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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향기로운 그녀

4년 만에 시집 펴내고 문학상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 구가하는 시인 문정희

“시는 나의 애첩, 조금만 한눈을 팔면 질투하고 나를 책상 앞으로 끌어당겨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홍중식 기자

2004. 08. 10

4년 만에 새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를 펴낸 문정희 시인. 미국에서 영문 시선집 ‘할미꽃(Windflower)’을 펴내고, 레바논에서 문학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그가 말하는 삶의 아름다움과 욕망, 고독.

4년 만에 시집 펴내고 문학상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 구가하는 시인 문정희

‘저여자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이 시를 만들어내겠구나!’ 15년 전 문정희 시인(57)을 처음 만났을 때 어깨를 덮는 굽실굽실한 파마머리에 오래도록 눈이 갔다. 당시 그는 항상 머플러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는데 바람결에 머플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 또한 참 근사했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인사동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머플러를 두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바람 냄새는 여전했다. 그는 여전히 바람의 힘으로 시를 굽고 있었고, 새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도 그렇게 형체를 드러냈다.
‘머플러’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멋으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감추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겠죠”하며 쓸쓸히 미소짓는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입니다/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입니다/ 물푸레나무처럼 늘 당당한 그녀에게도/ 간혹 아랍 여자의 차도르 같은 보호벽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시 ‘머플러’ 중에서)
인생이라는 ‘황소’ 앞에 그의 머플러는 단순한 패션 코드가 아니라 ‘투우사의 망토’ 같은 것이었을까.
“인간에게 피와 살이 있는 한, 모든 것이 상처이고 욕망이고 고뇌일 겁니다. 저는 베틀에 홀로 앉아 매일 베를 짜는 아낙처럼 한줄 한줄 시를 써요. 자유와 고독이라는 음식을 먹어야 시가 써지는 것 같아요.”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는 ‘오라, 거짓 사랑아’ 이후 4년 만의 시집. 지난 해 미국에서 그의 영문 시선집 ‘할미꽃(Windflower)’이 출간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지난 5월 레바논에서 외국 작가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나지나만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시집은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일어·히브리어 등 8개 국어로 번역·소개되었다. 또한 지난 5월 제16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해 시력 35년인 그에게 시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는 시가 ‘애첩’같은 존재라고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책을 볼 때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늘 시만 생각해요.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하면 시가 ‘아니 이것 봐라’ 하면서 질투를 하고 저를 컴퓨터 앞에 앉도록 만들죠. 그래서 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를 써요.”

결혼이 억압으로 다가올 땐 여행하며 갈등 해소
지나친 억측일까. 새·별·꽃·물·불·흙의 정령들을 불러 모아 ‘자유혼’을 길러내고, 분출하는 화산처럼 뜨거운 시를 쏟아내는 그가 결혼이라는 테두리에 묶여 있는 것이 기자는 오래 전부터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결혼뿐만 아니라 어디에 묶인다는 느낌은 싫죠. 만일 결혼생활이 글을 쓰는데 많은 제한을 가했다면 벌써 그 옷을 벗어버렸을 거예요. 가끔 결혼생활이 심한 억압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데, 그때는 여행으로 해소해요. 여행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이니까요.”
그는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좀 늦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은 있다고 한다.

4년 만에 시집 펴내고 문학상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 구가하는 시인 문정희

“제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외교관이었던 큰오빠 집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늘 ‘콩쥐’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빨리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을 일찍 서둘렀던 것 같아요.”
전남 보성의 대지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던 그의 아버지는 허무주의자였던 탓에 일상을 사냥으로 소일하다 종국에는 술 때문에 무너졌다. 어머니가 마흔 둘에 시인을 출산해 그는 늦둥이 막내딸로 귀여움을 톡톡히 받고 자랐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의 부재로 그의 한쪽 발은 늘 허공에 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 그만 하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제 아킬레스건이에요.”
아버지란 단어를 내뱉는 순간부터 시인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늘 화려하고 당당한 그가 아니었던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 속에서 완고한 성 하나가 와르르 무너지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 덧 시인에서 아버지를 여읜 어린 딸로 바뀌어 있었다.
“엄하고 무서웠지만 좋은 아버지였어요. 제가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 보성 집에 내려갔다가 광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아버지가 기차역까지 따라 나오셨죠. 아버지는 막내딸이랑 조금이라도 더 계시려고 기차 안까지 오르셨다가 기차가 출발하면 밖으로 뛰어내리셨던 분이었어요.”
그가 왜 머플러를 두고 ‘상처를 덮는 날개’요 ‘불구를 가리는 붕대’라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부족할 것 없는 부잣집 막내딸이었지만 광주에서의 중학교 시절, 서울에서의 고등학교 시절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어요.”
아버지와의 따뜻한 포옹이 영원히 사라진 후, 그를 줄곧 따라다닌 것은 ‘결핍’이라는 그림자였다. 결핍은 욕망을 부르는 법. 그의 욕망은 시로 꿈틀거렸다. 그는 여고시절 전국 고교백일장에서 수차례 장원을 차지, 일약 학생문인 스타가 됐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재능에 빗댄 ‘한국의 사강’이 그의 별명이었고 전국 문학청년들의 팬레터가 쇄도했다. 여고생 신분으로 ‘꽃숨’이라는 시집도 냈다.
이때 시집의 제목을 붙여주었던 미당 서정주 시인은 “하늘 아래 네가 최고로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시에 일찍 핀 꽃이 일찍 시드는 것이 아닌가 근심어린 목소리로 문학소녀의 앞날을 염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시는 요절하지 않았다. ‘급류에 떠내려가는 바리공주.’ 문씨는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짓는다.
“제 몸속에는 이 세계의 바람이 담겨져 있어요. 자유혼 같은 것이죠. 그 어떤 것도 저를 묶지 못하도록 급류에 떠내려가는 바리공주의 심정으로 살았어요. 그래서 제가 반짝했다 사라지는 학생스타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시를 쓸 수 있었어요.”

