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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 사회 비판한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펴낸 한의사 고은광순

■ 글·장옥경 ■ 사진·홍중식 기자

입력 2004.02.10 13:44:00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호주제 철폐와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고은광순씨가 남성 중심의 사회를 통렬하게 고발한 책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를 펴냈다. 남자에게만 가문을 이을 ‘씨’가 있다고 말하는 할아버지, 기저귀 찬 여자는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다는 남자 목사 등의 예를 통해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남성우월주의를 꼬집고 나선 그를 만났다.
남성 중심 사회 비판한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펴낸 한의사 고은광순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운영위원으로 호주제 폐지 문제에 있어 ‘잔다르크’를 자처해온 열혈 여성주의자이자 한의사인 고은광순씨(48)는 돌아오는 설을 염두에 뒀는지 만나자마자 “남자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사수하려는 이 땅의 전통 가운데 과연 순수한 전통이 뭐가 있느냐”며 남자들이 중국에 뿌리를 둔 제사를 고집하는 탓에 여자들만 괴롭다며 분노했다.
“만약 남편이나 시집식구들이 비난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많은 주부들이 제사 준비를 하지 않을 거예요. 이승에서 산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제사로 모시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 땅의 많은 여자들이 죽은 사람의 문화에 붙잡혀 고통을 당한다면 그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전통 속에서 구성원들이 행복하고 편안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전통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요?”
이토록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 불만이 많은 그가 최근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가부장적인 한국사회를 비판한다. 아내에겐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요구하고 바깥에선 요염한 여인에게 눈길을 돌리는 한국 남성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이중적인 태도가 바로 비뚤어진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때문임을 꼬집는 것. 그는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의 근간이 되는 호주제를 철폐해야만 독립된 주체들이 상호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처음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정했던 제목은 ‘들어라 한국남성들아’였다고 한다. 남성 우위의 풍조를 과감히 깨부수겠다는 취지에서 지은 제목이었다고. 그런데 고질적인 우월주의를 가진 사람들의 그릇된 의식을 계도하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많이 읽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부터 거부감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하에 마무리 과정에서 제목을 다소 순화시켰다고 한다.

한의사로 활동하며 아들 낳는 처방 해달라고 조르는 환자들 숱하게 접해
4녀2남 중 넷째딸로 태어난 그는 자라면서 알게 모르게 숱한 남녀차별을 경험했고, 한의사로 활동하며 남아선호사상에 젖은 안타까운 현실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첫 아들을 낳은 후 내리 딸을 넷이나 낳았다. 아들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욕심에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요즘처럼 초음파기술이 발달했으면 나는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그는 한숨을 내쉰다.
7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흥사단 이화여대아카데미’에서 서클 활동을 하며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고, 군사독재를 비판하다 대학 3학년 때 두번이나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결국 77년 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그는 취직도 힘들고 외국에 가려고 해도 비자가 발급되지 않자 일종의 생존전략으로 한의학을 택했다. 군사정권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티려면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83년에 입시학원에 등록하고 한의대를 목표로 대학 입시를 준비한 그는 이듬해 대전대 한의대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92년에 한의원을 개원한 그는 또다시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찾아온 환자들 중에 아들 낳는 처방을 해달라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에게만 그런 환자들이 몰리나 싶어 한의사 2천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기막히게도 90% 이상의 한의사들이 아들 낳는 처방을 해달라는 환자를 접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저는 아들을 낳기 위해 스무 번이나 낙태를 한 환자를 진료한 경험도 있는 걸요. 아들을 낳지 못해 우울증에 걸린 환자도 있었고요. 남편이나 시집에서 아들을 낳으라고 스트레스를 주는 바람에 신경쇠약 상태에 빠진 거였어요.”

