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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아픔 딛고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남들은 일 때문에 이혼했냐고 묻지만 남편 마음만 돌릴 수 있었다면 모든 걸 포기했을것”

■ 정리·이승민 ■ 사진·황금가지 제공

입력 2003.12.10 16:04:00

우리에게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악수를 나누던 백인 여성으로 기억되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 그가 최근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서전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펴냈다.
결혼 23년만에 갑자기 날아든 남편의 이혼 통보, 39세에 공직생활을 시작해 55세에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이 되기까지의 성공스토리 등 올브라이트의 진솔한 인생고백.
이혼 아픔 딛고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1937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난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고국에 홀로 남은 아버지는 공산주의 체제가 된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49년에 마침내 온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55년 가을 나는 ‘웰즐리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당시 ‘웰즐리’에 들어간 젊은 여성들은 똑똑하고 충실한 아내가 되려는 한 부류와 남편의 부속물이 아닌 독립적인 개인으로 사회에 참여하길 원하는 여성계층, 이렇게 둘로 나뉘었다. 나는 언론계나 외교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빨리 완벽한 짝을 만나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두 가지 열망 사이에 커다란 모순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던 것이다.

미디어 그룹의 자손으로부터 만난 지 6주만에 청혼 받고 결혼에 골인
대학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망명객으로 미국 땅을 밟은 지 12년 만에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됐고, 내 인생에 기쁨과 아픔을 동시에 가져다준 ‘조 올브라이트’와의 교제도 시작되었다. 그때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나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지역 신문사인 ‘덴버 포스트’에서 업무 보조로 일을 하고 있었고, 윌리엄스 대학에 다니던 조는 자료조사를 위해 그곳에 자주 들렀다.
우리 둘은 만날 때마다 이야기거리가 바닥나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서로 가족들에 대해 알게 됐는데 체코에서 망명한 우리 가족 못지않게 조의 집안도 평범하지 않았다. 조의 외고조 할아버지는 ‘시카고 트리뷴’을 만든 사람이고, 외할아버지는 ‘뉴욕 데일리 뉴스’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의 숙모는 ‘워싱턴 타임스-헤럴드’의 소유주였다. 조는 미국 굴지의 미디어 그룹인 ‘콕스 가문’의 상속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교제를 시작한 지 6주 만에 조는 내게 청혼을 했다. 우리가 서로 잘 모르는 게 많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사랑에 눈이 먼 내 눈에 조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왕자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59년 6월 졸업을 하고, 사흘 후 우린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미국인 왕자’가 내민 유리 구두에 발을 넣었고, 그 유리 구두는 내 발에 꼭 맞았던 것이다. 동화에서 보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두 사람은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그러나 나의 인생에서 그것은 단지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결혼하고 조는 신문사인 ‘시카고 선 타임스’에서 일을 했고, 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만드는 회사에서 사진 편집자의 조수로 근무했다. 그 당시만 해도 부부가 한 신문사에서 일을 할 수 없었고, 다른 신문사에서 일을 하는 것도 남편의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혼 아픔 딛고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이혼 후 올브라이트는 클린턴 행정부의 유엔 대사와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61년 봄, 나는 임신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초음파 검사란 것이 없어 임신 6개월째가 되어서야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쌍둥이 딸은 예정일보다 6주나 빨리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우리는 그 아이들이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아기들은 투사처럼 살아나 첫째는 앤 코르벨 올브라이트, 둘째는 앨리스 패터슨 올브라이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내가 집에 돌아오고 6주가 지나서야 아이들도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렇게 해서 처방전, 기저귀, 딸랑이, 트림, 목욕시키기 등으로 설명되는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한편으론 나와같은 처지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쌍둥이들이 두살 되던 해에 나는 아이들을 유모에게 맡기고 존스 홉킨스 대학의 국제관계 연구 고급 과정을 시작했다. 언론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희망은 포기했지만 대학교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젊은 엄마들은 내게 종종 아이들을 가정부에게 맡긴 기분이 어떤지 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집에 있는 엄마들’과 ‘집에 있지 않은 엄마들’ 사이의 이분법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나는 컬럼비아 대학의 러시아연구소에서 수료증을 따고 싶은 욕심에 일주일에 사흘씩 차를 몰고 학교에 갔고, 나머지 시간은 아내로, 엄마로, 때로는 웃자란 정원을 돌보는 사람으로 지냈다. 컬럼비아에서의 공부가 힘에 부쳐 종종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든 길을 택했나’ 고민하기도 했지만 소련을 연구하기에는 그때만큼 좋은 시기가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혼 아픔 딛고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쌍둥이들이 네살 반 되던 해 나는 셋째를 임신했다. 임신 6개월 무렵 몸이 집채만큼 불어나 또 쌍둥이가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대신 양수가 아기의 두개골을 압박하는 ‘양수 과다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고민 끝에 의사에게 임신 중절을 자문했으나 의사는 법적으로 옳지 않을 뿐더러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말했다. 출산까지 남은 몇달 동안 나는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진통이 왔을 때 의사들은 아기를 사산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나는 산통을 견디지 못해 실신하고 말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아기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다행히 나는 곧 다시 임신을 했고, 넷째여야 할 셋째딸 케이티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다시 학교에 복학을 했다. 학업을 계속하고 논문을 쓰는 동안 나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욕구와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했다. 그때 조가 “당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68년, 마침내 나는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 러시아연구소에서 인증서를 받았다. 어떤 특정한 길을 마음에 둔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만은 간절했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내세울 만한 경력이 필요했고,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나를 도와주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박사 과정을 이수하면서 경력과 인맥을 만들기 위해 기회가 오는 대로 잡았다.
나는 열성적인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조그만 학교를 위해 기금을 모아 뉴스레터를 만드는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당시 메인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에드먼드 머스키’의 대통령 선거운동본부에 들어갔다. 결국 선거에서는 졌지만 내가 진행했던 기금 모금 만찬이 성황을 이루자 여기저기서 나를 필요로 했고, 마침내 머스키의 수석 입법 보좌관 자리에 앉게 됐다. 그때 내 나이 서른아홉, 그로부터 15년 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근무했던 이래 처음으로 보수를 받는 제대로 된 일자리에 안착한 것이었다.

