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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과 싸우며 박사학위 받은 이원규

■ 기획·구미화 기자 ■ 글·송화선‘주간동아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4.10.11 11:26:00

지난 8월, 성균관대 학위수여식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규씨.
지난 99년 근육이 굳어지는 루게릭병에 걸린 뒤에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였다. 집념의 사나이 이원규씨와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입이 되어주는 아내 이희엽씨의 특별한 사랑을 만나보았다.
루게릭병과 싸우며 박사학위 받은 이원규

지난 8월25일 성균관대 학위수여식. 휠체어에 올라탄 채 부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졸업장을 받아드는 한 늦깎이 졸업생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처음엔 불편해 보이는 그의 몸이 관심을 끌었지만 사람들은 이내 만면에 미소를 띤 그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에 박수를 보냈다.
이날 ‘한국시의 고향의식 연구’라는 논문으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규씨(43)는 온몸의 근육이 하나씩 굳어지다 결국은 호흡기 근육마저 마비돼 죽음에 이르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일명 루게릭병 환자다. 스티븐 호킹 박사도 앓고 있는 이 병은 아직까지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아 ‘죽음의 병’이라 불리는 난치성 질환.
이미 병이 상당히 진행돼 혼자서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가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논문까지 완성해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때문에 주위에선 “지독할 만큼 성실한 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의 화려한 이력은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대학에 처음 입학한 후 20여 년 동안 총 7개의 학위를 받았다. 대학과 전공을 바꿔가며 4개의 학사학위와 2개의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번에 박사학위를 하나 더한 것. 세월도 막지 못한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은 99년 겨울, 커다란 암초에 부딪혔다.
발음이 자꾸만 새고 혀에 백태가 끼는 증세 때문에 병원을 찾았던 그에게 루게릭병으로 혀 근육이 굳어가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진 것. 처음엔 믿을 수 없었지만 건강하던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이나 등산을 갈 때면 늘 앞장서서 동료들을 이끌었던 그의 힘찬 근육은 모두 사라지고, 몸무게도 16kg이나 줄었다. 이제는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으면 외출을 할 수 없고, 혼자 힘으로 밥도 떠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서울 신천동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아내 이희엽씨(40·초등학교 교사)는 남편이 앉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발음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남편의 말을 기자에게 전달해주기 위해서였다. 85년부터 지난해 1학기 까지 서울 동성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재치 있는 유머로 교실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남편이 지금은 안면 근육 대부분이 마비돼 영어는커녕 우리말도 모음을 겨우 어눌하게 발음하는 정도이기 때문. 이씨는 지난해 1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휴직했다.
지난해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학교 휴직했지만 음성변환장치 이용해 교단에 다시 서는 게 꿈
루게릭병과 싸우며 박사학위 받은 이원규

이씨에게 아내는 세상과 통하게 하는 소중한 끈이다. 아내가 그의 입 모양에 시선을 맞추고, 한 음절 한 음절 그의 목소리를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 마치 ‘외계의 언어’처럼 멀고 아득한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씨의 목소리를 아내는 차근차근 정확하게 전달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잃지 않은 남편의 멋진 유머 감각까지도 아내는 맑은 목소리로 기자에게 전해줬다.
루게릭병은 의식을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환자는 결국 온몸의 근육이 하나씩 마비되어가는 것을 선명한 의식과 오감으로 생생하게 느껴야 하는 것. 루게릭병은 그래서 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운 병인지도 모른다. 그의 병세는 지난해부터 급격히 악화됐다. 논문을 쓰는 작은 방에서 화장실까지의 거리는 2m에 불과하지만, 그가 혼자 힘으로 가려면 5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한 발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다시 내리고, 그 발에 힘을 주고, 다시 다른 발을 들어 올리고….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안간힘을 써야 간신히 화장실 앞에 닿을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시시때때로 끔찍한 고문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껴 ‘지금 죽어도 좋으니 고통만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번에 박사학위를 안겨준 논문은 그렇게 힘든 시간을 거쳐 완성해낸 것이다.

루게릭병과 싸우며 박사학위 받은 이원규

이원규씨가 건강했을 때의 모습. 부인 이희엽씨는 매일 아침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의 회복을 비는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이씨는 그러나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그가 “모든 것이 아내 덕분…”이라고 떠듬떠듬 말을 이어갔지만 아내는 기자에게 통역해주지 않았다. 남편의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금세 눈물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남편은 학위수여식에서 발표한 소감문에도 “사랑하는 아내가 없이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어 아내를 울렸다.
89년 결혼해 15년 동안 함께 살아온 두 사람에게 루게릭병은 잠시 왔다 가는 시련일 뿐이다. 아내 이씨는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가 나날이 진전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곧 치료법이 개발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편은 분명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아내는 아침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남편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리고, 매일 10가지가 넘는 특수 영양식을 만든다. 남편의 손과 발과 입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소녀처럼 밝고 활기가 넘쳤다. 기분이 우울할 때면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한강변을 산책한다는 아내는 남편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든든한 힘이 된다고 말했다.
“남편은 지금껏 매사에 덜렁거리는 저를 든든하게 지켜줬어요. 제가 필요할 때 늘 제 뒤에 있었죠. 그런 남편에게 제가 잠시나마 도움이 되라고 이런 시련이 온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육체적으로는 제가 남편을 돕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지금도 제가 남편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더 커요.”
남편 이씨 역시 아내를 위해 앞으로도 성실히 살아갈 생각이다. 논문을 마친 그의 다음 목표는 학교로 돌아가는 것. 스티븐 호킹 박사가 사용하고 있는 음성변환장치만 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성대가 없다. 루게릭병이 상당히 진행되자 호흡 근육 마비를 막기 위해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여전히 강연을 하러 다닐 수 있는 건 단어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그것을 음성으로 변환해 읽어주는 장치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 우리 돈으로 8천만원대인 이 음성변환장치는 한국의 한 중소기업이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이씨는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이미 집 한 채에 해당하는 돈을 쓴 터라 음성변환장치를 사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지만 기회만 된다면 어떻게든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았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기자가 “조만간 ‘기적의 치유 사례’로 선생님을 다시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하자 이씨는 굳어진 얼굴 근육을 힘겹게 움직여 웃으며 “이제 곧 다 나을 테니 독점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전달해주는 아내 역시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도 벅찬 시련이지만 이들 부부는 둘이 함께 있기에 희망을 잃지 않고 버텨 나가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혹독한 시련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동아 2004년 10월 4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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