 일하게 됐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고생하시는 할머니에게 보답하고 싶었고, 마음껏 먹고 입고 싶었어요. 다방 일을 시작하면서 받은 선불금 2백20만원은 금방 갚을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차를 배달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동안 일을 못하게 되자 선불금이 5백20만원으로 불어나더군요.”
그해 11월 다방 업주가 그를 전남 보성군의 한 다방으로 팔아넘겼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선불금은 줄어들지 않았다. 업주들이 화장품비, 밥값, 결근비 등의 명목으로 빚을 늘려갔기 때문이다.
“5백20만원이던 선불금이 또다시 9백90만원으로 늘어났어요. 그사이 전북 익산의 윤락가로 팔려갔고요.”
그는 얘기 중간중간 그곳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어요.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을 했죠. 기계처럼 손님 비위 맞추면서 술을 따르고 쇼를 하고…. 매상을 올리기 위해 손님들이 빨리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맥주 1박스를 30분 안에 다 마시도록 업주가 강요해요. 그 시간에 다 해치우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죠. 업주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난 폭력에 시달려요.”
그는 “누가 몸 파는 일을 하고 싶어서 하겠어요. 다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하며 “한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윤락가에 발을 내딛은 후 아직도 선불금 때문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윤락녀들의 피폐한 삶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했다.
“윤락녀는 선불금이라는 빚 때문에 업주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룸에 들어가요. 특히 윤락가를 단속하는 일부 경찰은 성 상납을 요구하기도 하죠. 경찰이 가게로 ‘족발이 먹고 싶다’고 전화를 하는 날은 그들을 위해 몸단장을 해야 해요. 업주는 관례상 어느 경찰서나 파출소에 근무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은 채 ‘잘 모시라’고 하죠. 그러니 윤락녀가 경찰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들은 체도 안 하는 거고요.”
99년 초 죽을 각오를 하고 윤락가를 탈출한 그는 업주의 눈을 피하기 위해 7개월여 동안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에 숨어 지냈다. 그후 경북의 한 공업도시에 정착한 그는 공장에 다니면서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2000년 1월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선불금, 인권유린 등 윤락녀들의 고통과 피해가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사진은 피해사례를 밝히는 윤락여성들.
“둘 다 배운 게 없어 공장과 세차장 등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일을 했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둘째아이(생후 5개월) 출산 전날까지 일을 했으니까요. 이 일이 터지기 직전까지 매일 새벽 우유배달을 했어요.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죠. 하지만 윤락가를 탈출한 이후부터 선불금만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어요.”
올해 여든이 된 그의 할머니는 그동안 선불금을 받아내려는 업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손녀딸이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는 협박에 시달렸다.
“첫째를 낳았을 때 할머니가 저희 집에 와서 산후조리를 해주고 싶어 했지요. 엄마 없이 자란 저를 불쌍히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할머니가 외출하면 업주가 윤락녀를 감시하는 ‘몸빵지기’들을 시켜 뒤를 밟을까봐 저희 집 근처에도 못 왔어요. 그동안 제 선불금 때문에 할머니도 모진 세월을 살았지요.”
“두 아이 위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 터”
지난 9월23일부터 김씨처럼 선불금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유흥업소 종사자를 위한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됐다. 과거 윤락행위방지법 등이 성매매 여성의 처벌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성매매특별법은 업주의 처벌을 대폭 강화했다. 특히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간주해 신변안전 조치가 취해지고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했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돼 이제야 지긋지긋한 선불금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됐어요. 성매매특별법이 조금만 빨리 시행됐다면 업주가 남편을 찾아와 과거를 폭로하는 일은 없었을텐데…. 윤락가에서 도망치다 잡히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몸빵지기’보다 보이지 않는 선불금이 더 무서웠거든요.”
김씨는 8월 말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두 아이를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집을 나간 이후 환청에 시달려 제대로 잠도 못 잤는데, 이제는 이를 악물고 살 거예요. 남편 없는 동안 아이들을 잘 키워야 이 다음에 남편 얼굴을 쳐다볼 수 있을 테니까요. 무슨 일을 해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까 궁리 중이에요. 아이 둘 딸린 엄마가, 그것도 젖먹이를 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제 손으로 잘 키우고 싶어요.”
그는 요즘 여수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윤락가 및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을 구출해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말 못할 사정으로 인해 윤락가에 발을 들인 후 선불금에 발 묶인 윤락녀를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또한 9월23일엔 서울경찰청이 ‘성매매지원센터’ 개소 1백 일을 맞아 개최한 간담회에 피해자 자격으로 참석해 자신이 경험한 선불금 문제와 윤락가 여성들의 인권상황을 증언했다. 비록 자신의 가정은 파탄이 났지만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또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왼쪽 허벅지의 움푹 파인 흉터를 보여줬다. 티켓다방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얻은 상처라고 했다. 그는 “유흥업소에서 일하고 남은 것은 몸과 마음속에 자리잡은 커다란 상처뿐”이라며 “나 같은 삶을 사는 여성이 또다시 나오지 않도록 성매매를 없애는 데 작은 디딤돌이 되고 싶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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