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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체험수기

가출·원조교제·매춘·낙태… 성매매 피해 청소년들이 눈물로 고백한 충격 실태

■ 정리·구미화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4.01.05 13:56:00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최근 성매매를 경험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체험수기를 공모해 그중 12편을 골라 ‘희망까지 잃을 순 없어요’라는 수기집을 발간했다. 방황 끝에 유흥업소에 몸을 맡기고, 어른들로부터 인권을 유린당한 청소년들의 처절한 체험이 담긴 수기를 발췌 공개한다.
가출·원조교제·매춘·낙태… 성매매 피해 청소년들이 눈물로 고백한 충격 실태

보육원이란 곳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 가정교육도 못 받고 자란 아이들의 집? 그곳은 나에게 감옥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비판적이었던 나. 사랑이 필요했기에 나의 사춘기는 시든 나뭇잎처럼 메말랐다. 14세, 꿈꾸기 시작하는 나이에 검은 그림자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사회가 말하는 문제아란 이름으로 나는 친구와 함께 무작정 가출을 했다.
느닷없이 우리에게 다가온 한 아저씨가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었다. 숙식제공에 용돈까지. 그 대가로 우리는 다방에 팔렸다. 집에 가겠다고 했지만 장부 속에 그동안 우리가 받은 친절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나는 TV 속에서 보았던 천박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매일 교복 대신 짙은 화장에 굽 높은 신발, 아찔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고, 한숨과 담배 한 모금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열두살 어린아이가 우리 아가씨들 중 막내였다. 가게 삼촌들은 막내를 가두고 옷을 벗기고 노리개처럼 음부의 음모를 밀고, 심한 욕설과 함께 찢어져 피가 나도록 막대를 쑤셔넣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걸리면 야구 방망이로 매를 맞고, 저수지에 끌려가 포크레인에 거꾸로 매달려 물속에 처박혔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마침내 친구가 티켓을 나간 것처럼 위장하고 경찰에 신고해 우리는 풀려났다. 난 서울에 있는 한 시설로 보내졌지만 서울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또 한번 가출을 했다.
가출을 한 뒤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러 남자를 만나고, 무질서한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심신이 지쳐갔다. 그러다 난 임신을 하고 말았다. 모든 게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어린 나이에 심한 병과 아이까지 가진 나를 모두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독한 약물치료로 아이는 결국 사산됐고, 병원을 퇴원한 후 난 쉼터로 보내졌다.
날 위해 수녀님께서 친엄마처럼 곰국을 끓여주셨다. 사랑이란 걸 몰랐던 나는 그 따뜻한 손길에 가족이 무엇인지 처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 같다. 매일 가위에 눌리고 불면증에 시달려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쉼터 가족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로 내 자신과의 지독한 싸움을 이겨내고 있다. 내년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닐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사가 되고 싶다. 나와 같은 상처에 가슴 아파하며 울고 있을 아이들에게 내 모든 사랑을 주고 싶다.
‘명품’에 눈이 멀어 유흥업소 노크, 도박 성형수술 강요당해 김정희(가명)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은 돈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자주 싸웠고, 폭력이 난무했다. 그래서 난 커서 꼭 돈을 많이 벌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러다 중학교 선배 언니를 만나면서 난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명품으로 치장을 한 언니가 내겐 크나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처음에 언니는 내게 자신에 대해 그리 많은 걸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제는 포장꾸러미를 열어도 되는지 갑자기 하나하나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술을 꼭 마실 필요는 없고 버리면 된다. 눈 딱 감고 마음먹으면 23만원이 네 손에 들어오고 한달이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언니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난 이미 명품과 화려한 옷차림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될 일에 손을 대고 말았다.

가출·원조교제·매춘·낙태… 성매매 피해 청소년들이 눈물로 고백한 충격 실태

취업을 할 수 없는 가출 청소년들 중 상당수가 원조교제 등의 형태로 성매매에 유입되고 있다.


