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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가 사는 법

20년 동안 보고 느낀‘여자와 남자의 삶’책으로 펴낸 여성학자 박혜란

“서로 요구하기 보다 이해하고 조화 이룰 때 부부 관계 행복해져요”

■ 글·최호열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2004. 02. 10

기자 6년, 전업주부 10년, 여성학자 20년…. 여성학자 박혜란씨가 걸어온 길이다. 그가 최근 20년 동안 연구한 여성학을 바탕으로 여자와 남자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은 에세이 ‘여자와 남자’를 펴냈다. ‘여자’인 그가‘남자’인 남편, 세 아들과 20년 동안 살아온 이야기.

20년 동안 보고 느낀‘여자와 남자의 삶’책으로 펴낸 여성학자 박혜란

여성학자로, 교육운동가로, 가수 이적의 엄마로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59). 그에게 책을 쓴다는 것은 인생의 단계를 하나씩 넘어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외 한번 안 시키고 세 아들을 서울대에 보낸 이야기를 담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1996), 바쁘게 활동하던 도중 병으로 쓰러지면서 나이듦과 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이야기를 담은 ‘나이듦에 대하여’(2001) 등 인생의 한 단계를 넘어설 때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글들엔 그의 인생이 묻어 있기에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그가 이번엔 본격적으로 여성학자의 눈으로 여자와 남자의 사는 이야기를 성찰한 에세이 ‘여자와 남자’를 펴냈다. 인생을 조금 더 산 선배로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여자와 남자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그를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전에는 강연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좀 쉬려고 많이 줄였어요. 대신 여행을 많이 다니고 있어요. 그외에는 ‘또 하나의 문화’ 동인 활동과 ‘여성신문’ 논설위원을 하고 있고요. 작년 3월부터는 공동육아운동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이미 세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는데 공동육아에 관심을 갖는다는 게 의외네요.
“당연한 것이죠. 저도 둘째아이 낳으면서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는 걸요. 그런데 육아문제가 20년이 지나도 하나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어요. 아무리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를 부르짖어도 가장 큰 걸림돌인 육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안되겠더라고요. 결국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한다고, 육아문제는 여성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배로서 공동육아의 필요성을 아니까 대안을 마련해주어야죠.”
-여행은 자주 가나요?
“지난 연말에 남편과 일본에 다녀왔어요. 아이들이 다 크니까 이젠 가족이 남편밖에 없어요(웃음). 여행은 자주 다녀요. 11월에도 진도 동백꽃 보고 왔어요. 나이가 들면서 여행 다니는 횟수가 늘어나더라고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해외에 더 많이 나가 견문을 넓히고 싶어요. 여행을 하면 좋은 게 집에선 아무래도 제가 아내의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밥도 내가 해야 하고. 그런데 밖에 나가면 그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남편과 사이좋은 친구가 되는 거예요.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되고.”

20년 동안 결혼과 출산이 여자의 선택사항이 된 건 큰 변화
-84년에 처음 여성학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꼭 20년이 됩니다. 당시 39세라는 나이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뭔가요?
“어떤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30대 후반이면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은 누구나 자아의 위기를 겪어요. 남자는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도 ‘관록이 붙는다’고생각하는데 여자는 ‘이제 내 젊음이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그동안 주체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30대 후반에 깨달았어요.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느냐 안하느냐, 인정한 다음에 그냥 묻어두느냐 어떻게든 푸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래서 ‘나를 알기 위해’ 여성학 공부를 시작한 거죠.”

20년 동안 보고 느낀‘여자와 남자의 삶’책으로 펴낸 여성학자 박혜란

-당시 아이들이 한창 클 나이였잖아요. 더구나 강남 8학군에 살고 있었으니 자녀교육이 많이 신경 쓰이지 않았나요?
“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엄마로서의 역할은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부터는 밥해주고 아프면 병원 데려가고 하면 되는 거죠. 애들은 충분히 스스로 잘 클 수 있어요. 전 지금도 왜 그렇게 엄마들이 하나하나 챙겨주는지 안타까워요. 책가방을 놓고 학교에 가봐야 다음부터 스스로 책가방을 챙길 줄 알아요. 엄마가 항상 챙겨주니까 신경을 안 쓰는 거죠. 그러다 한번 안 챙겨주면 ‘엄마 때문이야’ 하고 신경질을 내잖아요(웃음). 당시 애들이 다 컸으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커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과 아이들이 반대하지 않았나요?
“아이들은 전혀 반대하지 않았고, 남편이 반대했죠. 불만을 토로했어요. 근데 그건 사소한 거예요. 공부를 시작할 때 남편에게 ‘나를 구속시키지 말라’고 했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하라고 했죠. 생활습관이 달라지니까 불편했을 거예요. 제가 직접 물을 떠다주다가 이젠 물을 직접 떠다 먹으라고 하니까요. 해주던 것을 안 해주니까 기득권을 빼앗긴 것 같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남편에게도 독립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때부터 우리집 가훈은 ‘각자 잘 하자’예요.”
-남편이 집안일을 잘 도와주지 않았나요?
“남편은 전형적인 경상도 가정에서 자란 60대 남자예요. 전 그 부분을 인정해요. 남편이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이끌어내야지 안되는 부분을 억지로 하게 하면 안돼요. 갈등만 커질 뿐이에요. 예를 들면 남편은 절대 밥을 안해요. 그래서 제가 바빠서 저녁을 대신 해결해달라고 하면 외식메뉴를 결정해줘요. 남편이 직접 밥을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 밥을 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 차이는 무척 중요해요.”
-그래도 남편과 갈등이 많았겠어요?
“어느날 남편이 술병이 나서 방안에 누워 있었어요. 생태찌개가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전 그때 리포트 때문에 바빴어요. 그래서 둘째에게 찌개를 끓이기 위해 무를 사오라고 했는데 안 가는 거예요. 화가 나서 큰소리를 쳤죠. 그러니까 남편이 ‘이게 사는 거냐’ 하면서 짜증을 내더라고요. 그때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주저앉아 펑펑 울었어요. 그걸 보고 아이가 놀라서 얼른 무를 사오고 저를 다독거리더라고요. 그런 에피소드는 많죠. 그런데 그걸 자연스런 갈등으로 받아들여야지 심각하게 생각해 하던 일을 포기하면 안돼요.”
-‘여성’의 지위가 처음 공부를 시작하던 84년과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나요?
“가장 큰 차이는 결혼은 선택이고 일이 필수가 되었다는 거예요. 전에는 반대였잖아요. 그리고 당시는 출산(그것도 아들)이 여자의 일차적인 목표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출산도 선택이 되었잖아요. 엄청 많이 달라졌죠.”
-그렇다고 해서 여자와 남자가 모두 행복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완벽한 남자, 완벽한 여자를 요구하잖아요.
“그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모든 사람이 슈퍼맨, 슈퍼우먼이 될 수는 없어요. 돈도 잘 벌고 아내에게도 잘 하고…. 그러기가 쉬운 게 아니죠. 그보다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편하게 사는 게 중요해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물량주의, 일등주의 문화 때문이에요. 중간을 못 참아요. 뭐든지 남보다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그런데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서로 맞춰 가야죠.”
-서로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뭔가요?
“‘남자라서 이렇다’ ‘여자라서 저렇다’는 편견을 버려야 해요. 한 사람을 바로 알려면 그가 살아온 과정과 습관을 이해해야 돼요. 전 아들이 세명이 있는데, 한배에서 나온 아이들조차 제가 놀랄 정도로 다 달라요. 그러니 20억명 남자가 다 다르고 여자가 다 다르죠. ‘남자’ ‘여자’라는 틀에 끼워 사람을 생각하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어요.”

