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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적당주의’ 예찬론

2003. 08. 29

한 일본 임상심리학자가 한 말이다. “사람은 아무도 생각만큼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 완벽히 이해해야만 만족하는 사람은 평생 불만으로 가득찬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사람을 사귄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현실에 맞는 사회관계다.” 나 역시 ‘적당주의’가 대인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비결이다. ‘친하다’는 기준이 서로 속속들이 아는 것이라면 이는 곧 상대에 대한 집착과 실망, 그리고 상처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적당한 관심과 예의, 적당히 눈감아줄 줄 아는 여유가 관계를 ‘쿨’하게 유지시키지 않을까.

‘적당주의’ 예찬론

내인생관은 ‘적당히 살자’다. 내 사전에 `‘최선을 다하자’란 말은 없다. 그것이 과로사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직장에서 오래 버티는 비결이고, 대인관계를 오래, 꾸준히 이어가는 비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적당히’란 말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적당주의’의 사전적 의미도 ‘임시 변통이나 눈가림으로 대충 일을 해버림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하지만 진정한 `‘적당’은 세상살이를 참 편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를 알게 되면 서로 완벽히 파악하고 이해하려들지 적당히 거리 두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차갑다거나 개인주의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많은 관계에서 적정선을 유지하지 못해 깨어지는 사이가 얼마나 많은가. 왜 사람들은 친해지면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려하고 심지어 집안의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알아야 흡족해할까.
취재하다 만난 분이 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언제 봐도 명랑해서, 일을 떠나서 종종 함께 식사를 하고, 외국 출장을 같이 가기도 했다. 그래서 서로 화장을 지운 맨얼굴이며 수영복 입은 모습까지 봤으니 이 정도면 엄청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됐다. 남편을 어떻게 만났는지,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하는 이야기들이다.

상대방의 내장 속까지 다 안다고 해서 진정 아름다운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날 한 지인이 마치 엄청난 비밀을 전하듯 “그 여자, 몇 년 전에 이혼했대요. 그런데 주위사람에겐 알리지 않아 남들은 잘 모르나봐요” 하고 말했다. 그러곤 “그렇게 친하면서 그걸 모르셨어요?” 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이 내게 문제될 것도, 더욱이 충격일 것도 없었다. 이혼한 사실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건 그 여자의 사생활이다.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굳이 밝힌다고 해서 사회 정화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라 그 뒤로도 모른 척했다. 그리고 벌써 10년이 흘렀다. 우린 여전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서로 격려해준다. 직장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난 그에게 많은 조언을 듣고, 그 역시 힘든 일이 생기면 나를 만나 밥을 먹고, 수다를 떨며 힘을 얻는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겉도는 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내장 속까지 다 안다고 해서 진정 아름다운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친하다는 이유로 서로 사생활을 보호하는 경계선을 허무는 이들이 종종 있다. 친하지 않았을 때는 예의를 지키고, 교양도 있던 사람이 몇번 만남을 거듭하면, 휴일이든 늦은 밤이든 가리지 않고 전화를 걸어 신세한탄을 늘어놓거나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도, 지적하는 것도 많아진다.
“머리 스타일 좀 바꾸지 그래요. 그게 뭐야, 좀더 세련되게 잘라요. 내 단골 미용실에 같이 가요. 어깨가 아프다고요? 내 사돈의 팔촌이 한의원을 하는데 지금 당장 나랑 가서 침 맞아요. 참, 전에 보니 딸아이가 아토피성 피부던데 내가 그쪽에 용한 병원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 거실에 있는 액자, 그거 나 주면 안되나?”

‘적당주의’ 예찬론

여자들의 경우엔 여학생 시절부터 단짝친구와 붙어 다니던 경험이 있어 뭐든 함께해야 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시장이나 목욕탕에 함께 가고 수시로 서로 집안을 오가며 냉장고 속까지 파악해야 친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친분 증서’라도 받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친한 게 아니라 서로 집착하는 것이고 심해지면 편집증 증세를 보여 영화 ‘미저리’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미운정, 고운정이 들겠지만 서로 흥미를 잃고, 싫증내기 십상이다. 결국 “그 여자가 그럴 줄 몰랐어.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 험담을 그렇게 하다니 배은망덕 아니야” “순희 엄마에게만 털어놓은 내 남편 이야기를 왜 온 동네에 떠들고 다녀?” 하는 원망과 비탄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처절한 이해’보다는 ‘찬란한 오해’가 낫다
많은 여성들이 상대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특히 이성에게 이해받고 싶어한다.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제대로 이해해주면 좋겠어요. 저를 공주처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 단점이나 약점을 완벽히 이해해주는 그런 푸근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런데 처절한 이해보다는 찬란한 오해가 낫다. 연애시절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황홀한 오해를 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진실에 눈뜨고 서로 냉정하게 이해하는 순간, 실망하게 되고 그걸 못 견디면 파경에 이르게 된다.
“난 당신을 이해해, 그럼 이해하고 말고. 바쁘니까 당연히 집안살림은 엉망이지, 이해한다고. 할 일이 많으니까 많이 먹어야 하고, 왕성한 식욕으로 그렇게 먹으면서도 운동을 안하니까 똥배가 나오는 건 당연하지. 나이 들었으니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 늘어나는 것도 다 이해해. 신문사다, 방송이다, 거기에 집안일까지 해내려면 정신없으니까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연락 못하는 거 다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누가 맛있는 것 사준다면 친한 사이도 아닌데 히히덕거리며 달려가는 거 다 이해한다니까. 남들에겐 착하게 살라고 강조해놓고 정작 본인은 `바쁘다는 핑계로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다 이해해.”
누군가 정말 내 자신을 이처럼 속속들이 알아서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이해하려 든다면 그에게 감사의 마음이 들기는커녕 소리 안 나게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않을까.
일본 임상심리학자 스가노 타이조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생각만큼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걸 모르고 상대가 100% 이해해주기를 바랄 때 거기에는 반드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상대를 완벽히 이해해야 만족하는 사람은 평생 불만으로 가득 찬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사람을 사귄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현실에 맞는 사회관계다.”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적당히 예의를 지키고, 적당히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적당히 눈감아주고, 적당히 무시하며 그렇게 서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상처받지 않고 쿨하게 지내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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