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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감동이 있는 여행

실크로드 여행체험 책으로 펴낸 박재동 화백

“순박한 파키스탄 소녀의 참된 마음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 글·박윤희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3.08.08 11:13:00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이색적인 여행에세이를 냈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직접 그린 수백 컷의 스케치에 그의 거친 여정을 글과 함께 담아낸 것.
풍부한 상상력, 엉뚱한 행동으로 맨살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박화백이 풀어놓는 이야기.
실크로드 여행체험 책으로 펴낸 박재동 화백

“제마음속의 지도가 커졌다고 할까요? 여행한 모든 곳이 우리나라 지도가 돼버렸어요. 세상은 어느 땅이든지 소중하다는 마음도 갖게 됐고요.”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50)이 최근 여행 에세이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1·2’을 펴냈다. 지난 2000년 가을 중국 베이징에서 시작해 난주, 돈황, 호탄, 페샤와르 등을 거쳐 인도 델리에 이르는 34일간의 천산남로 기행을 담은 여행기록으로 특히 그가 현지에서 직접 그린 수백 컷의 그림들이 눈길을 끄는 책이다.
그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면서도 스케치북과 펜을 놓지 않았다고 하는데, 스케치한 그림만 봐도 사막의 모래바람이 사각사각 눈꺼풀을 두드리는 것 같고, 황금빛 초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만 같다. 무엇보다 그가 실크로드 곳곳에서 스케치한 소수민족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유적 그림에서 대륙을 떠돌며 여행자가 누렸을 온갖 정신적인 호사가 느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참기 힘든 부러움을 유발시킨다.
여행 후일담을 들어보기 위해 강남구에 있는 오돌또기 사무실을 찾았다. 지난 88년부터 96년까지 일간지의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그는 현재 제주 4·3항쟁을 소재로 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오돌또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임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작업중이었는지 오른손에 로트링펜을 들고 있던 그는 대뜸 필자의 얼굴을 그려주겠다며 노련한 솜씨로 쓱쓱 선을 긋기 시작했다. 펜을 쥔 손가락이 길고 가늘다. 그런데 왼손의 손톱에 비해 오른손의 손톱이 훨씬 길다. 상식대로라면 작업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오른손 손톱을 짧게 잘라야 하는데도 말이다.
“다 이유가 있죠. 요즘 기타를 배우거든요.”
그러고 보니 어지럽게 책들이 널려 있는 그의 책상 옆에 클래식 기타가 한대 누워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너무 많아 오래오래 살아야겠다”고 공표하고 다니더니 늦바람이라도 난 것일까. 종이를 뚫을 듯한 날카로운 눈빛과 상반되는, 내면 어딘가의 부드러움이 살짝 엿보인다.
“아직은 잘 못 쳐요. 그런데 이번 생에서 열심히 연습하면 다음 생에선 더 잘 치게 되고 또 그 다음다음 생에서는 (기타 연주를) 아주 잘하게 되겠죠.”
자주색 잉크가 몇 차례 엇갈리더니 금세 그림 한장이 완성되었다. 실크로드를 기행할 때도 저렇게 민첩하게 초원의 풍광과 유적, 곳곳에서 마주친 유목민, 무희, 어린이 등을 그려낸 모양이다. 간단치 않은 여행길에서 어떻게 저 많은 스케치를 기록으로 남겼을까 하는 의문이 금세 풀렸다.



대초원에서 만난 눈먼 소년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책 만드는 데 꼬박 1년 넘게 걸렸어요. 이번에 제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힘이에요. 제가 본 것을 혼자만 볼 수 없어 나누어 보고 싶고 전해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그 사랑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겁니다.”
실크로드를 여행한 목적은 단순한 스케치 여행이 아니라 장선우 감독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바리공주’를 만들기 위한 사전답사였는데 영화는 현재 미궁에 빠져버린 상태다.
그는 실크로드 여행의 눈동자 격이라고 할 만큼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바양블라크’와 ‘훈자’를 꼽는다. 바양블라크는 중국 제2의 초원이라 불리는 광대한 율두스 초원의 분지 안에 있는데 백조를 비롯해 1백28종의 철새들이 날아들고 저 멀리 톈산(天山)의 만년설이 보이는 신비스런 곳이라고 한다.
“너무나도 파란 하늘, 천학(天鶴)이 내려앉는다는 바양블라크 호수도 인상 깊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눈먼 소년의 노래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뭐랄까.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저 멀리 사라지는 황혼을 바라보며 부르는 소년의 노래가 너무나 청아하고 맑고 아름답고 애잔해서 숨죽여 서 있는 제 눈에서 그만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죠. 그야말로 천상의 소리였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였어요. 슬픈 황홀함, 영원한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예요.”
실크로드 여행체험 책으로 펴낸 박재동 화백

애니메이션 ‘바리공주’를 만들기 위해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


당시 열한살이던 키티붐바이라는 소년은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아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말을 태워주고 살아가는 부모 없는 고아라고 한다. 소년의 목소리는 바양블라크의 설산, 초원, 호수 이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그의 가슴을 사로잡았는데 다행히 일행인 뮤지션 강기영씨가 소년의 노래를 녹음기에 담아와 오돌또기 홈페이지(www.odoltogi.co.kr)에 올려놓았다. 그는 내년쯤 소년을 만나러 다시 바양블라크를 찾을 계획이라고 한다.