20년 동안 보고 느낀‘여자와 남자의 삶’책으로 펴낸 여성학자 박혜란

박혜란씨는 앞으로도 여성문제, 교육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고 싶다고 한다.


-여성문제에서 최근 대두가 되는 전업주부와 일하는 주부의 갈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전업주부와 일하는 주부는 서로 시기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요. 서로 우월감과 열등감이 동시에 있는 거죠. 그럴 필요가 없어요. 각자 주어진 조건에서 어느 한쪽의 삶을 선택했을 뿐이에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어서 전업주부가 되었을 수도 있고, 스스로 좋아서 선택했을 수도 있어요. 취업주부도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다니는 사람도 있고 자기계발을 위해 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양쪽 다 장점과 단점이 있어요. 그걸 서로 나누는 게 필요해요. 예를 들어 취업주부는 급식당번을 할 수 없으니까 전업주부는 그걸 이해해주고 대신 취업주부는 자기가 가진 사회의 노하우나 기술을 나누어주면 서로 좋은 거잖아요. 이젠 영원한 전업주부도 영원한 취업주부도 없어요. 배운 여자가 어떻게 평생 집안에만 있겠어요. 상황에 따라 선택을 하는 거죠.”
-지난해엔 영화와 드라마의 영향으로 주부들의 바람이 화제가 되었잖아요. 일부에선 여자들의 바람이 자아 찾기라는 말도 하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섹스가 자아 찾기라고 하는 건 상술일 뿐이에요. 자기를 찾는 노력이 힘드니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섹스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정말 섹스를 통해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건지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해요.”
-여성학자로서 아이들을 가부장적이지 않게 키우기 위한 나름의 교육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아이들에게 엄마가 가사노동을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어요. 밥을 먹거나 간식을 먹을 때도 ‘고맙다’는 표시를 하게 했어요. 그래서 아이들 친구들이 와서 보고는 ‘계모 같다’고 했다더군요(웃음). 그렇게 가르쳐서인지 자기들이 스스로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제가 집에 없으면 자기들끼리 밥도 해먹고 그래요. 큰애는 결혼해서 지금 미국 유학중인데 부부가 둘이서 너무 자연스럽게 부엌일을 하더라고요. 아주 좋아 보여요.”
-아이를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도 처음부터 소신 있게 키운 건 아니고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장남을 키울 때 스포크 박사의 육아법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어요. 식욕이 왕성한 애였는데 책에 몇개월 때는 3시간마다 몇㏄씩 먹이라고 되어 있어 열심히 따라 했죠. 애가 배고파 울면 보리차를 먹였다니까요. 그러다가 ‘내 애는 내 상황에 맞춰 키우는 건데 왜 권위자의 말만 따랐을까’ 싶어 그후로는 제 생각대로 키웠어요.”
-자녀교육을 소신대로 시키기가 참 어렵지 않나요?
“지금의 교육문제는 부모의 집단주의 의식에서 비롯된 문제예요. 흔히 ‘우리 애가 남보다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말하는데, 그 ‘남’이라는 기준이 모호해요. 또래 아이들이 몇백만명인데 어디다 기준을 맞출 건가요. 그러니까 사교육을 시켜도 불안하고 안 시켜도 불안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안 시키자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어떻게 키우는 게 아이에게 행복할까’ 하는 고민도 마찬가지예요. 정답은 없어요. 아이의 안에 있는 힘을 키워주면 되는 거예요. 부모가 자신감이 있어야 해요. 그러면 아이는 자생력이 생겨 잘 커요.”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뭔가요?
“여자와 남자가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진 틀을 벗어나서 그야말로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면 작은 갈등은 있을지 몰라도 큰 갈등은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어차피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사는 대상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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