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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에 언론사 CEO된 ‘7막7장’ 저자 홍정욱이 직접 털어놓은 ‘7막7장 그후’

“하버드 졸업 후 좌절도 겪었지만 나의 도전 의욕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 정리·최호열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헤럴드경제 제공

입력 2003.12.10 14:51:00

93년 하버드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출간한 자서전 ‘7막7장’이 밀리언셀러를 기록, 우리나라에 조기유학 붐을 일으켰던 홍정욱.
최고의 학벌과 수려한 외모로 ‘홍정욱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가 최근 신문사 CEO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더해 증보판 ‘7막7장 그리고 그후’를 펴냈다. 그가 직접 털어놓은 ‘나의 꿈, 사랑, 좌절, 성공기’.
33세에 언론사 CEO된 ‘7막7장’ 저자 홍정욱이 직접 털어놓은 ‘7막7장 그후’

‘7막7장’을 펴낸 게 93년.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나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버드 졸업 후 나는 예정대로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이어 중국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확고한 믿음에서였다. 나는 다각적으로 중국을 이해하고 싶었고, 체험을 통해 중국인의 삶을 느껴보고 싶었다.
학력에 대한 자존심과 긍지가 강했던 내게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북경대 이외의 선택은 없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 대학원의 정식 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입시 관문을 거쳐야 했다. 내 중국어 실력은 초보에 불과했으나, 이미 영어정복에 도전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배우고, 연습하고, 그래도 힘들면 통째로 외워버리면 그만이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3개월간 입시준비를 했고, 4명의 합격자들 속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특히 북경대학에서의 생활은 내 예상에서 크게 빗나갔다. 한국 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유학생들은 중국 학생들로부터 격리된 채 유학생 기숙사에 ‘수용’되어 있었다. 자국의 유학생들끼리 자주 어울리는 일은 언어학습과 현지 적응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믿음이 확고했던 내게 그런 생활 환경은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한국 유학생들과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데서 오는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미국에서 지극히 사생활을 보호받았던 나로서는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작은 유학생 사회 속에서 낱낱이 공개될 수밖에 없는 생활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첨단의 전문지식을 익혀야 한다는 조바심이었다. 하버드의 동창들이 경영, 금융, 혹은 법률 등에 진로를 정해놓고 경력 쌓기에 매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빛바랜 중국의 사회과학 문서를 독해하고 있던 나의 불안감은 점점 깊어져갔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란 항상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에 어떤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느냐에 따라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이 달라질 것이라는 명제는 내게 일종의 공포감마저 느끼게 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제어하기 힘든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 트랙에 오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북경대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더 보낸다는 게 내 젊음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1년 남은 석사과정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되돌아가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로 결심했다. 법률에 관한 지식, 그리고 변호사 자격증은 내가 장래에 어떤 진로를 선택하든 유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성급하고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실용적인 학문, 특히 금융과 법에 관한 지식을 익히겠다는 판단은 옳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학위는 끝마쳤어야 했다. 그리고 중국을 이해하고 중국어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더 치열한 노력을 했어야 했다.

33세에 언론사 CEO된 ‘7막7장’ 저자 홍정욱이 직접 털어놓은 ‘7막7장 그후’

