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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끼있는 남자

‘흰머리 연주회’ ‘청바지 연주회’ 등으로 화제 모은 지휘자 함신익

“남들은 괴짜라고 하지만 전 많은 사람들이 연주회장에 와서 음악을 들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 글·장다혜 ■ 사진·조영철 기자

2003. 08. 08

한국인 최초 예일대 음대 교수이며 이름난 지휘자로 주목받고 있는 함신익씨에게는 따라붙는 수식어가 너무도 많다. 기업가적 재능을 가진 오케스트라 운영자, 운동복 차림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괴짜 지휘자, 프로그램 기획의 천재…. 심지어 미국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부흥사’로 불리며 주목받는 그를 만났다.

‘흰머리 연주회’ ‘청바지 연주회’ 등으로 화제 모은 지휘자 함신익

91년 세계적인 지휘자의 등용문으로 알려진 피텔버그 국제 지휘자 경연대회에서 입상, 두각을 나타내면서 차세대 지휘자로 주목받은 함신익씨(46). 곱슬머리에 미남형인 함씨는 그동안 미국 밀부룩 오케스트라, 에벌린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린베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의 음악감독을 거쳐 95년 예일대 지휘교수 공채 시험에서 1백50대 1의 경쟁을 뚫고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음대 교수가 되면서 예일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그는 새로 맡은 오케스트라마다 눈에 띌 만큼 기량을 향상시키고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로 탈바꿈시켜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에벌린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룬 교향악단’으로 소개되었고 이에 에벌린시에서는 ‘함신익의 날’을 선포했을 정도다.
2001년부터는 대전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취임, 대전시립교향악단을 국내 정상의 오케스트라로 발돋움시켜 주목받고 있다.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83년 단돈 2백달러를 손에 쥐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텔레비전을 보려면 동네 만화가게를 기웃거려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그가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교회에 놓여 있던 오르간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예배시간이 되면 찬송가에 맞춰 반주를 했던 그에게 음악은 너무나 친숙했다.
지휘자로서의 재능도 일찍부터 발휘했다. 고등학교 때 교회 어린이합창단을 맡았던 그는 연세대학교 총장배 어린이 합창 경연대회에 나가 쟁쟁한 대형 교회의 합창단을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음악공부를 했던 것과 달리 그는 스스로 ‘독학’을 하면서 음악을 익혔다. 그런 가운데 집안의 허락을 어렵사리 얻어내 건국대학교 음대에 들어갔다. 다행히 수석 입학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이미 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놓은 상태였지만 좀더 넓은 세상에 나가 음악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뻔히 아는 처지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우선 장학금을 주는 학교를 찾아나섰다. 자신의 피아노 연주 녹음 테이프와 지휘자로서의 포부를 담을 글을 여러 학교에 보낸 결과 텍사스 남부 주립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부모님은 극구 만류했다. 학비가 해결됐다고 해서 미국 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떠나는 그에게 아버지는 2백달러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막상 미국에 건너가 보니 텍사스 남부 주립대는 그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대학에서는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그가 유독 매력을 느낀 분야는 바로 지휘였다. 때문에 그는 텍사스 최고의 명문으로, ‘남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라이스대학을 찾아가 끈질기게 청강을 거듭한 끝에 오디션을 거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행운’을 안을 수 있었다.
‘흰머리 연주회’ ‘청바지 연주회’ 등으로 화제 모은 지휘자 함신익

라이스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음악 명문 이스트만 음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하지만 그는 지휘를 이론 위주로 공부하는 것이 마음에 차질 않았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도 지휘과에 다니는 학생들이 실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이스트만 음대 재학시절 지휘공부를 맘껏 하기 위해 실력있는 재학생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오케스트라를 구성했죠.”
그것이 바로 깁스 오케스트라. 깁스는 에벌린 시의 거리 이름으로 이른바 길거리 오케스트라다. 학생신분인 그가 만든 깁스 오케스트라는 창단 당시 20명이던 단원이 2년 만에 90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오케스트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학교측에서는 연주홀까지 무료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지휘자를 위한 상을 제정하여 그에게 첫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흰머리 연주회’ ‘청바지 연주회’ 등으로 화제 모은 지휘자 함신익

참신하고 별난 이벤트를 통해 대전시립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함신익씨.


가진 것 하나 없이 떠난 유학길. 공부에만 전념해도 모자라는 시간에 생활비까지 벌어야 했던 그는 어느 순간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기숙사에서 혼자 죽도록 앓다가 일어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부터 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라이스대학 재학 당시 휴스턴의 한인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던 그는 결혼을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공개 구혼장을 만들어 배포했던 것. ‘나는 이런 여성을 원한다’고 일일이 말하고 다닐 수 없었기에 생각해낸 것이 바로 공개 구혼장이었다.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제가 원하는 여성상에 대한 내용을 쓰고 제 명함판 사진까지 붙여 정식 이력서를 만들어 돌렸습니다. 덕분에 여러 명의 신붓감을 만나봤지만 다 실패했죠. 결혼이란 게 인연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이력서 돌린다고 될 일입니까?(웃음)”
그러던 중 지금의 아내(42)를 우연찮게 만나게 되었다. 휴스턴 한인교회에서 그를 본 뉴욕의 한국인 목사가 넘겨준 공개 구혼장을 읽어본 지금의 아내가 호감을 표시하며 그를 만나러 뉴욕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휴스턴까지 간 것.
“사실 60점 이상이면 무조건 결혼하려고 했는데 아내를 보는 순간 1백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앙심도 좋아 보였고 매사 급한 저와 달리 아내는 여유 있는 성격에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한마디로 과묵하면서 강단이 있어 보였지요. 사실 저는 음악을 접하면서 날카로운 음성에는 금방 피곤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아내는 편안하고 나직한 음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참 좋았어요.”
그의 아내는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후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오래한 커리어우먼이다. 86년 결혼을 한 후에도 그의 아내는 휴스턴에 있는 법률 사무실에 일자리를 구해 그가 음악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는 그에게 생애 가장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결혼 5년 만에 딸이 태어난 것. 그는 음악가답게 딸의 이름을 멜로디(12)라고 지었다. 아들을 낳으면 하모니라고 지으려 했다고.
‘흰머리 연주회’ ‘청바지 연주회’ 등으로 화제 모은 지휘자 함신익

