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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당당한 여자

‘아이 딸린 이혼녀’ 편견에 맞서 영어 전문가로 우뚝 선 이지연

■ 글·조득진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3.10.02 14:06:00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는 모습을 보면 부럽다가도 그 역시 가슴 아픈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최근 자전 에세이 ‘색色다른 여자 이지연의 남男다른 홀로서기’를 펴낸 이지연씨.
불행한 결혼의 아픔을 딛고 소문난 영어 전문가로 당당하게 서기까지의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 딸린 이혼녀’ 편견에 맞서 영어 전문가로 우뚝 선 이지연

“자신에게 100% 당당한 여자로 살고 싶어요”93년, 그 해 서른살이었던 그는 김포공항 로비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 이국땅으로 떠나는 차림이었지만 수중에 가진 돈은 1천만원. 그의 곁엔 일곱살 된 사내아이가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짐을 싸던 날, 어머니는 딸자식이 죽어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통곡을 하셨어요. 어린 손자와 딸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그리고 언제나 남이 가지 않는 길에 무작정 발부터 들이밀고 보는 당신 딸의 무모함이 원망스러우셨을 거예요.”
영어 전문가 이지연(39)의 삶은 그때 한번 변신을 겪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그는 신입생 시절,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까지 휴학하면서 강행한 이른 결혼. 그러나 시집과의 불화는 그에게 결혼생활을 유지할 의욕을 앗아갔고, 남편과 별거를 거듭하다가 6년만에 이혼했다. 이혼 후 ‘아이와 함께 잘 살아낼 것’이라고 모질게 마음먹었지만 결국 3년 만에 아이의 손을 잡고 ‘미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더군요. 가난한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남편은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었죠. 그러니 어린 나이에 아이까지 임신해서 들어온 며느리가 예뻐 보일 리 없었겠죠. 남편이 지방 발령을 받아 떠나고 나자 13평 좁은 아파트에서 시어머니와 결혼 안한 손위 시누이, 그리고 저와의 전쟁이 시작됐어요.”
하루도 쉬지 않고 다툼이 생겼다. 40대 중반의 시어머니는 철없는 며느리가 늘 불만이었고, 자유로웠던 친정의 분위기와는 달리 엄격하기 짝이 없는 시집 식구들을 바라보는 그는 또 나름대로 불만이 쌓여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처럼 시누이는 일찌감치 시어머니 입장에서 대변인 노릇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어머니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가 되는데, 그때는 저 또한 오로지 제 입장만을 생각했던 같아요. 게다가 주말마다 올라오는 남편마저 중재역할을 포기하면서 부부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갔어요.”
결국 그는 아이의 백일잔치를 치른 다음날 아이를 등에 업고 시집을 나왔다. 친정에서 아이를 키울 것이며, 다시 복학을 해 제 인생을 찾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뒤로 남편과 대여섯 차례 재결합을 했지만 그때마다 한계에 부딪치며 결별을 해야 했다. 결국 91년 ‘남편을 자유롭게 놓아주자’는 생각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혼 후 저에게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이혼 후의 현실, 어린 아이의 삶을 책임져야 하고 또 가장으로서나 호주로서의 여성에게 관대하지 않은 한국 사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살아간다는 것에 자신도 없었고요.”
다시금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이 새로운 삶의 첫번째 여행이었다면, 그 여행에 실패하고 다시 가는 여행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어 감각은 있었어요. 이혼 후에 기업과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영어교재 출판일을 하다 보니 미국 현지에서 공부할 필요성도 느꼈고요.”
몇해 동안의 직장생활은 그에게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혼녀’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냉대는 그에게 미국행을 서두르게 했다.

‘아이 딸린 이혼녀’ 편견에 맞서 영어 전문가로 우뚝 선 이지연

여린 외모와 달리 그가 밟아온 과정은 고통과 성취가 교차된 힘겨운 길이었다. 그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한다.


