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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위해 책 읽어주는 봉사활동 하는 주부 박민희

“제 목소리가 많은 분들의 눈이 된다는 사실에 보람 느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안소희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4.07.05 17:23:00

활자로 되어 있는 책을 음성으로 녹음해 시각장애인에게 들려주는 박민희씨(35).
그는 1년 넘게 책 녹음봉사를 하며 녹음봉사에 멋지고 훌륭한 목소리보다 따뜻한 배려와 정성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시각장애인 위해 책 읽어주는 봉사활동 하는 주부 박민희

녹음 시작 사인이 들어온다. 벌써 1년 넘게 매주 해오는 일이지만 녹음실에 들어서면 언제나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크게 심호흡 한번. 잠깐의 침묵을 깨고 또박또박 책을 읽는다. 기분 좋은 긴장감, 이 작은 긴장감이 일상에 젖은 나를 흔들어 깨운다.
“그것 보라이,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냄…, 안 앰시냐! 다시 할게요. 죄송합니다.”
“괜찮수다.”
기술담당 실장님께서 제주도 사투리를 흉내내며 긴장을 풀어주신다. 요즘 현기영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녹음하고 있는데 제주도 사투리가 많이 나와 실수가 잦다. 하지만 소설의 맛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사투리가 필수이기 때문에 연습을 거듭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책 읽어주는 여자’가 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간다. 녹음봉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주위 분의 권유로 이곳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책을 읽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문화센터에서 1년6개월 동안 동화구연 강좌를 들은 후 한창 동화구연가로 활동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봉사를 시작하며 나의 자신감은 자만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녹음봉사는 멋지고 훌륭한 목소리가 필요치 않았다. 그보다는 따뜻한 배려와 정성이 우선이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활자의 색깔이 너무 진하거나 화려하면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책을 귀로 ‘듣는’ 분들에게는 편안한 소리가 제일인 것이다.
시각장애인 위해 책 읽어주는 봉사활동 하는 주부 박민희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시각장애우들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그분들이 신문은 어떻게 읽고 인터넷은 어떻게 이용하는지, 사소한 메모는 어떻게 하는지 등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며 새삼 장애우들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부끄러웠다. 내가 녹음봉사를 하는 게 어쩌면 남을 돕는다는 허영심을 충족시키려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눈을 감은 채 그분들의 처지에서 내가 녹음한 소설을 들어보았다. 침 삼키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때문에 도저히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숨소리 하나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곳에서 녹음된 도서들은 테이프나 CD로 만들어져 도서관에 비치되거나 시각장애우들에게 직접 전달된다. 특히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분들은 점자에 익숙하지 않아 음성도서가 절실히 필요하다. 어떤 분은 종일 귀로 책을 읽으며 갑자기 찾아온 어둠을 외롭지 않게 견뎌낸다는 감사의 편지를 보내주기도 한다. 내가 녹음한 책들이 인기가 좋을 때는 마냥 부자가 된 기분이다.

시각장애인 위해 책 읽어주는 봉사활동 하는 주부 박민희

일주일에 한번씩 활자로 된 책을 녹음하는 일을 하는 자원봉사자들.


녹음봉사는 정성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려움도 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전과를 녹음할 때는 무척 힘이 들었다. 괄호 열기와 괄호 닫기 등을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녹음해야 하는데다 그림의 모양까지 말로 설명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전과를 녹음하며 자연스럽게 공부가 되어 아들 창민이(8)의 수많은 질문에도 거침없이 답해주는 똑똑한 엄마가 됐다.
내가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축복 같은 선물이다. 이 일은 동화구연가라고 활동하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던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또한 나의 목소리가 많은 분들의 눈이 된다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아직 어려 점자를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알콩달콩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쁨은 아마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래, 이게 바로 내 일이구나’ 하는 자부심은 내 삶을 당당하게 만들어주었고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아내, 엄마로 만들어주었다.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다시 녹음 시작 사인이 들어왔다. 자, 크게 심호흡 한번. “그것 보라이,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앰시냐….”


여성동아 2004년 7월 4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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