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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안타까운 사연

어머니 임종에도 귀국 못하고 사모곡 담은 육성녹음만 보낸 로버트 김

“제가 보고 싶다고, 곧 미국 으로 오신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고 하셨는데…”

■ 기획·최호열 기자 ■ 글·김남인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4. 07. 12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다 미국에서 국가기밀누설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지난 6월1일 가석방된 로버트 김. 그가 불효자가 되어야 하는 아픔에 피눈물을 흘렸다. 지난 2월 작고한 아버지의 빈소를 지키지 못한 데 이어 6월4일 작고한 어머니의 빈소마저 지키지 못한 것. 몸은 한국에 오지 못하고 애끊는 사모곡만 목소리로 녹음해 보내야 했던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취재했다.

어머니 임종에도 귀국 못하고 사모곡 담은 육성녹음만 보낸 로버트 김

출소 후 가택연금중인 로버트 김과 부인 장명희씨.


지난 6월8일 서울아산병원 영결식장. 미국에서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가택수감중인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이 별세한 모친 황태남씨(83) 영전에 바치는 육성 녹음테이프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분30초 분량의 사모곡은 중간중간 울음소리로 끊기기 일쑤였다.
“아버님께서 저희들과 사별하신 게 엊그제 같은데 또 어머님께서 이렇게 갑자기 우리와 이별을 하게 되니 저희들이 너무나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님과 잠깐이라도 전화로 통화할 기회를 가져 그 절절하신 어머님의 사랑의 말씀은 아직도 저의 귓전에 남아 있습니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의 임종을 또 못하게 된 저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모님의 생전에 꼭 한번이라도 가까이 모시면서 살고 싶었는데 어머님마저 이렇게 떠나시니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먼저 떠나신 아버님의 어머님을 향한 사랑이 이렇게 빨리 어머님을 불러 가시는 듯합니다. 하지만 평화스러운 하늘나라에서 어머님과 아버지가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두고 가신 저희들은 더 이상 염려 마시고 고통이나 죽음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두분 계속 사랑하시고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장남 채곤 올림.”
이 테이프는 로버트 김의 부인인 장명희씨(61)가 들고 온 것이다. 8년간의 남편 옥바라지 후 얻은 장씨의 백발이 검은색 상복 때문에 유독 눈에 띄었다. 장씨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남편이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데다 시어머니의 갑작스런 별세 소식에 눈 한번 제대로 못 붙이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남편이 많이 괴로워했어요. 너무나 오고 싶어했지만 ‘나 대신 잘 부탁한다’며 제 뒤통수에 대고 손을 흔드는 것밖엔 할 수 없었죠.”
로버트 김은 7월27일 만기 출소를 앞두고 수감돼 있던 버지니아주 윈체스터 교도소에서 나와 지난 6월1일부터 교도소에서 80㎞ 정도 떨어진 자택에서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지난 1월부터 평일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한 후 교도소로 복귀했고, 3월부터는 교도관의 감시를 받으며 주말을 집에서 보내왔다. 가택연금 기간에는 평일과 주말에 상관없이 집에서 생활할 수 있지만, 집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순 없다.
따라서 로버트 김은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부친 김상영옹(8·9대 국회의원, 전 한국은행 부총재)에 이어 어머니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게 됐다. 모친의 별세 소식에 미 법무부 감찰관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꼭 한국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석방(7월27일) 이후 판사 허가를 받아 한국을 방문할 수도 있으나 가택수감중 나가는 것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였다.
영결식장에서 영정사진으로 만난 황태남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푸른색 한복 저고리에 짧은 파마를 한 모습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아들이 풀려나 너무나 좋다”며 수줍게 웃던 고인이었다.

친어머니 같은 사랑으로 로버트 김 키운 황씨
황씨는 지난 6월3일 밤 11시쯤 경기도 수원에 있는 동네 찜질방에서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갔지만 다음날인 4일 오후 4시20분 끝내 숨을 거뒀다. 황씨가 숨을 거둔 날, 로버트 김은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의 자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새벽 5시쯤 둘째 동생인 김성곤 열린우리당 의원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로버트 김은 이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이게 꿈인가’ 싶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어머니 임종에도 귀국 못하고 사모곡 담은 육성녹음만 보낸 로버트 김

“전날만 해도 ‘7월쯤에 건강한 얼굴로 보자’고 하셨는데…. 저와 통화만 하시면 우시느라 제대로 말씀을 못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날 전화로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무척 외롭고 쓸쓸하다. 너도 너무 보고 싶고’라고 하시더군요.”
그가 부모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1년 면회 때였다. 부친인 김상영옹은 장남인 로버트 김을 면회하러 갔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휠체어에 앉아 아들을 맞았다. 허리가 많이 굽어 키가 작아진 어머니 황씨의 모습도 아들의 마음을 괴롭혔다.
“‘건강해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라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나는 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이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이 됐는가’ 하며 망연자실했습니다. 그간 저 때문에 마음고생이 크셨을 텐데 임종도 못 지키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으니…. 두분 다 저 때문에 돌아가신 것만 같아서 괴롭습니다.”
대신 그는 한국으로 떠나는 아내 장명희씨의 손에 녹음테이프를 하나 쥐여줬다. “꼭 모시고 싶었는데 만나뵙기도 전에 이렇게 황망히 가시니 제가 불효자입니다” 하는 내용이 담긴 육성테이프로, 영결식 때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 15년 된 엑셀을 몰고 씩씩하게 다니시던 분이셨어요. 허리가 좀 불편하셨지만 건강한 편이시라 7월에 미국에 오겠노라고 하셨죠. 그런 분이 돌아가셨다니…. 몸은 못 가지만 목소리라도 영정 앞에 가 닿고 싶었어요.”
모친 황씨는 로버트 김이 6세 때 아버지 김상영옹과 결혼해 2세 때 친모(역병으로 사망)를 잃은 로버트 김을 키웠다. 그러나 로버트 김의 형제들은 철이 들 때까지 로버트 김이 배다른 형제인지 모르고 자랐다고 한다. 셋째인 김성곤 의원도 중학교 때 누나인 김은정씨의 일기장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그만큼 어머니가 형제 모두를 정성껏 키우셨어요. 형에게는 ‘우리집 맏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죠. 형이 혹시나 상처를 입을까 싶어 말 한마디도 조심하셨던 분이셨어요. 그렇지만 형이 내성적인 성격이라 가끔은 조그만 것에서 상처를 받았죠. 어머니는 또 형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아파 우시고…. 서로 잘해주려고 하면서도 그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황씨는 전남 여수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머물다 지난 5월30일 수원 자택으로 돌아왔다. 40㎏이 채 안 되는 작은 몸집으로 지난 2월 남편이 세상을 뜰 때까지 3년반 동안 꿋꿋하게 간병을 해온 고인이었다. 그러나 기다려왔던 장남의 출감 소식에는 눈물만 흘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했다. 가족들은 “계속 울기만 하셨어요, 장남이 보고 싶다고, 7월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고, (로버트 김이) 잠깐이라도 나올 수는 없는 거냐고…. 그새를 못 참고 돌아가셨네요” 하며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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