함씨의 ‘공개구혼장’을 보고 흥미를 느껴 찾아와 결혼하게 된 아내, 딸 멜로디와 함께.


그는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멜로디는 피아노, 첼로, 발레, 테니스, 연기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을 만큼 재능이 굉장하다”고 자랑한다. 미국에서 태어났음에도 미국 동북부 지역 한국어 동화구연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로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딸 멜로디에게 모국어인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나올 기회가 생기면 가급적 함께 나오고 그의 집이 있는 뉴저지에서 한국어 학교를 다니게 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1년에 3개월 정도는 한국에 머문다. 지난 2001년부터 대전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과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함신익이 뛰어들면 음악이 살아나고 공연장이 북적대며 후원자가 몰려든다’고 할 만큼 그의 연주회에는 참신한 이벤트들이 많다.
그에게 ‘괴짜 지휘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다른 연주회에서는 보기 힘든 별난 광경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40대 이후의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도록 한 ‘흰머리 연주회’, 청소년만 입장할 수 있도록 한 ‘청바지 연주회’, 지휘자인 그가 문제를 내고 답을 맞힌 가족의 어린이들이 무대에 올라와 악기를 직접 만져보고 무대 위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한 ‘퀴즈 퀴즈! 가족음악회’ 등 음악을 위한 그의 무대 연출은 언제나 새롭다.

‘흰머리 연주회’ ‘청바지 연주회’ 등으로 화제 모은 지휘자 함신익

함씨는 실력이 못 미치는 단원은 칼같이 잘라내는 단호함을 지녔으며, 직접 후원금을 모으러 다닐 만큼 오케스트라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다르다.


지난해 월드컵대회 당시에는 전 단원이 축구복에 운동화를 신고 나와 청중의 함성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엔 운동복을 입고 나오는 단원들을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연주회가 끝나고 앙코르 곡이 울려퍼질 무렵에는 모두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그를 보고 주변에선 ‘괴짜’라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괴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연주회장에 와서 음악을 들어주길 바랄 뿐이다. 때문에 가끔 클래식의 엄숙하고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선한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기업에도 전문경영인이 있듯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음악의 CEO’ 라 부르기도 한다.
“지휘자가 지휘만 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지휘 실력 못지않게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거든요. 기업의 최고경영자에게 기업을 끌어갈 힘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미국은 후원회가 잘 만들어져 있어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데 그다지 큰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후원회를 만들어가는데, 사실 어려움이 많죠.”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하는 연습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은 후원자들을 만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는 후원금을 조성하러 다니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후원금을 모아 제가 쓰는 것도 아니고 결국 지역사회를 위해 쓰는데 왜 부끄럽습니까? ‘나는 예술가니까 지휘만 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거죠. 저도 후원회를 찾아다니는 시간에 악보를 좀더 많이 보고 지휘만 하면 정말 좋겠지만 이런 일이 아직은 필요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원들을 캐스팅할 때 무척 엄격한 사람으로 소문나 있다. 어떤 욕을 먹더라도 실력이 못 미치는 단원은 칼같이 잘라내는 ‘냉혈인’이다. 때문에 그가 대전시립교향악단을 맡았을 때 적잖은 마찰이 따르기도 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모두 감싸안고 가야겠지만 프로는 무엇보다 실력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의 이런 결단이 밑바탕이 돼 대전시립교향악단은 국내에서 알아주는 교향악단으로 자리매김했고 그가 지휘하는 연주회는 늘 청중이 넘쳐난다.
그는 현재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SONG (Symphony Orchestra for Next Generation)이라는 이름의 차세대 교향악단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 해외에서 훌륭한 기량을 닦고 귀국한 차세대 유망주들을 규합하여 비정규 민간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려는 것인데 이는 한국의 인재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일을 막고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보겠다는 뜻에서다.
잠시 점심시간을 쪼개어 인터뷰에 응하고 굳어진 김밥과 물로 점심을 떼우면서도 그의 눈은 악보에 가 있다.
어쩌다 집에서 쉴 때도 그는 대부분 악보를 보며 허공을 향해 지휘봉을 휘두르며 보낸다. 지휘가 취미이자 특기다. 심지어 그에겐 세상 모든 젓가락이 지휘봉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렇듯 오로지 음악에만 빠져 있는 남편에게 가끔 아내가 불평하지는 않는지 물어보자 그는 슬며시 웃어 보이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이런 말로 대신한다.
“연애기간도 짧았고 결혼하고 나서도 제가 여러 곳을 다녔던 관계로 많이 떨어져 살다 보니 옆에 있는데도 늘 그리운 생각이 들어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라는 말처럼…. 그런 말을 해주면 아내는 감동을 해요. 음악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늘 접하면서도 그리워지거든요. 바로 옆에 있어도 그리움이 쌓일 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일이 있다는 것…. 그래서 전 가끔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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