마치 보스처럼 보이는 이와 마담이 있는 자리에서 2백만원을 받고 악마와 계약을 했다. 윤락업소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사장의 태도와 마담의 횡포에 나는 다른 두곳을 전전했고, 영업비 결근비 지각비 엠티비 숙소제공비란 명목으로 6백여만원의 빚을 졌다. 이것은 화류계에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연한 관행이었다. 치마의 길이도 제한당하고, 성형수술도 강요당하고, 도박도 배워야 하며 길거리에서 수치심을 무릅쓰고 호객행위를 해야 했다. 골프도 배워야 했다. 모든 옷과 화장품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최고급으로만 써야 했다. 업주의 인형이 되어가는 듯했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환경을 바꾸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남의 어려운 처지를 악용하는 비인간적인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화류계에서는 소개업자가 그렇다. 그들은 아가씨들 사이에 매니저 또는 삼촌이라 불리며 다방 주점 사창가까지 적게는 80만원에서 많게는 5백만원의 소개비를 챙기고 넘겼다. 때로는 빚을 탕감시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처럼 동거를 해 몇 달간 안심을 시킨 후 선불금을 받고 팔아 넘기기도 한다.
나 역시 소개업자를 통해 섬으로 보내졌다. 설상가상으로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채 여러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예전에 날 데리고 있던 업주가 내 처지가 딱하다며 자기네 업소로 데려갔는데 난 곧 임신중절 수술을 하고, 그 다음날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여성의 전화’에 도움 청해
그러던 어느날 사창가 밀집지역인 ○○○동 화재로 많은 꽃다운 아가씨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로 인해 검찰의 특별단속이 시작되고, 경찰들 또한 윤락행위 단속을 벌였다. 대한민국 화류계 치고 경찰과 연락망이 닿지 않는 곳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접대를 받으려고 와서는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며 당당하게 아가씨를 데리고 2차를 나가는 간 큰 경찰도 있었다. 대대적인 단속으로 처음 며칠은 영업을 쉬다가 업주들이 아이디어를 낸 게 손님을 먼저 모텔로 보낸 뒤에 아가씨를 들여보내는 방법이었다. 업주들은 또 아가씨들에게 손님의 이름과 주소를 외우게 해 애인인 척하도록 했다. 심지어 2차로 가까운 시외에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윤락업소 단속은 결국 힘없는 아가씨들을 더 힘들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나니 내게 남은 건 빚 2천4백만원. 화류계에서 빚 2천5백∼3천만원은 사창가로 넘겨지는 커트라인이다. 난 딱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갔던 아가씨들이 2∼3일, 길어야 한달만에 어김없이 잡혀왔던 터라 두려웠다. 식구들을 협박하고 보복할까봐 무섭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여성의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무조건 “도와주세요” 하며 눈물을 흘렸다. 여성의 전화 담당자가 만나자고 했지만 난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탈출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잡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 용기를 내어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님을 만난 난 서울의 쉼터에서 머물게 됐다.

가출·원조교제·매춘·낙태… 성매매 피해 청소년들이 눈물로 고백한 충격 실태

유흥업소에 충동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사창가로 팔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쉼터에서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새로운 삶을 계획했다. 그리고 화류계 생활을 하는 동안 쌓인 신용카드 빚을 갚기 위해 캐주얼 의류 매장에 취직을 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했지만 행복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두달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끝내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간호학원에 등록했다. 입학과 동시에 취직도 했다. 지금은 낮에는 병원에 근무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고 있다. “야!” “너!” 하는 호칭에서 “선생님”이란 존대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내 자신이 귀하게 생각됐다. 열심히 새생활을 한 지도 어느새 1년이 되었다. 아주 멀리, 아주 오래된 시간인 것처럼 과거를 망각하며 살아갈 만큼 지금 난 행복하다.