나흘간 코피 흘리며 죽음의 공포 느낀 후 새삼 ‘몸’을 통해 존재감 느껴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시에는 ‘몸’에 관한 시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 가을 뉴욕주 북쪽에 있는 창작촌 ‘아트 오마이’에서 혼자 시쓰기에 매달려 있었어요. 왠지 혼자 버려진 느낌이어서 책상에 엎드려 많이 흐느껴 울었죠. 몇 주가 지났을까, 코피가 한 번 쏟아지더니 그치질 않는 거예요. 나흘 연속 코피를 펑펑 쏟았어요. 그때 ‘시를 쓰다가 죽는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절박하게 들었어요. 그 코피는 코피가 아니라 공포 그 자체였고 죽음의 그림자였죠.”
이때 그는 코피를 흘리면서 득도하듯 ‘몸’과 정면으로 만났다고 한다.
“그 동안 제 존재를 내버려두고 살았는데 ‘몸’을 통해 다시 제 존재를 느꼈다고 할까요? 죽음의 공포를 겪게 되니까 몸을 보게 되더군요. 우리 몸은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욕망과 독을 동시에 지닌 한 송이 꽃이에요. 제 시도 그런 꽃이고 알몸이고 생각의 자궁이길 바래요.”

4년 만에 시집 펴내고 문학상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 구가하는 시인 문정희

문정희 시인은 우울증이 찾아오는 날이면 훌쩍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아들을 만나고 온다.


그는 또한 40대 초반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다. 보름달처럼 환한 가슴으로 싱싱한 시의 화살을 쏘아대던 그가 초승달처럼 저물어버린 한쪽 유방을 감싸고 얼마나 많은 열패감에 시달렸을까. 이때도 그는 시를 놓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자 무사족 아마조네스는 사냥과 전투를 즐겼다고 하는데 활을 쏘기 편하도록 오른쪽 유방을 도려냈다고 전해진다. 그도 마치 아마조네스 전사처럼 싱싱한 시의 화살을 쏘기 위해 숙명처럼 여자의 상징을 시의 화살과 맞바꿔버린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시를 ‘애첩’이라고 하지만, 시의 제단 앞에 그는 속죄양에 불과하다. ‘생각의 자궁’을 짓는데 골몰하느라 그는 40대 중반에 몸의 자궁을 제물로 바쳤다.
“모든 것을 문학 때문에 버렸어요.”
시를 쓸 때 그는 ‘신발을 벗어두고’ 덤비지만 그밖의 일상생활에서는 천상 여자이고 자라지 않은 아이같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아들을 만나 라스베이거스에 함께 놀러 갔어요. 아들은 피곤하다고 자려고 하는데 제가 막 졸라서 도박장에 끌고 갔지요. 둘이 밤새 ‘빙고’를 외쳤잖아요(웃음).”
국제변호사인 아들은 시인의 ‘젊은 연인’이다. 그는 우울증이 찾아오는 날이면 훌쩍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아들을 만나고 온다.
“몸에 집시의 피가 흐르나봐요. 떠나고 싶으면 어디든지 망설이지 않고 떠나요. 제가 좀 변덕스럽거든요. 올 여름에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날 겁니다.”
그는 ‘치열한 절제’를 시인의 첫째 미덕으로 꼽지만 여행, 커피잔, 액세서리 이 세 가지 만큼은 마음껏 누린다.
“커피를 하루 6잔 정도 마셔요.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까 예쁜 커피잔을 보면 꼭 사게 되더라고요. 집에 꽤 많은 커피잔이 있어요. 목걸이, 팔찌 같은 액세서리로 멋내는 것도 좋아해요. 제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나에게 잘 해야지’ 하면서 저 자신한테 선물하곤 해요.”
여자가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임을 자각하게 된다고 말하는 문정희 시인. 앞으로도 그가 아마조네스 전사처럼 몸의 길이를 길게 늘이고 정신의 깊이를 팽팽하게 당겨서 쏘아 댈 싱싱한 시의 화살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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