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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 완간 10주년 맞은 작가 박경리

“인생에 대한 물음, 진실에 대한 물음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마산MBC 제공

입력 2004.10.04 11:09:00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난생처음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대하소설 ‘토지’ 완간 10주년을 맞아 마산 MBC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
선생이 들려준 그의 삶, 문학세계, 생명사상, 그리고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대하소설 ‘토지’ 완간 10주년 맞은 작가 박경리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78)이 산다. 그는 원주에서 25년 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시내 출입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소설 창작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969년 ‘토지’ 1부를 쓰기 시작해 1994년 8월15일 원고지 3만 장 분량의 ‘토지’를 탈고한 그는 이후에도 장편소설 ‘나비와 엉겅퀴’ ‘단층’ ‘창’과 수필집 ‘호수’ ‘거리의 악사’ ‘생명의 아픔’ 등을 출간하면서 열정적인 글쓰기의 본을 보여왔다.
“제가 사람들 오라는 데 다 가고 모이는 데 다 갔다면 어떻게 ‘토지’를 쓸 수 있었겠어요. ‘토지’를 쓴 25년의 세월은 완전히 제 스스로를 차단한 삶이었어요. 참 힘든 일이죠. 그 싸움은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싸움이었어요.”
올해로 ‘토지’가 완간된 지 10년. 좀체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그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텔레비전에 반가운 모습을 보였다.
창사 35주년을 맞은 마산 MBC는 ‘토지’ 완간 10주년 특별대담 ‘작가 박경리’를 3부작으로 제작해 지난 9월3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총 2백10분간 방영했다. 토지문화관에서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 대담엔 작가 최일남, 역사가 강만길, 시인 추은희, 연세대 국문과 정현기 교수, 서울대 국문과 권영민 교수 등의 인터뷰도 함께 담아 총체적으로 작가 박경리 선생을 조명했다.
프로그램 기획을 맡은 김일태 PD는 “박경리 선생님 고향이 경남 통영인지라 고향에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역사적인 시간을 내주셨다”며 “몸이 안 좋아 청심환까지 드시고 4시간에 걸쳐 대담에 임하셨는데, 대담이 끝나자마자 거의 기진맥진 하셨지만 퍽 즐거워하셨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선생은 대담을 통해 자신의 삶, 문학관, 생명사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기운이 없는데다 허리를 다쳐서 앉아서 일을 해요. 작곡가 김민기씨가 ‘선생님 일하는 거 보니까 기어 다니면서 한다’고 서울에서 흉을 본대요(웃음). 정말 기어 다니면서 일을 해요.”
매일 아침 그는 집 근처 고추밭에 나가 고추를 다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한다. 몸이 안 좋아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무릎으로 밭을 기다시피 하면서도 고추 한알 한알마다 섬세한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생명’을 대하는 농부의 정성 그 자체다.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밀도 짙은 연민”
“유기농업을 하니까 탄저병에 걸려 고추의 절반은 수확이 안 돼요. 절반은 버리더라도 절반은 깨끗한 것을 먹자는 거죠. 농사꾼들이 유기농업 하기 참 힘들어요. 고추 말릴 때도 고생스럽게 매일 들여놨다가 내놨다가 해야 하거든요. 말리는 것도 정성을 안 들이면 쉽게 썩어서 먹기가 힘들어요.”
작가들치고 손이 미운 사람은 거의 드물다. 그렇지만 그는 예외다.
그의 손을 두고 작가 최일남씨는 “상머슴 손이에요. 그 고운 양반이 그토록 험한 일을 쉬지 않고 자청해서 그래요”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데, 정작 본인은 “고추농사가 문학보다 귀한 삶의 진실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한해 두해 그의 손이 거칠어지고 그의 가슴 한복판에 켜켜이 쌓인 것은 ‘생명에 대한 연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의 관계에만 사랑을 국한시키는데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밀도 짙은 연민이에요, 연민. 불쌍한 것에 대한,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생명이 사라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이 가장 숭고한 사랑입니다.”
이는 ‘토지’의 저변에 깔려 있는 ‘생명사상’과 맞닿아 있기도 한데 그런 연민의 마음,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길러주는 사랑’을 하라고 강조한다.

대하소설 ‘토지’ 완간 10주년 맞은 작가 박경리

고추를 기르고 수확하며 생명의 경외감을 느낀다는 박경리 선생.


