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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뜨거운 부정

산골에서 암투병하며 아이들에게 유언처럼 쓴 편지 책으로 엮은 소설가 이강천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3.08.29 16:22:00

아빠의 마음이 담긴 편지 묶음처럼 위대한 유산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소설가 이강천이 병마와 싸우며 자식들을 위해 유언처럼 써내려간 편지엔 아버지로서의 뜨거운 사랑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 있다.
산골에서 암투병하며 아이들에게 유언처럼 쓴 편지 책으로 엮은 소설가 이강천

99년 간암 선고를 받았던 이강천씨는 현재 몸이 회복돼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충청북도 괴산 외딴 마을. 칠흑 같은 어둠이 덮인 한밤중에 자그마한 농가 안에서 불빛 한점에 의지해 기나긴 편지를 쓰는 40대 후반의 남자가 있다. 텃밭의 고추와 옥수수, 콩도 숨죽이는 고요한 밤. 간암으로 투병중인 병든 사내는 만년필을 꾹꾹 눌러 서울에 있는 어린 자식들에게 유서 아닌 유서를 쓴다. 그러다 잠시 내쉰 한숨이 기나긴 흐느낌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으리라.
‘기회가 조금만 더 주어진다면, 엄마와 너희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남김없이 선사하고 싶다. 내 안에서 달아오른 열기를 너희에게 모조리 옮겨주고, 너희는 그것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해준다면 좋겠구나.’
2000년 겨울 어느날, 마지막 한장 남은 달력을 보며 자신이 살아 있을 날을 찬찬히 헤아려 보는 이 사내의 이름은 이강천(48). 철강업에 종사하던 그는 95년 ‘월간 문학’을 통해 ‘잃어버린 날개’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한데, 99년 간암 선고를 받고 그동안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간에 독버섯처럼 돋아난 암세포를 잘라내고 두 차례 항암제를 맞은 뒤 병원 치료를 전면 거부, 자연에 기대 병든 몸을 되살리고자 혈혈단신 괴산의 빈집으로 찾아들었다.
첩첩산중에서 두해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고는 가벼운 산책과 텃밭 가꾸기, 혼자 하는 식사가 전부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살점을 하나하나 도려내는 심정으로 서울에 있는 어린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줄 것은 병든 아버지의 미천한 세상 경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 2000년과 2001년 2년 동안 쓴 편지가 최근 ‘철부지 아빠의 산골편지’라는 이름으로 묶여 책으로 나왔다.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들에게 남겨줄 게 하나도 없어 참담한 심정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유언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한땀 한땀 찍어내듯 편지를 썼어요. 제가 쓴 편지가 저보다 오래 살아남아 두고두고 아빠의 목소리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죠.”
‘철부지 아빠의 산골편지’는 그가 아이들에게 부친 수백통의 편지 가운데 41통을 가려내 ‘빨간 우체통’ ‘나이테’ ‘생의 절정’ 등으로 나누어 실었다. 불과 몇해 전 간암으로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던 그는 ‘죽음’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우연찮게 들어섰던 생의 오솔길’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는 홀로 오솔길에 접어들었던 ‘황홀한 경험’을 편지 속에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내 시신을 앞에 두고 울지 마라.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해 자리를 옮긴 것뿐이다. 울기보다는 아빠의 새로운 삶을 위해 기도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죽기 전에 내가 죽음을 먼저 인식하고 거기에 대처할 여유가 있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단다. 내 몸의 일부에서 쓸만한 것들을 떼어내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는 “영혼이 떠난 육신을, 아직 더 사용할 수 있는데 그대로 버린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하는데 사후 장기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심상한 어투로 편지에 써내려갔다.
‘내 눈은 오래 사용한 것이긴 해도 아직은 쓸만하다. 1.2와 1.0의 시력에, 안경이나 돋보기도 필요하지 않다. 눈이 없는 사람에게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리고, 내 몸속에도 골라보면 사용가능한 것들이 있다고 본다. 지난번 검사 때까지는 신장이 괜찮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밤에는 죽음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기다리며 그 친구를 어떻게 맞이할까 이 궁리 저 궁리에 골몰하는 그이지만 낮이 되면 다른 무엇보다 서울에서 날아올 아이들의 편지를 기다리며 생기를 되찾는다.

산골에서 암투병하며 아이들에게 유언처럼 쓴 편지 책으로 엮은 소설가 이강천

그렇지만 아이들은 아빠만큼 자주 편지 답장을 하지 않는다. 예쁜 우체통을 만들면 아이들의 답장이 자주 날아올 수 있을까. 기다림에 지친 아빠는 공연히 녹이 슬고 빗물이 스며드는 낡은 우체통을 탓하며 직접 ‘빨간 우체통’을 만들기도 했다.
전화와 인터넷도 안되는 산골에서 아빠는 아이들의 편지를 받기 위해 빨간 우체통으로 유혹도 해보고 훈계도 해보지만 늘 그리운 가족들은 멀리에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리움을 마음에서 덜어내기 위해 산길을 걷는다. 그러면서 꽃과 새와 나무에게 위안을 받고 또다시 아이들에게 전할 사랑의 메시지를 떠올린다.
‘원준아. 예은아. 나무는 추운 겨울을 나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생장이 활발한 봄 여름에 몸을 키우다가 가을과 겨울, 나무는 생장을 멈추고 움츠리면서 선명한 나이테를 그리게 된다는구나. 추위가 혹독할수록 나이테는 더욱 뚜렷하게 그려진다. 추위라는 역경을 겪어보지 못하는 그런 나무는 크기만 컸지, 나이를 먹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편지가 오래 남아 두고두고 아빠의 목소리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써
그런가 하면 평소 말주변이 없었던 아빠는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사과의 말을 아이들에게 살짝 꺼내놓으며 참회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한다.
‘원준아, 예은아. 아빠는 그런 식이었지. 가족과 함께 지낼 때면 언제나 가장이라는 내 위치만 의식하고, 너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아빠로서 부족한 점들만 기억난다.’
원래 말로 표현하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는 그는 아이들과 대화하는 게 어색해 평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데 인색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편지를 통해 봇물처럼 쏟아지는 아빠의 자상함과 깊은 사랑을 “신기하다”는 말로 표현한다.
‘철부지 아빠의 산골편지’는 아빠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글이기 때문일까. 그는 생명줄을 놓칠 뻔한 사람치고는 죽음에 대한 원망이나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왠지 죽지 않고 살아날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어요.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았지만 죽음 가까이 가보니까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 상당히 고맙더군요.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도 많이 생기고요.”
현재 그는 간암이 거의 완치된 상태인데 그동안 먹고사는 데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하찮은 것들이 자신을 살려냈다고 놀라워한다.
“산 속에서 제 동무가 되어 외로움을 달래주던 나무와 꽃과 새와 짐승들, 그들의 훈훈한 입김과 다채로운 율동, 해맑은 눈빛과 노래가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몰라요.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은 제 피를 맑게 했고,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흙의 감촉과 구수한 냄새는 지치고 병든 심신을 어루만져주었죠.”
이제 요양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강천씨. 그가 죽음의 위기를 겪으면서 간절히 원했던 가족사랑을 불길처럼 활활 태우며 건강하게 살 수 있길 기원한다.

여성동아 2003년 9월 4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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