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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애끓는 모정

불의의 교통사고로 외아들 잃은 중견 탤런트 박원숙

“내가 일생 동안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아들뿐이었는데···”

■ 글·이영래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3. 12. 03

지난 11월3일, 탤런트 박원숙이 외아들을 잃었다. 언덕에 주차돼 있던 생수 배달차가 굴러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나서던 박원숙의 외아들 서범구씨를 덮친것. 아들을 먼저 보내고 피눈물을 쏟다 눈물마저 말라 망연자실한 박원숙의 안타까운 사연. ※ 삼가 고 서범구씨의 명복을 빕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외아들 잃은 중견 탤런트 박원숙

남세스러운 짓을 하다 속내를 들키면 천연덕스럽게 웃음으로 무마하는, 푼수끼어린 말투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다 말문이 막히면 후다닥 도망가버리는, 얌체스러우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우리네 서민 여인. 탤런트 박원숙(54)은 우리가 매일매일 시장 골목에서 마주치는 그런 ‘아줌마’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 정감 있게 연기해왔다.
삿대질을 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모습에서도 그에겐 눈살 찌푸려지는 독소(毒素)가 느껴지지 않는다.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이념보다 나와 우리 가족이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누가 보기에 아무리 비루해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 삶이란 시장 골목의 낡은 비닐 처마 아래서 1백원을 갖고 설왕설래 끝에 끼니거리를 장만하는 것임을 그는 연기로 새삼 일깨워줬다.
내 옆의 피붙이같이 항상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던 탤런트 박원숙이 천금 같은 외아들을 잃고 피눈물을 쏟았다. 젊은 며느리와 다섯살된 손녀딸만 남기고 아들이 어이없는 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지난 11월3일 낮 12시경. TV 외주 프로덕션 ‘Mcity 프로덕션’의 PD이자 탤런트 박원숙의 외아들인 서범구씨(34)는 동료 2명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서울 강서구 염창동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경사진 골목길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지 않고 주차돼 있던 생수배달 트럭이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는 채 피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
박원숙은 이날 SBS 일일드라마 ‘흥부네 박터졌네’의 야외 촬영장인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서 외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촬영을 중단하고 아들 서씨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 양천구 목동 이대목동병원에 도착한 건 사고가 발생한 지 3시간여가 지난 오후 3시경. 박원숙은 의자에 주저앉아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박원숙은 두권의 고백 수기를 낸 바 있다. 두번의 이혼과 전 남편이 남긴 엄청난 채무에 시달려야 했던 과거를 털어놓은 그의 책 에필로그에서 그는 ‘과거를 하늘높이 쏘아올려 구름이 낄 때마다 감미로운 비를 내리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또 한번 울리고 말았다.

두번의 이혼, 전 남편이 떠넘긴 빚으로 고생하면서도 아들 하나 보고 살아와
그는 지난해까지 전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방송국 출연료까지 차압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렇듯 기구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가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서범구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첫 책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의 서두를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 책을 쓰기 전에 가장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 아들 범구였다. 어릴 때부터 나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가장 컸던 아이이기 때문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외아들 잃은 중견 탤런트 박원숙

탤런트 임현식, 영화감독 이장호, 성우 양지운, 그리고 변우민, 이병헌, 송혜교 등 선·후배 연기자들이 빈소를 찾았다. 오랜기간 같이 호흡을 맞춰온 임현식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가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써. 콩가루 집안인 거 다 드러난 마당에 더 이상의 데미지가 있겠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하는 아들 앞에서 나는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나는 과연 좋은 엄마였던가, 그리고 괜찮은 인간이었던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외아들 잃은 중견 탤런트 박원숙

고 서범구씨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 TV 외주 프로덕션 PD로 근무해 왔다. 고인은 부인과 다섯살된 딸을 두었다.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못해준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한 것이나, 범구씨는 한 인터뷰를 통해 “자기 영역을 뚜렷이 가지고 있는 엄마를 두고 있어 아주 뿌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 두 사람의 관계는 보통의 모자지간 이상이었다. 박원숙은 “내가 일생 동안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아들 범구 하나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 “만약 스무살 그 철없을 때 범구를 낳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세상을 어떻게 혼자 살아왔을까?” 하고 혼자말처럼 말하기도 했다.
그런 아들을 잃었으니 그의 심정이 오죽할까? 빈소에서 그는 더는 울지 않았다. 텅빈 시선으로 넋을 놓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11월5일, 화장을 하기 위해 아들의 관이 운구될 때 그는 마지막으로 오열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장례가 모두 끝날 때까지 벽제 승화원 바깥에 앉아 넋을 놓고 있었다.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자식은 불효자라 하여 부모의 비석에도 이름을 새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장례를 끝까지 같이 할 수도 없는 그는 그렇게 화장터 바깥에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아들의 장례를 치른 지 닷새 뒤인 11월 10일, 당연히 촬영에 빠지리라 예상했던 박원숙이 SBS 일일드라마 ‘흥부네 박터졌네’의 야외 촬영장에 나타났다. 드라마 성격상 코믹 연기를 해야 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 소화했다. 그리고 11월12일 KBS 주말드라마 ‘진주목걸이’의 녹화도 해냈다. 이날 박원숙의 대사에는 “자식은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못 잊어요.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죠”라는 대사가 있었다. 제작진은 이 대사를 삭제하려 했으나 박원숙은 이런 배려를 고사하고 자발적으로 이 대사를 했다. 진정한 연기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이었다.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 그는 “자식을 잃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하는 말로 참담한 심경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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