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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사랑을 나눠요

여덟살배기 소년 가장 돕는 주부 권선주

“20년 전 조카 남에게 맡긴 가슴아픈 기억 씻고 싶어요”

■ 정리·안소희 ■ 사진·정경진

입력 2004.03.04 14:13:00

3년 전부터 소년 가장인 종호를 틈나는 대로 돌보고 있는 권선주씨(43)는 그 자신이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리면서도 10년 전부터 복지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숨은 천사다.
20년 전 지은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해 죽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권씨의 사랑 나누기.
여덟살배기 소년 가장 돕는 주부 권선주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30분에 눈을 떴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한 대학에 다니는 큰딸 혜림이(21)는 등교를 위해 5시30분이면 일어난다. 간호학을 전공하는 혜림이는 졸업하면 엄마를 도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주고 싶다고 한다. 다른 엄마들처럼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투정 한번 없이 잘 자라준 아이가 대견하고 고맙다. 고3인 아들 범진이(19)와 남편을 학교로, 직장으로 보내놓고 나니 벌써 오전8시. 오늘은 종호(9)를 만나는 날이라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종호의 얼굴을 봐야 마음이 놓인다.
내가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10여년 전, 복지원의 아이들을 도우면서부터다. 봉사활동은 내게 ‘봉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죽어서도 덜어내지 못할 마음의 빚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는 스물한살에 결혼했다. 관절염으로 다리를 못 쓰는 시어머니와 나이 어린 시동생을 돌봐야 했기에 첫아이 돌이 지나자마자 공장으로 출근을 하며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남동생이 맡기고 간 아이가 있었는데, 며칠을 잠 못 이루고 고민하던 끝에 어느 교회에 편지와 함께 조카를 맡겼다. 그 때문에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내게는 가슴 아픈 기억을 어루만져주는 고해성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활동이 이제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3년 전부터는 ‘소년소녀가장돕기모임 365봉사단’에 참여하고 있다. 회원들은 매월 회비를 모아 소년소녀 가장에게 생활비 일부를 지원하고, 두세 명의 회원이 소년소녀 가장 한 가족을 돌보는 2:1 지원활동을 한다. 소년소녀 가장들은 대부분 단체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특히 사춘기의 예민한 아이들일수록 더하다. 그렇기 때문에 회원 두세 명이 한 아이를 맡아 가족처럼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아이가 종호다.
오전 9시 종호네 집에 도착해서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중풍을 앓는 종호 할아버지의 이부자리를 살펴보니 옷과 이불이 많이 더러웠다. 가져온 운동복으로 갈아입히고 이불을 새것으로 교체한 후 종호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설거지며 빨래가 잔뜩 쌓인 집안을 정리했다. 종호를 알게 된 지도 어느새 3년이 넘었다. 당시 일곱살이던 종호가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처음 종호네 집을 찾았을 때 부엌도 없는 초라한 집에서 간장에 비빈 밥과 물 한 그릇이 놓인 밥상 앞에 앉아 있던 종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종호는 영양실조 때문에 눈의 초점이 안 맞고 체중도 평균치를 턱없이 밑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할아버지 교통보조금 8천원과 ‘365봉사단’에서 주는 월 10만원의 후원금이 생활비의 전부다. 종호는 호적상 아버지가 생존해 있어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다.

여덟살배기 소년 가장 돕는 주부 권선주

윤씨는 20년 전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해 10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종호의 절박한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부업으로 하고 있는 화장품 판매를 위해 몇집 돌고 나서 다시 종호네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들어서니 종호가 “아줌마다” 하며 반겼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선뜻 마음을 열지 않았던 종호는 이발도 시켜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하자 차차 내게 다가왔다.
종호는 항상 밝고 씩씩하다. 지난해 가을 놀이공원에 가던 날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난다. 아침 8시에 종호네 집에 도착했는데 종호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새벽 1시부터 준비를 하고는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꼬박 밤을 지샜다고 종호 할아버지가 귀띔을 해주셨다. 여덟살 어린아이가 기다리기에는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화가 난 종호는 맨발로 뛰어나와 비에 젖은 운동화를 신고는 차에 냉큼 올라탔다. 놀이공원에 도착해 “놀이공원에 온 사람이 4만∼5만명은 되겠죠” 하길래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어릴 때 아빠랑 와본 적이 있는데 아주 재밌었어요” 하고 말했다. 순간 내가 안쓰러워하는 걸 눈치챘는지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어 보이던 속 깊은 종호.
종호는 오늘도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골목까지 배웅을 나왔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고 또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아도 종호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서 있었다. 종호의 신발이 많이 낡은 것이 눈에 밟혔다. 다음에 올 때는 꼭 새 신발을 챙겨와야겠다.


여성동아 2004년 3월 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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