“내 자식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고,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고 하잖아요. 내 자식에게 젖을 먹여 생명을 보존하게 해주고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어버이 마음, 잘 길러주는 마음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에요.”
선생의 자택이 있는 토지문화관은 연세대 원주캠퍼스와 가까운데 인근에 호수가 있다. 어느 겨울 밤 그는 계속되는 천둥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밖으로 나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 호수는 철새들이 남쪽으로 날아가기 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에요. 마침 호수가 얼어 있었어요. 얼음이 얼면 철새들이 먹이를 못 구하니까 먹이를 구하려고 밤새 날개로 얼음을 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컸다는 거죠. 그걸 보고 ‘참 살기 힘들다’ 싶은 생각이 들데요. 다음 날 가보니까 물이 녹은 곳에 새들이 모여 있더군요. 모든 생명이 참 살기 힘들어요.”
노작가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담겼다. 선생은 얼마 전 펴낸 에세이 ‘생명의 아픔’에서 밝힌 바 있는 ‘생명의 능동성’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모두 피동적이고 능동적인 것은 다 생물이에요. 풀도 양분을 순환시키면서 살아가잖아요. 그 능동성이 있어 생명인데 능동성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자라게도 하지만 남의 힘에 의해서도 자라고 또 남을 자라게도 해요. 이 생명의 능동성 때문에 지구의 생명이 지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는 ‘천도’ 문제를 바라보는 요즘의 심경도 털어놨다. 그는 밤마다 방 안에 누워 ‘새로운 수도를 하나 만든다면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모래를 긁어 올릴까?’ ‘그 많은 시멘트를 흙 위에 뿌리면 땅은 또 어떻게 될까?’ ‘농사지을 땅이 자꾸 없어지면 농산물은 어디서 구할까?’ ‘그렇게 생명이 없는 땅에서 우리의 인성이, 생명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등등의 걱정을 한다는 것. 생명에 대한 연민이 지극한 만큼 그것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그의 질책도 매섭다.
“선진국의 경우는 환경문제가 모든 정책의 제 1위예요. 한국은 정책이 아예 없어요. 농민정책, 환경정책이 있다면 제일 밑바닥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야만국입니다.”
‘토지’를 읽어본 독자라면 ‘어떻게 이렇게 깊은 사유와 인식이 한 작가에게 가능한가?’라는 의문과 경외감을 한 번쯤 가져보았을 것이다.
정현기 교수는 “그가 일생 동안 ‘세 개의 칼날’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상처로 인한 깊은 사유가 가능했다”고 말한다.

암 수술 받은 날도 ‘토지’ 집필
“비극적인 삶을 사셨어요. 유년시절부터 무수한 상처들이 쌓였죠. 말하자면 세 개의 칼날인데 하나의 칼날은 처녀시절 정신대 문제죠.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실존의 문제는 엄청 고통스런 문제였거든요. 두 번째 칼날은 전쟁 때 남편하고 사별하는 과정인데 이야기를 잘 안 하세요. 전쟁 때 아들도 잃었어요. 세 번째 칼날은 사위 김지하의 사형 선고죠. 그때도 김지하씨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와중에 암 수술을 하셨어요. 그 고통의 칼날 위에서 글쓰기와 투쟁을 하신 건데 거기서 이기신 거죠.”
선생이 원주로 내려온 것도 당시 원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위를 자주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선생은 사위가 출감해 서울로 간 후에도 계속 원주에 남았다.
오래전 한 인터뷰 자리에서 선생은 소설가의 각오를 이렇게 피력한 일이 있다.
‘이젠 안 웁니다. 허탈과 고생의 울분 같은 거겠지만 역시 감정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때도 역시 제 자신이 작품 안에 들어갔지만 이제는 완전한 쟁이가 되어 객관적으로 쓰겠습니다.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다루어 아무 찌꺼기도 남기지 않겠습니다.’

대하소설 ‘토지’ 완간 10주년 맞은 작가 박경리

마산 MBC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문학세계, 생명사상 등을 말하는 박경리 선생.