세곳의 미국 법과대학원에 원서를 낸 나는 95년 봄,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서울에서 경력을 쌓고 싶어서였다.
정치와 경제 등 실용적인 학문과 경험에 몰두하면서도 인류 역사 발전의 2중대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언젠가는 예술에 종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내게 뜻하지 않은 시간과 자금이 주어졌다. 나는 예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를 사업과 접목시키려는 위험한 외도를 하게 되었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국내 최초로 재즈연주자들을 초빙하여 공연하는 재즈클럽 ‘카멜롯서울’을 세운 것이다.
뒤처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경영의 발상이 앞서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재즈클럽이 생소했던 많은 이들이 큰 자본을 투자해 유치한 연주자들의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정식공연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장료 지불을 꺼렸다. 또한 재즈를 라운지 음악으로 여겨온 다수의 관객들은 공연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먹고 마시며 떠들어댔다. 관객의 무례함을 참다못한 연주자들이 공연을 중도에 포기했다. 그 사이 자본은 점점 바닥났고, 급기야 헐값에 매각하기에 이르렀다. 창업과 경영에 대한 경험 치고는 너무도 무책임했으며 지나치게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북경대와 ‘카멜롯서울’에서의 불완전한 경험을 뒤로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는 내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안 그래도 급한 삶의 여정에 2년여의 시간이 구체적인 결실 없이 흘러가버렸던 것이다. 나의 오만과 무지가, 오늘의 부족한 내 모습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었다. 그러나 그 분노와 자괴감 속에서 엄청난 기운이 꿈틀거렸다.
95년 가을, 나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법과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뉴욕과 런던, 홍콩 등지의 많은 법률사무소로부터 입사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분야는 투자금융이었다. 기업 인수합병의 먹이사슬을 알고 싶은 게 그 중요한 이유였다. 인수합병의 총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기 위해서는 M&A 뱅커가 되어야 했다.
명문 로스쿨에서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M&A 뱅커의 길이 자동적으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법률뿐 아니라 회계 및 분석의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는 M&A 뱅커가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2년제 경영학 석사(MBA)가 더욱 유리했다. 특히 법대생은 숫자에 약하다는 통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금융, 회계, 증권 등 재무분야를 섭렵해야 했으며, 다방면의 준비를 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졸업과 동시에 다국적 투자금융기업인 리만브라더스의 인수합병그룹에 입사할 수 있었다.
신참 M&A 뱅커의 일상은 고달픈 것이었다. 하루에 12∼15시간씩 근무하는 것은 보통이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6개월이 넘는 동안 하루도 휴일을 가져보지 못한 적도 있으며, 수시로 출장을 다녀야 했다. 투자금융전문가들이 큰돈을 축적하는 이유는 연봉이 높아서가 아니라 돈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동료의 한탄이 농담으로만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리만브라더스에서의 경험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무엇보다 인수합병의 과정 속에서 왜 어떤 기업은 팔려야만 하고 어떤 기업은 팽창해야 하는지에 대해, 즉 기업의 흥망성쇠에 관해 끊임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리만브라더스에서 퇴사한 후 2년간 스트럭시콘이란 벤처기업을 세워 창업주이자 재무담당이사로서 경험을 쌓았다. 캘리포니아의 뉴포트비치에서 매출 없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1백40억원이 넘는 자금을 유치했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돈을 모으기도 하고 잃기도 하면서 투자와 경영을 배웠다. 사원으로서의 고충과 오너로서의 고뇌를 경험할 기회도 가졌으며,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서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33세에 언론사 CEO된 ‘7막7장’ 저자 홍정욱이 직접 털어놓은 ‘7막7장 그후’

어린시절 그를 감동시킨 케네디 대통령 초상 앞에서 찍은 사진.

나의 도전에 대한 의욕은 후천적으로 길러졌다. 안락하고 평범한 삶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 역시 환경과 교육이 준 선물이다. 도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쉽게도 결혼과 더불어 안정적인 삶의 추구로 방향을 선회하는 경우를 자주 봐왔다. 반면 나는 결혼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리스크(위험)를 택할 수 있는 정신적인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흔들리지 않는 가정은 나로 하여금 도전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지와 어떤 실패와 좌절이 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다.
손정희(29). 나는 아직 내 아내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다. 95년 6월, 친지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카멜롯서울’에 들어선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저 사람이 바로 내 아내’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4년 후인 99년 1월 서울의 한 교회에서 아내와 결혼했다.

첫 눈에 반한 아내와 가정 이루고 2001년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물한살이었다. 아내와 첫 데이트에서 나는 평생 처음 바람을 맞았다. 만나자는 강요에 못 이겨 나가겠다고 했으나 너무 알려진, ‘소란스러운’ 사람이라 부담스러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내의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기에 후일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영원히 평행선을 그으며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아내는 뉴욕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며, 나는 대륙의 반대쪽에 있는 스탠퍼드대학에 재학중이었다. 나는 뉴욕을 옆집 드나들 듯 왕래하며 아내와 시간을 만들었다. 스탠퍼드에 있을 때는 아내가 보고 싶어서, 뉴욕에 머물 때에는 학업이 걱정되어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일생 한번뿐이라고 믿었던 사랑을 나눌 사람을 찾았다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내를 만난 후 반년 가량이 지난 어느 늦가을 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여행 온 아내를 데리고 스탠퍼드대학 내의 작은 교회로 향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아내에게 청혼을 했다. 그리고 작은 상점에서 구입한 반지를 건네주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반지였지만 사랑도 결혼도 일생에 한번뿐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중요한 약속의 표시였다. 아내는 내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를 위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결혼은 많은 약속을 전제로 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두 가지 색다른 약속을 했다. 첫째는 절대 아내를 아침에 깨우지 않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가정이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침잠이 많다. 두가지 약속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나는 내 아이들이 도전적인 삶을 선택하기를 원한다. 반면 아내는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추구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는 아직까지 ‘행복한 삶’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설정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해나가다 보면 행복은 성취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굳이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는가? 진취적이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작은 삶의 모습으로 생각이 되는 건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인가? 아내는 그런 나를 여지없이 나무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계획을 만들어주고 몰아세우기보다는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교육에 치중하자고 나를 설득한다. 항상 옳은 말만 하는 아내가 부러울 때도 있다. 내가 어리석은 것인지….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한국의 국적을 유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세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요즘, 미국에서 살고 싶으면 미국 국적을, 한국에서 살고 싶으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대한민국 이외의 국적을 가져본 적이 없다.