“미국행을 앞두고 심리적으로 혼란스러웠어요. 한국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지 못하고 도피하는 게 아닌가, 아이의 교육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그리고 당장 가서 먹고살 길은 있나…. 하지만 그 모든 고민들보다 ‘아무튼 이곳을 떠나자’는 충동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평범한 삶을 싫어하는 제 기질 탓도 있었죠.”
이후 여러 유학원을 돌아다니며 미국 유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비자를 받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등 바쁘게 뛰어다녔다. 서류 등 유학절차는 계획대로 진행되는데, 그러나 정작 미국에 가서 먹고 살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수중에 있는 돈이 1천만원이 전부라고 했더니 주변에선 “한 석달 정도는 버티겠네” 하며 걱정을 했다.
“그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대학 내내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서 다녔고, 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왔을 때 그것과 맞서 싸울 오기도 생겼거든요. 일단 학교는 정해졌으니 일자리만 구하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죠.”
그러나 미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고생길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적었고, 학교 근처의 집값은 가지고 간 1천만원을 금세 ‘잡아’먹었다. 하지만 그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배신’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한달 만에 전 남편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고, 한달에 1백만원씩 원고료를 보내주겠다던 출판사 동업자는 연락이 끊겼다. 게다가 초등학생 아이는 말이 통하지 않아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암담했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를 악물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전화교환원으로, 중국식당 웨이트리스로, 한인촌 아이들 과외선생으로 뛰어다녔죠. 열두 시간 동안 한번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잠을 줄이기 위해 침대가 아닌, 맨바닥에서 자다보니 몸살을 달고 다녔고, 그렇게 번 돈이 아까워 어쩌다 하는 외식도 99센트짜리 햄버거뿐이었죠.”
그러다 우연히 LA에 있는 한국 유학생 전문 학교의 영어강사 자리를 얻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유학생들을 상대로 개인과외를 하면서 조금 사정이 나아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영어 전문가로서의 길을 준비하는 계기도 되었다.
남가주대 대학원에서 영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고 나니 자신의 목표에 어느 정도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현지 유학생들 사이에서 뛰어난 강의 실력이 소문나면서 그는 LA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 영어 프로그램을 수년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던 98년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무언가 충동이 일기 시작했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이 딸린 이혼녀’ 편견에 맞서 영어 전문가로 우뚝 선 이지연

지난 10년 동안 너무도 변한 자신을 본다는 그. 하지만 늘 당당하게 도전했기에 지금의 모습에 만족한다고.


“일단 돌아와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어요. 경력도 어느 정도 쌓았고, 서울에 있는 어학원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어차피 미국에 올 때도 ‘맨땅에 헤딩’하기였는데 두려울 게 없었죠. 또 아이에게 조국의 의미도 안겨주어야 했고요.”
자전 에세이에는 담지 않았지만 다시 한국행을 결심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당시 그는 열애중이었다. 상대는 공부하다 만난 일본인으로 일본 내 유력 가문의 아들로 정치 지망생. 이혼한 한국여자와 결혼할 것이라며 집안에 ‘재산 포기 각서’까지 보낼 정도로 남자는 그에게 열중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지 2년 만에 그는 남자를 ‘놓아’주었다.
“일본에서 정치를 하려는 남자에게 저는 평생 안고 가야 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이 살아야 하고,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그때 그걸 깨달았어요. 함께 있어 부딪치는 것보다 차라리 그리워하며 행복해하자고 결심한 거죠.”
다시 사랑할 기회가 언젠가는 또 오겠지만 그는 이제 ‘결혼’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한다. 자신처럼 독립적인 여자가 한국적으로 살아온 남자랑 ‘사랑’은 할 수 있겠지만, ‘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6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뒤에 그는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외신과장, 영국 로이터 통신사의 월드컵 한국 팀장으로 활동했다. 또 SBS 라디오 ‘이숙영의 파워FM’에서 ‘영어 한마디’ 코너를 진행했고, 국내 유명 어학원에서 토플과 토익을 강의하며 ‘소문난 영어 전문가’로서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현재는 ‘이지연 영어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영어 교재 집필 및 강의를 병행중이다. 올해만 해도 ‘이지연의 Cool English - 나를 돋보이게 하는 세련된 영어’ ‘TOEIC 기초탈출 20days’ ‘이지연의 그리스 로마신화로 배우는 영어’ ‘Live Talk Nice Talk’ 등 영어 교재를 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1년 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우리 사회의 어떤 편견들 때문이었죠. 지나고 보니 다 아련한 추억 같군요. 무엇보다도 민감한 시기에 불평 없이 엄마를 따라준 우리 아들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우리 사회는 ‘이혼녀의 성공’에 대해 달갑지 않은 분위기다. 이혼을 죄악시하고 성공 뒤에 묻혀 있을 ‘지독함’ 때문. 그러나 이지연의 인생사를 듣고 있노라면 그것이 엄청난 편견임을 알 수 있다.

여성동아 2003년 10월 4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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