그가 암 수술을 받고 돌아온 날도 ‘토지’ 집필을 서두르기 위해 움직일 수조차 없는 손으로 원고지에 글을 써 내려간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그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준다.
“고난을 창조의 언어로 쏟아냈어요. 그런 지류가 거대한 강물을 이루어 ‘토지’가 나온 거죠. ‘토지’가 운명의 질곡이라는 느낌도 들어요.”
한 평론가는 ‘토지’를 ‘한의 덩어리’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토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에 대해 말할 때 ‘한’의 정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한은 절대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인류는 모두가 소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한은 슬픈 것, 배고픈 것, 고통스러운 것을 풀어달라는 소망이지 누구한테 원한을 갖는 게 아니에요. 원한하고 한은 다릅니다. 일본말에 ‘우라미’라는 말이 있어요. 한보다는 원한에 가깝죠. 그런데 동경유학생들이 우라미를 가져와서 우리의 한과 혼합시켜 버렸어요. 요즘 들어 한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 많이 고쳐져서 다행이에요.”
박경리 선생은 경남 통영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때 수줍음이 많아서 항상 뒷전에만 있었는데 서점에 가서는 그런 게 없었어요. 서점에서 쫓겨날 때까지 서서 책을 읽었어요. 여학교 시절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죄와 벌’이 읽고 싶어서 배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까지 결석했어요. 어떤 날은 책 세 권을 딱 하루만 빌렸는데 밤을 새워 읽고 나니 눈빛이 핏빛이더라고요. 그런 게 모여 작가가 된 것 같아요.”
선생과 막역한 사이인 추은희 시인은 “박경리 선생은 만일 작가가 안 되었으면 건축가, 실내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쪽으로 나갔어도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며 그의 창조력을 높이 평가한다.
“글 쓰다 막히면 개천에서 밤새도록 돌을 주워다가 마당에 돌을 깔아놔요. 어떤 정원사도 그렇게 돌을 아름답게 깔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언젠가 집에 찾아갔더니 ‘어제 저녁에 잠이 안 와서 대야에다 잉크를 부어서 한지를 물들여 벽지를 발랐다’고 하는 겁니다. 온통 벽을 한지로 발라놓았는데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어요.”
이런 그의 심미안은 고향 통영에서 길러졌다고 한다.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아름다운 자연은 위대한 예술가를 낳게 마련인데 작가 박경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화가 김혁림 등이 통영 출신의 예인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나전칠기, 통영소반, 통영갓 등의 예술품은 전국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는 특별한 예술품. 그런 만큼 고향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애착도 대단하다.
“외로워야 자유롭다”
“어린 시절 통영이 저한테 준 것이 ‘토지’의 밑바닥에 다 깔려 있어요. 통영의 예술혼은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출발해요. 임진왜란이 났을 때만 해도 통영은 조그만 촌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오면서 팔도의 온갖 ‘장이바치(기술자)’들이 다 모였을 거예요. 통영은 아름답고 기후 좋고 먹을거리가 많아 살기가 좋기 때문에 그 많은 장이바치들이 전쟁이 끝나고도 통영에 남았을 거예요. 장이바치는 어떤 면에서 예술가들이에요. 그들의 혼이랄까 정신이 이어져 통영 예술의 토양이 풍부해진 것이죠. 또 이순신 장군이 장군인 동시에 예술가였죠. 최고의 정치는 예술이거든요.”
이밖에도 통영은 그에게 자주의식과 민족주의를 심어주었다.

“민족주의와 자주사상을 어린 영혼에게 심어준 게 통영이죠. 학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욕을 하고 그랬어요. 그걸 입 밖에 내면 생명이 위태로운 시대였기에 당시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혁명을 하는 것이었어요.”
얼마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네티즌을 상대로 ‘한국의 대표작가-노벨상 후보를 추천해주세요’라는 온라인 투표행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박경리 선생이 과반수가 넘는 지지로 1위를 차지했다.
“우리 국민들이 너무 노벨상 운운하는 것도 사실은 자존심 상해요.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국어로 글을 쓰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번역문제도 그래요. 제 작품을 제가 읽지 못하는 영어, 불어로 번역한다는 데 대해서 미심쩍고 불안하고 달갑지가 않아요. ‘토지’를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글을 쓰는 게 생의 전부였다고 말하는 박경리 선생. 문학을 대하는 작가의 자리를 엄격하게 지켜온 대가로서 그만큼 인생에 드리운 그늘이 깊었다는 속내일 것이다.
“인생 자체가 문학이에요. 문학을 내 인생과 갈라놓지 않아요. 문학이 제 인생이고 제 인생이 문학이고…, 그래서 고향이다 친구다 모든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창작의 자유는 고독을 통해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 작가가 어디에 소속될 때는 창조성도 저당 잡히거든요. 자유는 쓸쓸하고 고독한 것이죠. 외로워야 자유로운 거예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선생은 1955년 김동리 선생에 의해 단편소설 ‘계산’이 ‘현대문학’에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주요 작품에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녹지대’와 다수의 단편소설, 그리고 수필집 ‘Q씨에게’ 등이 있다. 현재 연세대 석좌교수로 사단법인 토지문화관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곧 80세에 다다르는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그가, 또 현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이기도 한 대작가로서의 그가 체득한 ‘인생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인생에 대한 물음, 진실에 대한 물음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끝이 없게 그 물음에 매달리는데 ‘모른다’는 그 말만이 확실한 것이죠. 제가 집념이 별로 강하지는 않지만 그 물음을 포기할 때는 작가도 포기하는 거죠. 포기할 수 없으니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여성동아 2004년 10월 4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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