실크로드 여행체험 책으로 펴낸 박재동 화백

낙타를 타고 사막과 초월을 횡단하는 실크로드 여행팀.


바양블라크와 함께 그의 가슴 한 구석을 그리움으로 채우는 여행지는 파키스탄 훈자. 지도에는 이곳을 알티트(Altit)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파미르 고원 근방에 있는 알티트 마을은 세계적인 장수촌이에요. 1백50세 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요즘은 노인들이 1백세 밖에 못 산다고 푸념하는 그런 곳이죠. 그만큼 자연이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사람들의 표정도 너무나도 부드럽고 선해요. 마을 뒷산엔 파란 하늘 아래 만년설이 하얗고, 소 울음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한가롭게 들리는, 동화 속에 나오는 곳과 같죠.”
그는 여행중 아이들의 얼굴을 스케치해주며 다양한 민족의 꼬마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이곳에서도 ‘샤위나’라는 소녀를 만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얻게 된다.
“샤위나라는 여자아이가 제 그림 속에 담긴 그림이 자기 동생들이라고 한참 좋아서 떠들더니 제 머리가 바람에 날려 헝클어졌다고 자기 머리띠를 벗어주는 거예요. 제가 당황해서 그냥 가지고 있으니까 머리에 써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에 쓰니까 잘 어울린다면서 그냥 가지라고 하는 거예요. 순간 가슴이 뭉클했죠. 어떻게 낯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정을 베푸는지…. 샤위나를 통해 인간성의 참된 바탕 같은 것을 느꼈어요. 그런 바닥에 제 맨살이 닿은 것 같은 기분이었죠.”
그는 나중에 샤위나를 기억하며 이런 메모를 남겼다.
‘내게 만약 한국이라는 사랑스런 조국이 없다면 이 작은 마을을 내 고향으로 삼고 싶네. 그것은 이곳 훈자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한움큼의 친절이 아름다웠기 때문. 남아서 주는 한 바구니가 아니라 가난함 속에서 받은 한줌이었기 때문.’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샤위나의 티 없이 고운 마음을 대면하는 순간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훈자에서는 머리띠 하나라도 꽤 비쌀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만으로도 고마우니 그냥 네가 쓰라’고 샤위나에게 머리띠를 돌려주고 말았어요. 그건 돌려주면 안되는 것인데…. 제가 마음이 한없이 부유한 샤위나를 한순간 가난하게 만들어버리는 바보짓을 한 셈이죠.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어요.”
샤위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그는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기행 2’에 샤위나로부터 얻은 영감을 판타지 만화로 풀어내고,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도 제작했다.
원래 아이들과 금방 친구가 되는 사람은 연애도 잘하는 법인데 팔등신 몸매에 잘생긴 코를 가진 그가 대륙의 여인들과 애틋한 로맨스를 나눌 기회는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혼자 간 배낭여행이면 모를까 단체로 간 여행이어서 아쉽게도 그런 기회가 없었어요(웃음).”
그는 여행 도중 대륙의 여인 대신 밤하늘의 ‘별’과 소곤소곤 연애하는 현장을 일행들에게 많이 들켰다. 그래서 여행하며 얻은 별명이 ‘훈자의 별.’ 별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그는 별과 관련된 동요들을 생각나는 대로 3∼4곡 불러댄다. 그러더니 ‘달’과 관련된 노래도 부른다. 상당히 엉뚱한 데가 있다.
그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혼자 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별이 깜빡거리며 “너를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소리에 끊임없이 존재를 확장시키며 고등학교 미술교사에서 시사만화가로, 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안주하지 않는 도전자’의 삶을 개척해온 것이다.
여행 내내 그는 바리공주가 감로수를 찾는 심정으로 실크로드에 감추어진 ‘인류애’ ‘참된 행복’을 찾아 헤맸다는데 그런 진지함 못지않게 엉뚱한 일도 많이 저질렀다고 한다.
그와 함께 ‘오돌또기’ 제작에 매달리고 있는 유승배 감독의 이야기다.
“박화백은 좀 엉뚱한 데가 있어요. 몽골에 가서 날씨가 추워지는 바람에 모두 똑같이 맞춰간 겨울 점퍼를 챙겨 입었어요. 그런데 일행 중 한명이 점퍼를 잃어버린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없고, 날은 춥고…. 모두 걱정을 했죠. 며칠이 지난 후 보니까 박화백의 가방에서 잃어버린 그 점퍼가 나오는 겁니다.”
그는 자기 점퍼를 몸에 걸치고 있으면서도 밤마다 계속 남의 점퍼를 가방에 넣었다 뺏다 하기를 반복하더란다. 심지어 “날씨가 추우니까 짐이 무거워도 점퍼를 잘 챙겨두어야 해” 하고 중얼거리기까지 하면서.
“저런 행동이 얼마나 가나 아무 말 없이 지켜봤어요. 끝내 자기가 점퍼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남의 점퍼를 자기 것인 줄 알고 갰다가 폈다가 하더라고요. 제가 ‘도대체 왜 그러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어! 내가 점퍼를 입고 있었나?’ 하면서 깜짝 놀라는 거 있죠.”
유감독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엉뚱하지만 깊은 진정이 있는 사람이죠. 예술가적인 ‘끼’도 많아요.”

