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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간장종지 인생이라도 좋다”

2003. 10. 08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주제 파악을 하게 된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 섹시해지거나 똑똑해지거나 성격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없다. 그러면서도 운세에서 행운을 예고하거나 해몽이 좋은 꿈을 꾸고 나면 내심 횡재수를 바라곤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만족할만한 행운이 찾아들지 않는 건 물론이다. 실망감에 허탈해하다가도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돼 엄청난 당첨금을 탄 주인공 중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한국을 떠난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진다.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 잠시 갈채를 받는 것보다 남의 행운에 기꺼이 박수를 치며 불행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한 일이지 않은가.

“간장종지 인생이라도 좋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사람들은 주제 파악을 하고 분수를 알게 된다. 이 나이에 가수 ‘이효리’처럼 섹시하지 않다고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고, ‘힐러리 클린턴’처럼 똑똑하고 카리스마가 있지 않은 것을 비관하지도 않는다. 느닷없이 친부모라는 이가 나타나 막대한 유산을 주겠다고 할 리 만무하다는 것도 잘 안다. 내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키가 더 자랄 리도 없고, 이제 와서 노력한다고 성격이 바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서 조금씩 철이 드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주제파악을 하다 보면 ‘도대체 내가 얼마만한 크기의 인물이며 내 팔자를 점수로 따진다면 몇점짜리일까’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왜 똑같은 밥 먹고 같은 공기 마시는데, 누구는 단칸 월셋방에 살며 끼니를 걱정하고 또 누구는 수십억원짜리 빌라에 살며 골프와 헬스로 세월을 보내는가 말이다. 정해진 운명이니, 팔자려니 하고 포기해야 할까.
얼마전 꿈을 꾸었다. 꿈에 ‘똥’을 봤다. 큰 불이나 물, 돼지나 똥 등을 보면 재수가 좋다고 꿈 해몽 책자에도 나와 있어서 깨어나자마자 흐뭇했다. ‘혹시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되는건가’ ‘거액의 CF 출연 제의가 들어오려나’ 하는 기대들로 종일 마음이 부풀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퇴근길에 땅에 뭔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5천원짜리와 1천원짜리 지폐가 꼬깃꼬깃하게 접힌 6천원이었다.

인생역전 ‘대박’의 꿈을 꾸다가 …

순간, 갈등이 생겼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양심의 갈등이 아니었다. 혹시 지난밤 꿈에서 본 똥이 겨우 이 정도의 돈을 주려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거부하고 싶은 마음과 더욱 커다란 기회를 기대하며 이것이라도 챙겨야 할까 하는 생각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한 것이다.
결국 ‘설마 모처럼 꾼 똥꿈인데 겨우 6천원에 행운이 끝날 리가 있나. 이걸 시작으로 커다란 돈이나 상품이 굴러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덥석 6천원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 꿈을 꾼 지 몇 개월이 흘렀건만, 대박은커녕 아무런 행운도 찾아들지 않았다. ‘세상에 남들은 그런 꿈꾸고 수십억원의 복권에 당첨되거나 경품으로 대형 승용차를 받거나 명예로운 상을 받기도 한다는데…’ 하는 허탈감에 ‘꿈의 말미에 개가 한 마리 지나갔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올해초 꽤 용하다는 역술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못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3월, 7월, 11월에 주목하세요. 행운이 깃든 달입니다. 그저 단순히 좋은 게 아니라 아주 길합니다.”
은근히 3월을 기다렸다. 물론 기쁜 일이 있었다. 부장으로 승진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승진이란 것이 그저 1학년을 보내면 2학년이 되듯 시간이 흐르면 자동적으로 되는 자동 승급이었기에 내게만 일어난 특별한 행운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와 같은 시기에 입사한 이들, 나와 같은 경력의 동료들이 줄줄이 승진을 했다. 신문사엔 워낙 여기자가 드물기 때문에 우리 신문사에서 20여년 만에 등장(?)한 여자부장이긴 하지만 정기 승진을 행운이라고 봐야 할까.

“간장종지 인생이라도 좋다”

7월이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전화가 왔다. KBS 1라디오 프로듀서였다. 아주 점잖고 상냥한 목소리의 그는 “박찬숙씨가 진행하던 낮 프로 중 일요일 프로그램을 맡아주실 수 있나요?” 하고 물었다. 이럭저럭 방송에 얼굴과 목소리를 내비친 지 10년이 가까워 오는데 드디어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내 이름을 걸고 내가 주인인 프로그램을 맡게 된 것이다. 그것도 국영방송에서 말이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신난다고 내색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마냥 흐뭇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같은 시간대의 평일 프로그램, 즉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진행하며 나보다 6배의 출연료를 받아가는 이는 얼마나 더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보다 한살 어린 정옥임이란 여성이다. 물론 나처럼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유인이고, 북한 핵문제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전문가이긴 하지만 그보다 그 사람의 7월 운세가 나보다 훨씬 좋았던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이 대접이 되려고 한다면 간장은 어디에 담고, 맛있는 파전은 어디에 찍어 먹을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치 남들이 값비싼 스테이크를 먹을 때 나는 라면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다른 이들은 규격 자체가 단단하고 커다란 대접인데 나는 간장종지인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이 내게 말을 걸었다.
“간장종지면 어떠니? 다 용도가 있는 거란다. 커다란 대접이나 고려청자도 충격을 받으면 깨지기는 마찬가지고, 대접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간장을 담을 수는 없잖아? 간장은 간장종지에 담겨야 제 맛이지. 모든 사람이 국이나 찌개 그릇 노릇을 하려 한다면 간장은 어디에 담고, 맛있는 파전은 어디에 찍어 먹을래? 그리고 왜 그렇게 감사할 줄 모르니? 도대체 얼마나 큰 행운이 와야 만족하겠니? 즐거운 비명도 몇초 이상 지르면 소음이 되잖아. 솔직히 능력에 비해 과대평가받고 있는 거고, 제대로 베푼 것 없이 얼마나 많이 덕을 입고 있니?”
사실 행운이 별건가. 몇년 전 대북 사업을 성사시키며 김정일과 악수를 나누던 정주영·정몽헌 부자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돼지 저금통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또 그 사이 지지율이 얼마나 떨어졌나. 또 로또 복권에 당첨돼 1백억원의 당첨금을 탄 주인공은 정작 다른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 최근에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한 연예인은 곳곳에서 ‘도와달라’ ‘당신 남편이 전에 꾼 돈을 갚아라’ 하며 달려드는 이들 때문에 경호원까지 둘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고 한다.
인생역전을 꿈꾸기보다, 완전히 다른 삶을 도모하기보다 현재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삶에 충실한 것이 낫다.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 잠시 갈채를 받는 것보다 남의 행운에 기꺼이 박수를 치며 불행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나를 평화롭고 건강하게 만든다. 그래도 다시 한번 기대를 해본다. 11월이 또 행운의 달이라는데 어떤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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