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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버지의 러브레터

두 아들에게 쓴 편지 모아 책으로 펴낸 한국폴라 회장 이청승

■ 글·구미화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4. 03. 10

한국폴라 이청승 회장이 이 땅의 자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모은 에세이집 ‘아버지의 편지’를 펴냈다. 서정적인 그림을 곁들인 감성적인 편지글로 아버지들의 고민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대변한 이청승 회장을 만났다.

두 아들에게 쓴 편지 모아 책으로 펴낸 한국폴라 회장 이청승

“이제 아버지의 끝은 너희들의 시작과 맞닿아 있다. 너희가 어느 길목에서 주저앉고 싶을 때 그것이 너희에게만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란 걸 알기 바란다. 그때 아버지의 지난날 어리석음이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누구나 살면서 ‘10년만, 아니 1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하고 무릎을 치며 뒤늦은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누군가가 한 길은 늪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성공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라고 일러줬으면 하고 바란 적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부모 입장에선 아이들의 마음을 알기도, 바른 길을 알려주기도 쉽지 않다. 학교 수업을 마치는 대로 조르르 달려와 하루 일과를 곧잘 재잘대던 아이들이 어느새 커버려 식탁에서 마주하기도 쉽지 않고, 마음먹고 시작한 진지한 대화도 고리타분한 훈계로 여기지나 않을까 하며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이런 부모와 자녀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좁힐 수 있는 방법으로 편지를 들고 나선 이가 있다. 화장품 브랜드 한국폴라와 인쇄회사인 고려피앤텍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청승씨(59). 기업인이면서 개인전을 다섯 차례나 연 화가이자 ‘문제’ ‘많이 묻는 사람이 많은 대답을 한다’ 등의 에세이집을 낸 수필가인 그는 최근 ‘아버지의 편지’란 책을 펴냈다. 자민(30)과 현민(26),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육십 평생,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얻어낸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마치 두 아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듯 편안한 문체로 써내려갔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남이 하던 데서부터 시작하라는 말이 있는데 앞서간 사람들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제거하면 훨씬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죠. 전 사업을 하면서 늘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뭐든 검증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죠. 제 두 아들과 이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은 저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야 세상을 알 것 같은데 용기와 힘이 달리는군요. 못다 이룬 아버지들의 꿈을 아들들이 이뤄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습니다.”
그는 콩비지로 끼니를 때우던 유년시절, 밀린 수업료를 소매치기 당했을 때의 암담함, 어린 눈으로 지켜본 전쟁의 참혹함을 글로 써내려가며 가난하고 암울했던 시절의 기억조차 험한 세상을 건너는 다리가 됐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한 학창시절이나 사업을 통해 만난 유명인들과의 에피소드,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보고 느낀 점 등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들도 담았다. 비록 컴퓨터 앞에서 머뭇거리는 구세대라 하더라도 경륜에서 묻어나는 삶의 지혜는 디지털 세대가 인터넷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값진 것들이다.
96년, 이미 ‘많이 묻는 사람이 많은 대답을 한다’라는 제목으로 두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책으로 펴냈던 그는 큰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던 해에 처음으로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큰아이 학교 숙제로 부모에게 편지 쓰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들이 편지를 써 제 책상에 놓기도 하고, 회사로 보내기도 했는데 무척 감동적이더라고요. 아이 편지에 답장을 쓰기 위해 처음 펜을 들었죠. 그 뒤로는 잦은 출장길에 편지를 쓰게 됐고요.”
그는 가족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10여 차례 계속하다 보니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편지로는 자연스럽게 하게 되더라고 했다. 이번에 펴낸 ‘아버지의 편지’는 최근 2∼3년 사이 두 아들에게 써 보내거나,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글을 모은 것이다.

두 아들에게 쓴 편지 모아 책으로 펴낸 한국폴라 회장 이청승

그는 미국에 있는 큰아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고 있지만 그보다는 내심 펜으로 쓴 편지를 기다리게 된다고 말했다.


학교 숙제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아들들은 어느새 아버지가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훌쩍 자랐다. 큰아들은 현재 미국 유학중이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아들은 국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아들만큼이나 젊었던 시절을 돌아보면 그 역시 “알라딘의 마술램프에서 솟구쳐오르는 거인이라도 된 듯 세상과 온몸으로 맞부딪치며 절망보다는 긍정과 희망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살았다”고 회고한다. 그런 추진력이 있었기에 수십년간 생활과 밀접한 아이템을 소재로 한 기업들을 경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지금,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를 고루 소개하는 잡지 ‘BESETO’를 발행하고, 북경 현우예술대학을 운영하는 등 문화예술 분야에 남은 힘을 쏟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룬 것만큼이나 잃은 것도 많다”고 털어놓는다. IMF 여파로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입으면서 가정의 화목이 깨지고, 자신감마저 잃게 된 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시간들에 대한 회의와 함께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그는 “오랜 시간, 바깥으로 나돌면서 늘 가족을 위해서라고 자위하곤 했는데 지나고 보니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고 했다. 사회적으로는 부와 명예를 얻었을지언정 가족들에겐 결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것. 그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가족이고, 차분하게 사는 인생이야말로 건강한 인생이라고 강조하며 돌이킬 수 없을 때 잘못했다는 걸 깨닫고 후회하기보다 당장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갖기를 당부했다.
몇년 전만 해도 거리를 걷다가 괜찮은 여자를 보면 뒤돌아보곤 했다는 그는 요즘은 괜찮은 여자를 보면 ‘며느리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웃었다. 늘 ‘만년 청년’으로 불리고 싶었던 자신이 어느새 아들의 배필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 그는 요즘 훌쩍 커버린 자식들과 충돌을 일으킬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큰아이랑 한동안 많이 부딪쳤는데 떨어져 지내니까 서로 그리워하고 그간의 행동을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요새는 작은아이랑 자주 다투는데 한번은 통 대화가 안돼서 ‘너하고는 깊은 얘기를 못하겠다’고 선언을 해버리고 나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들 녀석과 부딪쳐보고서야 비로소 아버지 심정을 이해하게 된 거죠.”
그는 앞으로 두 아들에게 좋은 아비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 인생은 그 아들의 모습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조만간 각계각층의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글을 모은 ‘아버지의 편지 2’를 펴낼 예정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 긴밀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다시금 확인시키기 위해서다.
“지금, 아버지들이 너무 위축돼 있어요. 50∼60대가 되면 사회에서 밀려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이 책을 오히려 제 또래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자위하며 더 많이 읽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얻어 ‘아버지의 편지 2’도 낼 생각이에요.”
‘사오정’ ‘오륙도’ 시대라는 요즘 사회 분위기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그는 노숙자, 재벌, 농부, 정치인 등 다양한 아버지들의 사연을 공모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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