33세에 언론사 CEO된 ‘7막7장’ 저자 홍정욱이 직접 털어놓은 ‘7막7장 그후’

손정희씨와의 결혼식 사진. 홍정욱 대표는 아직 아내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원정출산이란 기이한 현상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내 딸 지승이는 미국의 뉴포트비치에서 근무할 때 태어났기 때문에 현재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성인이 되면 아마도 국적 선택문제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한국 국적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고 한국인으로서 혜택을 영위하면서 미국 국적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면 그것만큼은 아버지로서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영주권을 소지함으로써 병역 면제를 받았던 내가 영주권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한 까닭은 이제 귀국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서다. 2001년 9월 아내, 딸 지승이와 함께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더는 한국을 떠나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방인의 삶을 청산하고 싶었다. 2001년 12월 입대해 4주간의 훈련을 마친 후 용산초등학교에서 6개월간 전산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면서 법이 정한 병역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제 ‘경험의 길’ 끝마치고 ‘검증의 길’로 들어서
나에게는 반드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언론사 경영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002년 8월, 나는 오랫동안 대주주를 찾고 있던 (주)헤럴드미디어를 인수하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87년 여름, 서울에 온 나는 당시 국내 정상의 영어신문인 ‘코리아헤럴드’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가졌다. 결국 ‘코리아헤럴드’는 나와 언론과의 애증관계의 출발점이었던 동시에 15년 후 힘들게 도달한 내 결정의 씨앗이기도 했던 것이다.
서른세살의 젊은이가 2개의 전국지를 보유한 50년 전통의 언론기업을 인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론사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가 언론사를 인수하려 한다는 사실은 나를 아는, 그리고 아끼는 모든 이들에게 무모한 시도로 보였을 것이다.
2002년 12월4일, 나는 극적으로 헤럴드미디어의 인수에 성공했다. (주)신동방이 소유하고 있던 50%의 지분을 일괄 인수함으로써 대주주가 된 것이다. 그동안 배웠던 투자 및 금융 기법은 모두 내던져버리고 가족의 투자와 대출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으로 인수자금을 마련했다. 모든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자금력 때문이 아니었다. 나와 헤럴드미디어의 미래를 믿고 도와준 가족과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헤럴드미디어의 인수와 함께 조용히 유지되어온 내 삶은 다시 여론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 젊은이의 중앙언론사 인수라는 초유의 사건, 이에 대해 나는 그 동기와 배경을 낱낱이 밝혀야 했다. 더욱이 내 인수 취지에 대해 ‘재매각을 통한 수익창출’ 그리고 ‘정계진출을 위한 교두보’라는 근거 없는 풍문이 기정사실처럼 되면서 나는 불필요한 해명을 하느라 분주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의 가족과 회사, 아직 그들을 책임지지 못하면서 사회와 국가에 대한 꿈을 저울질할 수 없다. 가정과 회사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한 후 새로운 목표를 세우려 한다.
서른하고도 셋. 나는 ‘경험의 길’을 끝마치고 ‘검증의 길’로 들어섰다. 어떤 실수나 실패도 경험이라는 편리한 틀 속에서 미화할 수 있는 권리를 나는 남보다 일찍 포기했다. 이제 나의 실패는 많은 사람들을 더불어 불행하게 만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결과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내 역량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홀로서기에는 내 그릇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으며, 오만과 자신감의 차이를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

여성동아 2003년 12월 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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