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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사마리아’ 음악 만든 영화음악가 지박

■ 글·구미화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4.03.10 13:59:00

최근 뉴에이지 음반 ‘So Sad’를 발표한 지박은 국내 음악팬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미국의 권위 있는 영화음악상을 두번이나 수상하며 그 가능성을 인정받은 영화음악가다. 최근 그가 음악을 담당한 영화 ‘사마리아’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해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선 지박을 만났다.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사마리아’ 음악 만든 영화음악가 지박

충무로에서 괴짜로 통하는 김기덕 감독이 원조교제를 소재로 한 영화 ‘사마리아’로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이가 있다. 영화음악가 지박(27·본명 박지웅). 지난해 김감독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이어 ‘사마리아’의 음악을 담당한 그는 김감독의 영상에 자신의 음악을 입히면 세계 무대에 도전해도 승산이 있겠다는 판단이 맞아떨어진 것에 쾌재를 불렀다. 앞서 김감독과 처음 손을 잡고 만든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도 지난해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박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먼저 가능성을 인정받은 영화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2000년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음악상 중 하나인 ‘제리골드 스미스상’을 수상한 데 이어 그 이듬해 미국 저작권협회가 주는 영화음악가상을 차지했다. 제리골드 스미상은 ‘빠삐용’ ‘혹성탈출’ ‘원초적 본능’ 등의 배경음악을 만든 원로 영화음악인 제리골드 스미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매년 수천명의 음악가들이 짧은 영상을 보고 그에 어울릴 만한 음악을 만들어 경쟁하는 일종의 영화음악 콩쿠르다. 지박은 제리골드 스미스상을 수상한 최초의 동양인이자 최연소 수상자. 이듬해 미국 저작권협회 영화음악가상 시상식에서 만난 세계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는 그에게 ‘최고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보냈고,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는 그의 곡으로 앨범을 만들겠다며 10여곡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아홉살이 되던 해에 성악가인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2년 전, 김기덕 감독의 제의로 귀국했다. 당시 ‘해안선’을 촬영중이던 김감독이 미국에서의 그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한 것. 지박은 김감독의 영화가 분위기나 메시지를 전달할 때 대사보다는 음악에 더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배경음악을 처음 공개하던 날, 김감독은 아무 말도 없이 음악만 듣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김감독의 괴팍하고 과묵한 성격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정말 황당했어요. 애써 음악을 만들어왔는데 아무 말도 안하니까요. 처음엔 화가 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김감독이 가장 만족했을 때의 표현법이라고 하더군요. 엔지니어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음악을 놓고 김감독과 다투지 않은 사람은 저밖에 없더라고요.”
결국 그는 ‘사마리아’ 작업에도 참여했고, 김감독이 계획하고 있는 새 영화 ‘유리’(가제)의 음악도 맡기로 했다.

6세 때부터 영화음악에 매료돼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음악 만들고 싶어
다른 음악 장르와 달리 영화음악은 영상이 말하고자 하는 기쁨과 슬픔, 증오 등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같은 이별이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슬프지만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 복잡한 심리까지도 묘사해야 하는 게 영화음악”이다.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매력 있다는 그는 어린 아이가 오락에 빠지듯 좋아서 몰두했던 것이 어느새 능력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지박이 영화음악에 매료된 건 놀랍게도 여섯살 때부터라고 한다. 음악을 전공한 부모의 가르침 때문인가 했더니 어려서부터 늘 집안에 음악이 흐르고 있었을 뿐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그는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주말의 명화’를 빼놓지 않고 본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사마리아’ 음악 만든 영화음악가 지박

지박은 동양적인 색깔을 갖되 서양인들도 감동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어린 꼬마가 영화를 보면서 뭐 그리 감동할 일이 있나 싶지만 어느 날인가 ‘주말의 명화’ 시간에 방영된 영화 ‘Feeling Love’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Feelings’을 듣는 순간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물론 그때는 영화 제목과 곡명을 알 수 없었지만 그뒤로 마치 중독이라도 된 듯 주말이면 TV 앞에 오도카니 앉아 영화를 봤어요. ‘주말의 명화’ 테마 음악만 들어도 흥분했다니까요(웃음).”
‘엠마누엘’ ‘남과 여’ ‘러브스토리’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영화 속 줄거리는 가물가물해도 감동적이었던 영화음악만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가 열살 무렵 처음으로 구입한 음반도 영화 ‘ET’의 OST였다고.
“열살 때부터 영화음악 CD를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용돈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한달에 하나밖에 못 샀거든요. CD 하나를 사면 다른 걸 살 때까지 한달 동안 줄기차게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절로 학습이 된 것 같아요.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의 마음까지 움직인 걸 보면 지금 생각해도 영화음악은 참 위대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음악에 빠져들 무렵 피아노도 배우기 시작했다. 남다른 음악적 감수성이 피아노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됐을 듯한데 오히려 방해가 됐다고 털어놓는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음악을 치고 싶은데 바이엘이나 체르니 같은 정형화된 것들을 가르치니까 짜증이 나더라고요. 결국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나이를 좀더 먹고 나서야 피아노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어요. 어렸을 때 무조건 진도에 맞춰 피아노를 치라고 강요하기보다 제가 좋아하는 곡들을 멜로디만이라도 따라서 칠 수 있도록 쉽게 편곡해 들려주고, 지도해주는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이 훨씬 수월했을 거라 생각해요.”
그는 16세 때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뒤로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도서관에 콕 박혀 지냈다고 한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성경책 몇장 몇절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도 모르고, 매번 책을 뒤적인다면 우습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그는 음악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모든 장르의 음악 이론과 악보들을 죄다 섭렵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줄리어드음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다. 그리고 버클리 음대와 UCLA에서 영화음악 작곡을 공부했다.
영화음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최근 ‘So Sad’란 이름의 뉴에이지 앨범을 발표했다. 그가 고국에 자신을 알리는 첫 음반으로 뉴에이지 음악을 선택한 건 한국에서 뉴에이지 음악이 명상이나 종교 음악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영화음악과 뉴에이지 음악은 모두 클래식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다만 뉴에이지 음악이 영화음악보다 좀더 단순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뉴에이지 음악의 효시는 쇼팽의 ‘녹턴’과 같은 피아노 연주곡이에요. 피아노 연주곡에 풍부한 서정성을 가미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이죠.”
이런 생각으로 그는 자신의 음반에도 듣는 사람의 잠재된 감수성을 자극할만한 서정적인 음악, 휴식에 도움이 될만한 음악들을 담았다고 한다.
지박은 앞으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토마토소스와 치즈가 들어간 피자로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고구마가 들어간 피자를 만들어내듯 한 장르를 고집하기보다 클래식 힙합 재즈 팝페라 등을 접목시킨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여성동아 2004년 3월 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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