남성 중심 사회 비판한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펴낸 한의사 고은광순

“아직도 내가 100% 이씨라고 생각하세요”하고 적힌 엽서는 호주제 철폐 운동의 홍보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화가 치밀었던 그는 ‘왜 우리 사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고 원인을 캐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보다 호주제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 그는 인터넷을 통해 만난 대학생들과 함께 호주제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모임의 성격을 시민운동단체로 발전시키자는 공감대를 마련하였다.
96년 그는 급기야 ‘여한의사회보’에 아들 낳는 처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며 이를 중지하도록 이끌었고, 이듬해 여성단체연합과 공동으로 남녀성비 불균형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으로 호주제 철폐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 시발점이 ‘부모 성 같이 쓰기 운동’이다.
98년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호폐모)’을 정식으로 발족한 뒤 지금까지 그는 5년 넘게 호주제 철폐를 뜻하는 리본을 달고 다닌다. 그 리본 때문에 남성 우월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마련한 호주제에 관한 토론을 마치고 방송국을 빠져나오는데 씨족 대표로 나오셨던 분들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주변에서 왜 자꾸 귀찮게 그런 데 끌려 다니느냐고 말합니다. 총 한방이면 될 텐데…’ 총 한방으로 없애버리면 된다니요? 뜨악 할 소리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아담을 먼저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가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할아버지도 봤고, 호폐모 게시판에 ‘남성을 깔아뭉개고 여자만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발악한다’ ‘앉아서 오줌 누는 빨갱이년들아’ 하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로 도배를 해놓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이버수사대에 의뢰할 정도였죠.”
그에 따르면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남성우월론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윗자리와 앞자리는 남자가 차지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는 것. 그는 남녀관계에서 ‘함께’나 ‘옆’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그들에게 양성평등 주장은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납득을 시키려고 해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며 답답한 현실을 토로하기도 했다.
“전 여성상위를 부르짖은 적이 한번도 없어요. 엄마 성만 쓰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성도 쓸 수 있게 하자고 할 뿐이죠. 결혼하면 여자 집으로 남편을 입적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남녀 구분 없이 개개인이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독립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하자는 것뿐입니다. 명절을 여자들이 조상을 위해 제상을 차리는 날로 전락시킬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축제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드라마 CF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는 가부장적 문화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
그는 종교와 대중문화 등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고 마는 일상 속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가부장적 문화를 꼬집어내기도 했다.
“한국사회가 수직적 위계 구조 속에 있으니 당연히 종교계도 자유롭지 못하죠. 신부와 수녀의 관계나 여승이 아무리 나이가 많고 불교에 입문한 지 오래되었어도 남승을 만나면 먼저 예를 올려야 한다는 불가의 원칙이나 기저귀 찬 여자는 감히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다는 한 개신교 목사의 발언은 결국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요.”
추운 겨울 동자승이 바가지를 들고 해우소 바깥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담은, 몇년 전 히트친 CF를 보고서는 분노했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차가운 눈밭 위에서 물바가지를 들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해우소 안에 든 사람은 과연 마음 편히 일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것.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아랫것’이 ‘윗분’을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 녹아 있는 것 같아 광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싸늘해졌다고 한다.

남성 중심 사회 비판한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펴낸 한의사 고은광순

고은광순씨는 양성평등을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하며 납득하려들지 않는 남성우월론자들을 비판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가 여자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어르고, 여자는 아무말 못하고 속으로만 웅얼거리는 식의 장면을 외국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요. 남자는 대단한 존재이고 여성은 비천한 존재임을 무의식중에 세뇌시키는 그런 드라마는 지양해야 합니다. 이혼율을 줄이기 위해 여자가 참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시대는 지났어요. 남자가 변해야 하고, 사회가 각성하는 시스템과 문화가 정착해야만 이혼율을 줄일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그는 83년, 입시학원에서 남편 정동건씨(49·사업)를 만나 85년에 결혼했다. 그는 한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를 하던 때였고, 남편은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가족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때를 놓치고 뒤늦게 대입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한동안 책을 놓은 탓에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왠지 모르게 정이 갔다고 한다. 그래서 특히 수학을 어려워하던 남편에게 핵심을 알기 쉽게 짚어주며 도움을 주었다고.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두사람은 85년 1월 결혼식을 올렸다. 한의대를 다니면서 결혼한 그는 86년 첫아이, 89년 둘째아이를 출산하느라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90년에야 한의대를 졸업했다. 남편 정씨는 그후에야 대학에 진학했고, 지금은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두 자녀가 아들인지, 딸인지 묻자 그는 단호하게 “밝히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
“딸이면 볼, 아들이면 스트라이크, 아들 낳고 딸 낳으면 1백점, 딸 낳고 아들 낳으면 1백20점 하는 식의 표현이 싫습니다. 아들 낳았다고 하면 ‘축하한다’고 하고, 딸 낳았다고 하면 ‘다음에 한번 더 수고하시지요’ 하거나 ‘살림밑천’ 운운하며 얼버무리는 것도 싫고요.”
그는 다만 자녀를 육체나 정신이 모두 건강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기에 이에 걸맞게 상식적인 어른이 되도록 키우고 있다고만 말했다.
“아이들 이름을 지을 때 시아버지께서 돌림자를 써야 한다고 하시기에 남편과 상의를 했어요. 정자와 난자가 만나 태어난 아이가 남편 성만 따르는 것도 부당한데 돌림자까지 써야 하냐고, 그럼 나는 (아이 낳는) 도구냐고 따졌더니 제 말을 듣고 바로 수긍하더군요.”
지난 연말 호주제 폐지를 담은 민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지만, 아직 국회 통과라는 관문이 남아 있는 상태라 그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고은광순씨. 환한 거리로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여성동아 2004년 2월 4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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