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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가슴 아픈 사연

중학생 때부터 함께 살아온 새 아버지 떠나보낸 김미화 눈물의 사부곡

■ 글·조득진 기자 ■ 사진·동아일보 출판사진팀, 스포츠조선 제공

2004. 05. 04

개그우먼 김미화가 지난 3월말 상을 당했다. 친아버지 사망 후 어머니와 만나 어린 자매를 돌보아주었던 새아버지가 수술 후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친아버지 이상으로 잘해주었던 새아버지를 떠난보낸 그의 슬픔은 남다르다. 지난해 호주제 폐지운동으로 자신의 가정사를 밝혔던 그가 부르는 사부곡.

중학생 때부터 함께 살아온 새 아버지 떠나보낸 김미화 눈물의 사부곡

그를 만나기로 한 날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성균관대 사회과학부 건물 현관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작은 체구와 동안 탓인지 마치 어린 여대생 같았다. 그는 사회과학부 사회복지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원래 올해 졸업을 했어야 하는데 수강신청 과정에서 일이 잘못돼 일년을 더 다니게 됐어요. 방송하랴, 공부하랴 정신이 없네요. 하지만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하다보니 제 생각도 젊어지는 것 같아요. 젊은 감각을 가질 수 있어 방송활동 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요.”
요즘 원서로 진행하는 수업이 많아 수업준비 하랴, 과제물 내랴 몸이 힘들긴 해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특히 자신이 평생하고 싶은 사회복지를 공부하기 때문에 더욱 의욕이 솟는다고 한다.
개그우먼 김미화(41). 활발한 방송활동을 하며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그는 방송 외에도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유명하다. 여성운동연합과 유니세프, 참여연대, 녹색연합 등 20여 개의 비정부기구(NGO)에 참여해 ‘준 사회운동가’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그는 지난해 여름,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며 ‘내 원래 이름은 박미화, 호적엔 어머니와 동거인으로 올라 있다’고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밝혀 화제가 됐다. 박씨였던 친아버지가 죽고 난 후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성을 바꿨다는 것. 그러면서 지금 자신의 아버지는 생부가 아닌 새아버지라고 밝혔다.

간단한 수술이었으나 합병증으로 넉달 만에 세상 떠나
그 새아버지 김원곤씨가 지난 3월22일 숨을 거두었다. 병원에 입원해 십이지장 수술을 받은 지 넉 달만의 일. 아버지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에게 친아버지 이상의 사랑을 주었던 새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오래 전부터 아프셨던 건 아니고, 조그만 혹이 발견돼서 병원에 갔다가 치료 도중 악화됐어요. 혹만 없애면 되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서 수술을 진행했는데…. 정말 30분이면 수술이 끝나고 사흘 후엔 퇴원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중학생 때부터 함께 살아온 새 아버지 떠나보낸 김미화 눈물의 사부곡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고 산 새아버지와 그는 법적으로 아무관계가 아니지만 친 부녀지간이나 다름없었다고.


그러나 수술결과가 좋지 않았다. 수술 도중 다른 장기가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합병증을 유발했던 것이다. 일흔 둘이라는 신체적 나이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합병증을 견디기엔 무리였다.
“수술결과가 안 좋아 회복실로 가지 못하고 중환자실로 옮겼어요. 이후 넉달 동안 식사도 한끼 못하시고 대소변도 어머니가 다 받아내야 했죠. 돌아가시기 한달 전부터는 정신도 놓은 상태였어요.”
그런 가운데 혈관의 고름을 빼기 위해 살을 찢는 등 수 차례 수술이 더 진행됐다. 무엇 하나 입으로 음식물을 넘기지 못하는 아버지의 몸은 점점 말라갔고, 황달까지 와서 더욱 고통스러했다.
“사흘만 병원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일이 커져버릴지 아무도 몰랐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더 고통 겪지 말고 빨리 가셨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버지에게 ‘제가 낫게 해드리겠다’고 몇 번을 다짐했지만 불가항력이더군요. 아버지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사람이 마지막 가는 순간에 정신은 놓아도 귀는 열려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아버지 제 능력이 여기까지인가 봐요. 아버지는 지금껏 착하게 사셨으니까 좋은 데 가실 거예요. 더 이상 고통 받지 말고 편히 가세요’ 하고 말씀드렸죠. 그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슬펐는지….”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아버지는 그래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 부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음날 눈을 감았다.
“아마도 동생 부부를 기다리셨던 모양이에요. 병원에 도착한 동생이 ‘아버지, 저 왔어요’ 하며 부르자 그때 순간적으로 한쪽 눈이 부르르 떨리더군요. 그리곤 다음날 새벽에 주무시듯 돌아가셨어요.”
수 차례의 수술과 약물투여로 많이 상한 남편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가. 그의 어머니는 임종을 못 보겠다며 울며 쓰러졌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중학생 때부터 함께 살아온 새 아버지 떠나보낸 김미화 눈물의 사부곡

지난해 호주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던 그는 유니세프 참여연대 등의 NGO에 참여하고 있는 준 사회운동가다.