IMF로 집안 기울자 가출 동생과 원조교제 나서 김하나(가명)

나는 16세 때 가출을 했다. 단순히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에서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땐 그래도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IMF이후 남의 집에 얹혀살고, 빚만 쌓이고…. 집에 있는 하루하루가 너무 싫고 짜증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생한테 같이 집을 나가자고 할 수는 없어 혼자 가출했다. 정말 다신 엄마를 보지 않으려고 작정을 했다. 아무것도 없이 나와서 그 마음 하나만으로 살려고 했는데 힘들었다.
내가 집을 나오던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애들이랑 놀다가 술을 먹었는데 술에 취한 나를 그 남자애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강간을 했다. 친구 집에서 지내다 여름방학 때 한 오빠를 알게 됐고, 그 오빠랑 동거를 했다. 같이 살던 오빠가 개학을 하자 난 갈비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아르바이트였는데 2주 정도 하고 그만 뒀다. 그때 번 돈 12만원으로 난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갔고, 그 아이의 자취방에서 지내며 일자리를 구했는데 미성년자라 써주는 곳이 없었다.

성교육 받고 원조교제 충동 사라져 어려운 아이들 도우며 살고 싶어
오랜만에 동생을 만났는데 고생이 많아 보였다. 동생은 자기도 집을 나오고 싶다고 했다. 결국 동생도 집을 나와 같이 지내게 됐는데 정말 갈 곳이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춥고 힘들었다. 바로 그때 원조교제 생각이 났다. 할까 말까 정말 많이 망설이다 처음으로 하게 됐다. 나이 많은 아저씨랑 하려니까 무섭고… 그랬다….
그 아저씨는 내가 미성년자인 걸 알면서도 만났다. 처음엔 딴 생각하면서 참고해야지 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내가 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 마구 눈물이 났다. 그래도 동생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다.
미성년자는 일도 할 수 없고 해서 돈 없을 때 한두번 하다 보니 점점 그게 내 생활이 되었다. 나중엔 아무렇지 않게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아저씨가 동생이 마음에 든다며 꼭 동생이랑 해야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동생도 하게 됐다. 그렇게 번 돈으로 옷이나 필요한 것을 샀다.
원조교제를 한 지 5∼6개월쯤 됐을 때 여관에서 자다 경찰에 적발됐다. 엄마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라 친척집에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래서 쉼터에 가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원조교제도 중독인 것 같다. 안하려고 해도 하게 되고, 돈 없으면 또 하게 되고. 처음엔 싫고 무섭고 그랬지만 몇번 하다 보니 ‘돈이 없으면 힘드니까… 한두번 한 것도 아니고 이미 버린 몸’이라는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게 계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 속상하고 왜 그랬는지 후회스럽다. 누가 ‘걸레’ ‘창녀’ 이런 말만 해도 속상하고 눈물이 절로 나온다.

가출·원조교제·매춘·낙태… 성매매 피해 청소년들이 눈물로 고백한 충격 실태

청소년보호위원회에 따르면 가출 청소년 중 3만여명이 티켓다방에 있다고 한다.


내가 가장 가슴아픈 건 동생만은 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말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슴이 찢어질 만큼 속상하고, 영원히 가슴속에 죄책감이 남을 것 같다. 동생은 보호관찰소에, 나는 부녀보호소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검정고시 공부를 하며 지냈다. 기숙사에서 사람들이 자매가 원조교제를 했다고 욕하기도 했다.
기숙사에 있으면서 성문화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다니고 성교육도 몇달 받았다. 학교 다닐 때는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고, 있다 해도 재미없고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성문화센터에서 하는 건 이해도 잘되고 재미있었다. 상담선생님한테 힘든 걸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지금은 기숙사에서 나와 목사님의 도움으로 자취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돈이 없거나 힘들면 ‘원조교제를 딱 한번만 더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원조교제를 해서 망가졌던 모습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는다. 다행히 상담을 하고 성교육을 받으면서 원조교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졌다. 정말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젠 공부하고 기술을 배워 취업할 생각이다. 두달에 한번씩 보육원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는데 그곳 아이들이 생각보다 어렸다. 이제 열심히 배우고 꼭 자격증을 따서 취업해 그런 아이들을 돕고 싶다. 나도 지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여성동아 2004년 1월 4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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