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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오랜만의 외출

춘사영화제에서 공로상 받으며 눈시울 붉힌 김대중 전 대통령 요즘 생활

■ 글·조득진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2004. 01. 09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가 오랜만에 나들이에 나섰다. 제11회 춘사영화제에 공로상 수상자로 무대에 오른 것. 건강 이상설이 나돌고 있지만 이날 그는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주최측의 감사 인사말을 들으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던 그는 특유의 유머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다.

춘사영화제에서 공로상 받으며 눈시울 붉힌 김대중 전 대통령 요즘 생활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 최근의 건강 이상설을 잠재우듯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지난 12월15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제11회 춘사 나운규 영화예술제’가 열렸다. 이날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은 사람은 여우주연상을 받은 문소리도,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도 아니었다. 주인공은 바로 공로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
행사 중반 김 전 대통령 부부가 입장하자 시상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기립박수로 이들을 맞았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김대중 전 대통령(77)은 최근 떠도는 ‘건강 이상설’과는 달리 얼굴에 화색이 도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함께 입장한 이희호 여사(81) 또한 다소 야윈 듯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이날 주최측은 김 전 대통령을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재임기간 중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를 지켰고, 영화진흥기금 1천5백억원을 조성하는 등 한국영화계를 전폭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올해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50%가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정부 당시 만들어놓은 각종 지원책 덕분이라는 것.
공로상 시상에 앞서 신우철 영화인협회 이사장은 “우리 시대에 ‘선생’이라 호칭할 분이 많지 않은데, 춘사 나운규 선생과 평생을 민주화에 바쳐오신 김대중 선생이 계시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어 임원식 영화감독협회 이사장도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우리 영화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국민의 정부가 정책적으로 영화산업의 인프라를 확충해 오늘날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하고 덧붙였다.
이때 객석 앞자리에 앉아 영화인들의 감사 인사를 듣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을 감추려는 듯 잠시 천장을 바라보기도. 이희호 여사는 두손을 다소곳이 마주 잡은 채 인사말을 듣고 있었다.
수상을 위해 이희호 여사와 나란히 무대에 오른 김 전 대통령은 영화인들의 찬사에 고무된 탓인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특유의 유머로 말문을 열었다.
춘사영화제에서 공로상 받으며 눈시울 붉힌 김대중 전 대통령 요즘 생활

영화제 참가자들과 함께. 이날 시상식에서 남녀주연상은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와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 남녀조연상은 ‘살인의 추억’의 박노식과 ‘광복절 특사’의 송윤아에게 돌아갔다. 올해의 대상은 영화 ‘살인의 추억’이 차지했다.


“이 공로상의 수상자는 저인데 왜 아내와 같이 무대에 올랐는가 궁금해하실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통령으로서 문화정책을 세우는 데는 아내의 압력이 상당히 작용했었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만 상 받고 집에 가면 제 처지가 곤란할 것 같아서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는 이 한마디 유머로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처음에 영화상을 준다는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주최측에서 다른 김대중에게 보낸다는 것이 제가 좀 유명하니까 저한테 잘못 온 것이 아닐까. 비록 공로상은 제가 받지만 우리 영화가 어려움을 이기고 여기까지 온 것은 다 영화인 여러분의 노고 덕분입니다. 저를 잊지 않고 이런 자리에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춘사영화제에서 공로상 받으며 눈시울 붉힌 김대중 전 대통령 요즘 생활

이날 김 전 대통령은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이었다. 박수를 치며 그를 맞이하는 관객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행사장을 나가는 길에도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대중 앞에는 오랜만에 서는 것이지만 최근 김 전 대통령의 행보가 바쁘다. 이날만 해도 행사에 앞서 오전에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동아시아포럼 창립총회의 개막식에 초청받아 연설을 했다. 그는 참석한 국내외 정치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때마침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기조연설을 마친 뒤 청와대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바꿔 “연설을 모두 듣는 게 예의”라며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을 끝까지 경청했다.
김 전대통령의 활동은 지난 11월3일 ‘김대중 도서관’ 개관부터 시작됐다. 아태재단을 연세대에 기증해 출범하게 된 ‘김대중 도서관’은 지상5층 지하3층 규모로, 그가 소장했던 1만6천5백여권의 장서, 외국 지도자들과 교환한 편지, 각종 사진, 대통령 재임시 일정, 회의내용을 적은 대학노트 26권 분량의 친필메모, 연설문과 정책자료집, 기념품과 훈장, 노벨상, 인권상 메달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 그의 정치역정을 기록한 2만7천여점의 사진도 있다. 그중 78년 그가 서울대병원 ‘감옥병실’에서 감시를 피해 밖으로 내보냈던 못으로 눌러쓴 친필메모,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당시 수감생활 동안 29통의 봉함엽서에 깨알같이 적어 가족들에게 보낸 ‘옥중 서신’ 원고 등이 화제에 올랐다.
지난 12월10일에는 퇴임 후 처음으로 재임 당시의 각료들과 외식을 하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수상 3주년을 기념해 김석수 전 총리가 주선한 이 자리에는 이한동 전 총리, 전윤철 감사원장, 김진표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했다. 포도주를 곁들인 만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도와 일했던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안부를 묻고 감사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활동 탓에 최근 그의 행보를 ‘정치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총선을 겨냥한 정치력 행사, 퇴임 후 아들들의 각종 비리 연루에 대한 명예회복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그것. 그러나 그의 측근들은 ‘그저 퇴임한 대통령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활동’으로 봐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공로상 수상 소감에 이어 “올해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50%에 이르렀는데 내년에는 80% 정도로 높아졌으면 좋겠다”며 “내년은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를 휩쓰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준비한 원고 없이 특유의 유머와 달변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은 퇴임 후에도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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