실크로드 여행체험 책으로 펴낸 박재동 화백

박재동 화백은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그린 그림을 8월1일부터 14일까지 롯데백화점 본점 8층에서 전시한다.


험한 길 꾸준히 걷는 낙타 보고 숙연해져
과거 박재동의 시사만평에서 풍기는 ‘촌철살인’의 분위기 때문에 그의 품성 또한 날카롭고 빈틈이 없을 것 같지만 예상 밖으로 그는 의외성이 많은 사람이다.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엽기성(?)이 한껏 드러난다. 사막에서 굴러 떨어지는 인체를 묘사하기 위해 일행들에게 사막에서 굴러떨어질 것을 수차례 요구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결국 그의 요구에 따라 모래언덕을 구르던 일행의 디지털 캠코더가 망가졌다. 사막을 구르는 통에 고가의 캠코더에 모래알이 들어가버린 것이다.
기인행각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싹을 보이기 시작, 그가 일곱살 때 집 방바닥 장판에 파도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그것도 크레용이나 물감이 아닌 송곳으로 일일이 점을 찍어 파도의 웅장함을 표현했다고. 그런데 그날 저녁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 신봉선 여사(71)는 어린 아들을 혼내지 않고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으로 그쳤다. 가난한 살림에 장판을 다 버려놓았는데도 말이다.
이런 일화를 비롯해 신여사가 그를 예술가로 키워낸 여러가지 미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난 5월 신여사는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바 있다. 송곳 그림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필자가 “정말 대단한 어머니를 둔 것 같다”고 했더니 그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들려준 대답이 상상을 초월한다.
“원래 잔소리나 꾸지람을 하지 않는 어머니의 성품도 성품이지만 그때 어머니가 저를 혼내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어요. 장판에 새겨진 제 그림을 보고 감동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출렁이는 파도 그림이 정말 멋있었거든요. 저도 송곳으로 파도 그림을 그리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몰라요.”
어떤 사람은 그를 두고 “신문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왜 박차고 나왔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지만 그는 “애니메이션이 너무너무 하고 싶어 그곳을 떠났을 뿐”이라고 간단하게 대꾸한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늘 웃어요. 항상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신앙’ 때문에 그래요. 그 사람들한테 가장 재미있는 게 신앙인가봐요. 사람이란 무엇을 가장 재미있는 것, 행복한 것으로 두느냐에 따라 어떻게 살아갈 건지 그 물줄기가 잡히게 되죠. 그 다음에 이런저런 변화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의 큰 흐름 속에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는 실크로드 여행 전에는 누가 좋아하는 동물을 꼽으라고 하면 초원을 치달리는 천리마나 천천히 유영하다가 쏜살같이 내리꽂는 독수리, 용맹하고 날쌘 호랑이나 사자를 떠올렸고 또 그렇게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 도중 사막을 횡단하는 야생 낙타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사막을 지나는데 낙타떼가 지나가고 있었어요. 주인도 없고 고삐 맨 흔적도 없이. 많은 짐을 싣고도 가장 거칠고 험한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걸어가는 낙타를 생각하니 숙연해지더군요.”
자신의 재능으로 이미 탄탄하게 다져진 안정적인 길을 마다하고 시사만화가로서의 정점에서 미련 없이 내려와 다시 불모지나 다름없는 애니메이션 영화계에서 걸음마를 시작한 박재동 화백. 이런 그가 사막의 야생 낙타와 닮은꼴로 보였다. 애니메이션 불모지에에서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제작비 부족 등 여러가지 문제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오돌또기’의 산고를 겪고 있는 박재동 화백의 각오는 이렇다.
‘낙타는 가장 적은 물을 마시고 가장 멀고 거친 길을 가장 많은 짐을 지고 가장 오래 간다. 아, 한 마리 낙타가 되어 져야 할 짐을 지고 그렇게 묵묵히 가고 싶구나!’

여성동아 2003년 8월 4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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