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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캔디

입력 2004.08.03 11:58:00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캔디

신데렐라는 여자들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인기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여전히 신데렐라로 묘사되고, 남자 주인공 역시 완벽한 왕자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 속 신데렐라의 캐릭터가 변하고 있다. 빼어난 외모에 연약한 신데렐라가 아니라 그저 그런 외모에 무식할 정도로 씩씩한, 딱 캔디 같은 여자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모양이다. 결코 신데렐라를 향한 야심만은 수그러들지 않으니 말이다.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예전엔 주책스럽게 여겨지던 할머니들의 모험담이 멋지고 근사하게 여겨진다. 프랑스 여류작가 아니 에르노가 15세 연하의 러시아 외교관과 사랑과 애욕에 빠져 오십 가까운 나이에 쓴 일기 ‘탐닉’을 읽거나 ‘50대 꽃뱀이 남성들을 유혹, 억대 챙겨’ 등의 기사, 60대에도 연애를 한다는 할머니들의 무용담(?)을 전해 들으면 나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여전히 산타클로스 같이 착한 사람이 선물을 들고 나타나기를, 왕자님이 나타나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외치기를 꿈꾼다. 아무리 나이 들어도 꿈꿀 권리는 있으니까.
요즘은 신데렐라가 되어 주말을 보낸다. 젊고 유능하고 매력적인 왕자가 나타나서가 아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보는 덕분이다. 물론 줄거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파릇파릇 어리지도 않고(스물여섯이란다), 눈부시게 아름답지도 않고, 학벌이 뛰어나거나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데다 삼촌과 사촌동생이란 혹까지 달린 그녀는 어리버리에 건망증도 심하다. 장점이라고는 잘 웃고 밝고 긍정적이라는 것. 이런 여자가 프랑스에서 재벌2세를 만나 화려한 명품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간다. 또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재벌2세가 척 나타나 탁 하고 해결해준다. 그 남자의 조카는 잘 생겼지, 연주도 잘하지, 자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두 남자가 동시에 듬뿍 사랑을 해준다. “우리 애기” “내 맘 안에 네가 있다” 등등 갖가지 명대사를 날리면서 말이다.

주름살도 뱃살도 흰머리도 다 잊고 ‘파리의 연인’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
냉정하고 비판적인 이들은 ‘현실성이 없는 드라마’ ‘21세기에 아직도 신분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 드라마’ 등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게 어디 다큐멘터리인가, 드라마지. 드라마는 꿈과 환상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 아닌가. 구두 한 켤레 슬쩍 흘려놓은 덕분에 팔자 고친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부당이익이라고 나무라야만 할까.
박신양이 웃으면 나한테 미소를 보내는 것처럼 짜르르해지고, 이동건이 김정은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면 내 얼굴의 주름살도, 늘어진 뱃살도, 삐죽삐죽 솟아난 흰머리도 다 잊고 텔레비전 화면에 빨려 들어간다.
“아, 난 너무 시대를 일찍 타고 났어. 좀 천천히 이 세상에 등장해야 하는 건데 말야. 내가 결혼할 무렵엔 코스모스처럼 청순가련하고 가냘픈 여자들이 인기였거든. 요즘 드라마 주인공들, 완전히 내 성격 아냐. ‘파리의 연인’도 그렇지만 얼마 전에 끝난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명세빈도 명랑하지, 덤벙거리지, 잘 웃지, 잘 흘리지,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마냥 씩씩하지. 딱 나잖아. 아, 20년만 냉동실에 누워 있다 나오는 건데….”
내가 거품을 뿜으며 말하니 나와 외모는 천양지차이나 성격이 비슷한 딸이 거들었다.
“엄마, 저런 성격은 여전히 현실에선 사랑 못 받아. 좀 내숭을 떨고 애교도 있어야지. 씩씩하기만한 여자아이들, 남자들이 무서워해. 아, 정말 이 징그러운 유전자가 싫다, 싫어.”
두 여자 곁에서 남편은 발가락 떼를 밀며 콧방귀만 뀐다.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캔디

그렇다. 만화 ‘캔디 캔디’의 주인공 캔디는 드라마와 만화에서나 사랑받을 뿐 실제 상황에서 승리의 트로피를 가져가는 것은 모두 귀엽고 예쁘고 세포 마디마디가 솜사탕 같은 여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여자들, 스스로를 캔디라고 믿는 나 같은 여자들은(실제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생각에 그렇다는 거다) 드라마를 보고 대리만족을 하고 위안을 받는다.
남녀관계만이 아니다. 같은 며느리 중에서도 여리디 여린 며느리는 별로 일을 안하고도 “걔는 몸이 약하잖니” 하며 용서를 받는데 팔뚝 굵고 씩씩한 성격의 며느리는 명절만이 아니라 김장 때도 혼자 다 일을 해야 한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남들이 무슨 말을 해도 웃어 넘기고, 야근이건 뭐건 다 받아들이는 여직원에게는 “야, 비위도 좋고 체력도 좋다”며 더 진한 농담을 하고 더 많은 일을 시킨다. 그래서 가늘가늘한 여직원들이 상사의 보호를 받으며 일찍 퇴근한 후, 씩씩한 여직원은 우걱우걱 야식을 먹으며 수북히 쌓인 일을 한다. 그래서 팔뚝은 더욱 굵어지고.
그런 씩씩한 여성으로 40여 년을 살았는데, 이제 드디어 드라마에서나마 대접을 받는 것 같아 흐뭇해진다. 드라마에서 이런 성격의 여성들을 대접(?)해주고 사랑스럽게 포장하다보면 남성들의 가치관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문제는 캔디 같은 여자는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데 드라마 속의 박신양이나 이동건, 이현우 같은 남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다는 거다. 도대체 어느 빌딩에서 일하고 어느 골목으로 다니는지 보이지 않는다. 개구리인 줄 알았는데 키스하니 마법이 풀려서 왕자로 변신하는 게 아니라 왕자인 줄 알고 키스했더니 개구리로 변하는 남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물론 이 나이에, 이런 용모에 멋진 남자가 나타날 확률을 말해 무엇하랴만은 그래도 착각은 자유, 환상은 무료 아닌가. 팔순에도 “당신 아름답소”란 찬사를 들으면 틀니를 부르르 떨면서 황홀해하는 게 여자니까.


여성동아 2004년 8월 4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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