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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아름답고 감사한 오늘

2004. 06. 04

아름답고 감사한 오늘

예전에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도 고마워할 줄 몰랐다.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늘 먼저 떠올라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작은 일에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듬성듬성 하나씩 흰머리가 생겨나긴 해도 숱이 많은 머리와 돋보기 없이도 작은 글씨까지 척척 읽어내는 두 눈, 매달 젊고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생리와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왕성한 식욕까지 모든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세상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새로운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또 한번 감사한다. 하루 하루가 내게 주어진 선물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다. 패기만만한 젊은 시절에는 절대로 고마운 줄 모르던 일, 감사해하기는커녕 불만으로 가득했던 일들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아주 커다란 선물을 받거나 과분한 칭찬을 들어도 시큰둥했다. 누군가로부터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면 당연하게 여기고, 오히려 더 잘해주지 않는 것이 서운했다.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런데 세월이라는 스승은 아주 사소하고 유치한 일에도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내가 못 가진 것보다 가진 것을 헤아리며 감사하도록 나를 변화시켰다.
얼마 전부터 흰머리가 늘기 시작했다. 서양 사람들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면 당당하게 다니겠지만 군데군데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흰머리는 초라해 보인다. 한달이라도 염색을 거르면 여기저기서 “어머, 웬 파뿌리?” 하는 반응을 보이는 터라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에게 흰머리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더니 한숨을 쉬며 자기 머리를 만졌다.
“제 머리, 이거 가발이에요. 제가 워낙 머리숱이 없어서 거의 대머리 수준이거든요. 머리숱이 많아진다는 약, 샴푸, 비누 등 각종 비법을 동원했는데 별로 효과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포기하고 가발을 쓰는데 아주 불편해요. 흰머리라도 유인경씨처럼 그렇게 머리숱이 많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그렇다. 내가 만약 대머리라면 흰머리라도 남들의 머리카락을 부러워했을 게다. 새삼 숱이 많은 머리를 물려준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희끗해졌지만 숱 많은 머리, 귀찮기만 했던 생리건강함의 징표라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해
머리카락과 함께 요즘은 내 눈에도 감사함을 느낀다. 워낙 시력이 좋아 평소에도 안경이나 렌즈를 쓸 필요가 없고, 웬만해선 눈의 피로도 느끼지 못한다. 학창시절엔 안경을 쓰면 지적으로 보일 것 같아 시력이 나빠지도록 일부러 흔들리는 차안에서 책읽기, 촛불이나 햇빛 바라보기 등 무모한 짓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력은 조금도 나빠지지 않았다. 친구들 중엔 벌써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써야 하는 이들도 꽤 있다. 아직 매끈하고 팽팽한 얼굴에 돋보기를 써야 하는 것 역시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얼마 전 음악회에 갔다가 한 무리의 여성들을 만났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화려한 스카프, ‘부티’ 나는 가방과 구두로 한껏 치장을 했는데, 그 우아한 이들이 이렇게 웅성거렸다.
“얘, 우리 좌석 몇 번이니? 난 이런 작은 글씨는 안 보여서 말야.”
“나도 안 보여. 너, 돋보기 갖고 왔니? 네 돋보기 좀 꺼내봐라.”
결국 내가 나서서 그들의 티켓에 씌어진 좌석 번호를 읽어주었다. 어두운 곳에서 그 작은 글씨를 척척 읽어대는 내 눈이 참으로 대견했다.

아름답고 감사한 오늘

귀찮기만 했던 생리도 요즘은 반갑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라면 누구나 매달 치러야 하는 행사가 정말이지 귀찮고 싫었다. ‘한달에 한번씩이 아니라 1년에 한번,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약은 없나?’ ‘생리대 값은 또 왜 이렇게 비싸?’ 하는 불평을 하며 하루 빨리 생리가 없어지기만 바랬다.
그런데 요즘은 매달 정기적으로 생리를 하는 것만도 엄청난 축복으로 생각된다. 빨리 폐경기가 온 이들, 자궁 질환으로 자궁을 들어내 생리를 못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그들 중엔 우울증을 앓거나 호르몬 이상으로 다른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나이가 들면 생리량이 점차 줄어드는데 많은 이들이 이것 또한 엄청 섭섭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난 30여 년 동안 “아이고 지겨워, 지겨워” 하고 소리지르던 생리를 이제는 달마다 찾아오는 귀한 손님처럼 반갑게 맞이한다. 그건 내 몸이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왕성한 식욕도 건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매일 먹는 밥도 그렇다. 난 그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식욕을 잃은 적이 없다. 끙끙 앓으면서도 항상 먹고 싶은 메뉴가 떠오른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땐 슬픔을 견디지 못해 식음을 전폐할 줄 알았는데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에 밥을 한 공기씩 말아 먹어치웠다.
그런 내 자신이 때론 한심하고, 동물같이 생각되지만 이제는 그런 왕성한 식욕조차 고맙기만 하다. 예전보다 확실히 소화기능이 떨어져 과식을 하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요즘, 먹고 싶은 의욕, 맛있다고 느끼는 감각, 피와 살이 되게 만드는 소화흡수력이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매순간 내쉬고 들이키는 호흡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충격이 커서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천식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정밀검사를 해보니 내가 남들보다 호흡량이 적고, 호흡 속도도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조금 많이 걷거나 뛰면 금방 숨이 차고, 과식을 하면 비슷한 증상을 보였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많이 걸어야 할 때는 호흡장애가 올까 두렵다. 천천히 걸으면서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면 안도의 숨을 내쉰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숨쉬기. 그러나 그것조차 건강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숨쉬고 배설하고 보고 느끼고…. 이처럼 너무 기본적이고 기초적이어서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매일 바라보는 하늘, 바람, 꽃, 길거리 풍경 등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새삼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여전히 세상은 만만치 않고, 깜짝 놀랄 일들이 터져 눈물 흘릴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 하나씩 깨우치고 배워간다는 생각에 또 한번 감사하게 된다. 선물처럼 내게 주어진 오늘, 그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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