“아버지는 무척 착하게 산 사람이에요. 길에서 천원 한 장을 주워도 내 돈이 아니라고 벌벌 떠는 분이셨죠. 그래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믿어요. 하염없이 우는 엄마에게 울지 말라고 했어요. 남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울면 영혼도 미련이 남아 쉽게 떠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편히 보내드리자며 엄마 앞에선 울음도 참고, 문상객들을 맞으며 애써 웃음도 지어보였던 그. 그러나 참았던 슬픔은 입관할 때 터져버렸다.
“잘 참았는데….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다 생각하니 울음이 북받치더군요. 마지막에 황달이 심해 아버지의 온몸이 노란색이었는데, 수의와 같은 색깔이더군요. 당신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슬프던지….”
사실 호적상으로 새아버지와 그는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아버지 또한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었고, 이후 이혼수속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호적정리가 되지 않은 것. 아버지 역시 같은 김씨이긴 하지만 그와 여동생은 어머니 성을 따서 김씨다.
“제가 중학생 때부터 같이 살았기 때문에 피만 안 섞였지 친부모 자식과 똑 같아요. 특히 저는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좋았어요. 제 동생이 저보다 인물이 조금 나은 편인데, 그래도 저를 더 예뻐해주셨죠. ‘미화가 제일 예쁘다, 나중에 효도도 미화가 많이 할 거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결혼 후에도 무릎이 불편한 어머니 대신 지하철을 갈아타고 반찬을 가져다주었던 아버지, 지난해까지 11년 동안 손주들을 다 키워준 아버지에 대해 고마운 기억이 많다는 그는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가슴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고 한다.

호적 문제로 서운한 감정 가진 적 있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정 느끼게 해준 고마운 분
“아버지에게도 자식들이 있어요. 그쪽과 별거한 상황에서 혼자 사시다 어머니를 만나셨어요. 그러나 이혼은 하지 않았죠. 중학생 때 두 번인가 호적문제로 아버지와 다툰 적이 있어요. 그쪽과 이혼하고 우리를 호적에 올려야 하지 않느냐고요.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인데 안 하시는 게 서운하고 이해가 안됐거든요.”
한참을 고민하던 아버지는 “너희는 이미 호적이 엄마한테 올라가 있지 않느냐, 그쪽엔 자식이 많은데 그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그 아이들 시집 장가갈 때 나 때문에 곤란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그 말을 듣고 ‘그럼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서운함에 한동안 힘겨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서운함이에요. 아버지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으신 분이셨죠. 제가 하는 일 모두 지지해 주셨고, 심지어 사위가 좀 서운하게 해도 뭐라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시는 분이었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조금은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고 한다. 아버지가 쓰던 휴대전화를 해지하러 갔더니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접수를 받아주지 않았고, 사망신고 역시 ‘법정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못한 것. 그는 마지막 가시는 길, 깨끗이 보내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스럽다고 말했다.
“문제는 어머니예요. 아버지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셨던 터라 많이 힘드신가 봐요. 우리 엄마는 쓰레기 버리는 날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아버지가 다 해주셨거든요. 어디 모임에라도 다녀오시면 엄마가 생각나 음식을 꼭 싸가지고 오시곤 했죠. 혼자서 집에 우두커니 있는 엄마를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가끔 아버지 옷과 사진을 보며 따라 죽고 싶다고 우셔서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동생을 아직 붙잡아두고 있어요.”
그는 예전에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 사는 것에 대해 불만도 많았는데 막상 자신이 아이를 낳고 살다보니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자식이 챙길 수 없는 부부의 자리가 크게 느껴진다고.
“지난해 SBS의 ‘어머니’라는 프로그램에서 부모님께 웨딩드레스를 입혀드렸어요. 결혼식 없이, 호적에도 못 올리고 사신 두 분이 무척 기뻐하셨죠. 그런데 이럴려고 마지막으로 결혼식을 올렸나 봐요. 지금도 웨딩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냉장고 위에 올려놓고 대화를 하는 엄마를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아버지 사진을 수첩에 넣고다닌다는 그는 수첩을 열 때마다 한줌 재로 사라진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난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랑과 정을 느끼게 해준 그분은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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