이혼 아픔 딛고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머스키 상원의원의 수석 보좌관으로 일하던 어느 날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전에 나를 가르쳐주었던 브레진스키 교수님의 전화였다. 그는 내게 “백악관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로 인해 나는 백악관에 입성하게 됐다.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위해 의회와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내 업무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직원들과 함께 외교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해 의회에 제시하고, 행정부의 입법 전략을 조정하고, 의원들과 함께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 들어가고, 상원에서 보낸 질의에 답변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하고 있소”결혼 23년만에 불현듯 이혼 통보한 남편
조는 훌륭했다. 나 대신 아이들의 숙제를 봐줬고 아이들과 함께 수시로 바뀌는 가정부가 차려주는 식사를 했다. 나는 매일 밤 저녁식사 때까지는 집에 가려고 애썼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때마다 조는 내게 아이들이 모두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말해 주면서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23년째로 접어든 어느 날 조는 나에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끝났소. 나는 당신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하고 있소.”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행복했노라고 말했다.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놓쳐버린 징조는 없었는지 돌이켜보려 애썼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동안 늦게까지 밖에 있기는 했지만 그건 이미 1년도 넘게 계속된 일이었다. 나는 그가 어쩌다 한번 해보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어서 오늘 한 모든 말을 내일 다시 주워담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조는 그날 오후 늦게 떠나고 말았다. 그 다음 몇달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 조가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에 아이들 역시 아빠가 집에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으므로 딸들에게 더 이상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세 딸을 거실에 불러모았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몇 년 동안 자신이 불행했으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떠난다는 말을 했다. 나는 차마 딸들을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저 멍하니 있었지만 눈물이 아이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혼 수속은 83년 1월에 결판이 났다. 나는 마흔다섯살이었고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조와 함께했다. 나는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다. 진실로 친절하고 사려 깊고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주었던 조.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조는 그냥 그렇게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정리의 조건으로 나는 조지타운의 집과 농장을 갖게 되었다. 재정적으로는 불평의 소지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었다.
궁극적으로 나는 두 군데 피난처를 찾았는데 하나는 교수직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참여였다. 대선 출마를 계획하고 있던 ‘월터 먼데일’은 내게 선거운동본부의 부본부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조지타운 대학에서 강의를 할 기회도 생겼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변화는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학생들이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동시에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물으면 결혼생활에 성공하지 못한 나로서는 자신이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이혼 아픔 딛고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올브라이트의 행복한 시절. 조와의 결혼식, 딸의 결혼식.


이혼을 한 사람들은 다 그렇겠지만 나는 새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아야 했다. 스무살 이후로 다른 남자를 남자로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나는 조가 남기고 간 빈자리를 채우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다. 먼데일의 선거운동을 하면서 조지타운의 법학 교수인 배리 카터를 만났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고 무척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마침내는 그가 우리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2년 뒤 배리와 나는 좋게 헤어졌다. 그는 자기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

“국무장관이 되어주십시오” 대통령이 꺼낸 첫마디
나는 항상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분통이 터진다. 일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그것은 모욕이다. 그 말에는 내가 이기적이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오늘날까지도 내가 느끼는 방식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장관이 되었을 때 나는 결혼생활을 계속했더라면 그렇게까지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이혼을 당한 것이 너무나 서글프다. 그때, 만약 조의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면 나는 일에 대한 모든 생각을 포기했으리라.
나는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전에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누구와 말을 하지 않고도 토요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수습하는 동안 공산주의 세계는 붕괴되고 있었다. 탐구하고 배울 새로운 것이 정말로 많았다. 나는 때가 오면 다음 디딤돌로 펄쩍 뛸 준비를 하고 싶었다.
이혼 아픔 딛고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체코에서 보낸 어린 시절.


개인적으로 순탄치는 않았지만 나는 76년 첫 직업을 가진 이래로 많은 것을 터득했다. 중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옛 소련을 여행하면서 공직자들과 시민들을 만났고, 중국,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열리는 회의에도 참석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사를 쓰고, 텔레비전에 나와 연설을 하고 의회에서 증언을 했다. 나는 민주당의 진보적 두뇌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외교 정책 토론에 참여했다.
92년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섰을 때 나는 유엔 대사로 임명되었다. 역사의 전환기에 유엔에 입성한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세계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곧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키는 일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었고, 나는 미국을 대표하여 유엔 평화 유지 활동에서 미국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나는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발칸 반도에 유엔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는 데 앞장섰지만,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미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적잖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97년 클린턴 대통령은 2기 내각을 구성하면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국무장관이 되어주십시오.” 이것이 대통령이 꺼낸 첫마디였다. 다음날 나는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인 백악관으로 향했다. 기차가 뉴저지의 평원을 지나 뉴욕 하버를 통과하여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50년 전 하버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열한살이었던 프라하 출신의 어린 소녀는 자유의 여신상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그 소녀가 이제 미국의 제64대 국무장관이자 미국 역사상 최고위직에 오른 여성이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이 글은 최근 출간된 ‘매들린 올브라이트’(황금가지)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여성동아 2003년 12월 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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