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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가슴 아픈 사연

30대 기러기 아빠 자살사건 전말 & ‘기러기 가족’의 현실

외로움 이기지 못하고 불륜에 빠져 이혼한 후 사업까지 실패, 끝내 죽음 선택한

■ 글·최호열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3. 07. 31

‘자녀 교육문제’로 생겨난 ‘기러기 가족’이 점점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한 30대 가장이 기러기 아빠 생활의 후유증으로 방황하다 자살한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전말과 이를 계기로 살펴본 기러기 가족의 현실.

30대 기러기 아빠 자살사건 전말 & ‘기러기 가족’의 현실

자녀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면서 뒷바라지를 위해 아내가 아이와 함께 떠나 홀로 한국에 남게 된 남편을 일컬어 ‘기러기 아빠’라고 부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러기 아빠는 연예인이나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고소득자에 한정된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중산층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었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 기업의 경우 미성년 자녀를 둔 직원의 10% 이상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자녀 교육문제로 생겨난 또 다른 이산가족인 이들 기러기 가족이 점점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기러기 아빠가 가족과 떨어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외도에 빠지는 등 가족 해체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기러기 가족의 극단적 비극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내와 두 자녀를 외국으로 보내고 혼자 지내던 벤처사업가 신모씨(36)가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는 지난 7월2일 오전 9시경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넥타이로 목을 매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신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2000년 독립해 교육벤처회사를 차린 야심찬 사업가였다.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기업들이 사원들의 영어실력 향상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그는 실력 있는 영어강사들을 채용해 대기업에서 사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영어강좌의 강사로 파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죽음을 수사한 강남경찰서 관계자에 따르면 신씨의 사업은 비교적 잘되는 편이었다고 한다.
비극의 씨앗은 지난해 7월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자녀를 캐나다로 조기유학을 보내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아내 김모씨(32)가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함께 출국한 뒤, 한국에 혼자 남아 생활하게 된 신씨는 심한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것.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방황하던 중 우연히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고, 이내 불륜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그 즈음부터 신씨는 돈에 쪼들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업은 그럭저럭 되었지만 자금회전이 안되면서 직원들의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하는 등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신씨는 살던 아파트를 팔고 자신의 회사 사무실인 오피스텔에서 숙식을 해결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내 김씨가 경찰조사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신씨는 캐나다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돈을 제대로 보내주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캐나다에서 생활에 쪼들려 고통을 겪던 김씨는 결국 지난해 12월 한국에 돌아왔고, 그때 남편으로부터 “다른 여자가 생겼으니 이혼하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김씨는 한국에 남아 남편을 설득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혼을 막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하기도 했지만 남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결국 김씨는 간통죄를 취하한 후 지난 6월 합의이혼을 했다.
이들의 이혼은 가족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아들의 이혼 소식을 들은 신씨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씨의 가족에 따르면 이로 인해 신씨는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게 내 탓”이라고 자책하며 무척 괴로워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신씨의 사업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어려워지기만 했다. 그가 자살하기 직전엔 극심한 돈 가뭄에 시달려 신용카드가 연체된 것은 물론이고 오피스텔 임대료도 수개월째 밀린 상태였다. 직원들 임금 역시 두달치나 밀려 자살하기 전날엔 직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결국 자신에게 몰아닥친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취해 사무실 겸 숙소인 오피스텔에 들어간 신씨는 그날밤 넥타이로 자신의 목을 매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말았다. 오피스텔에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 한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여보, 당신을 사랑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잘 살아요. 미안해요.”

30대 기러기 아빠 자살사건 전말 & ‘기러기 가족’의 현실

30~40대 중산층의 경우 자녀들의 조기유학으로 가족해체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신씨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많은 기러기 아빠들이 비슷한 고통과 고민을 겪고 있다.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과 함께 아내를 뉴질랜드로 보내고 1년 넘게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는 K대 김모 교수(44)는 서서히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건강을 위해 집에 있을 땐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상을 차려도 혼자 밥 먹을 때 느끼는 처량함 때문에 밥이 넘어가지 않아 몇술 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더하더군요. 혼자 사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위장과 심장에 이상도 생겼고요.”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다. 한달 월급 전부를 아내에게 보내고 자신은 원고료와 특강료로 생활하고 있지만 궁핍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가끔 ‘내가 돈버는 기계인가’ 하는 불만보다 ‘아이들이 돌아오면 우리 가정이 옛날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이라고 토로했다.
“외로움 때문에 솔직히 탈선의 유혹을 느낄 때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이혼까지 간다는 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제가 탈선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떨어져 살다 보면 아내와 아이들과 다시 만났을 때 거리감을 메울 수 없을 것 같아요. 벌써부터 전화나 이메일을 주고받는 횟수가 줄고, 전화를 해도 대화의 공감대가 현저히 줄었다는 걸 느끼거든요.”
김교수의 우려처럼 기러기 아빠들은 자신들이 가족에게 버림받는 펭귄 아빠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외국으로 떠난 아내들의 탈선도 점점 늘어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언어와 현지 실정에 어두운데다 이국 땅에서 정신적 공허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남성이 친절하게 도와주면 마음이 흔들려 유혹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 캐나다 교포사회에선 아이와 함께 온 엄마들이 현지 정착과정에서 유학상담사나 어학교사, 골프강사, 보험설계사, 자동차딜러 등의 도움을 받다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불륜으로 발전,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일등 지상주의와 과열된 교육열, 자식에 대한 유별난 애착이 낳은 새로운 풍속도인 기러기 가족이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연구원 등의 전문가들은 “기러기 아빠가 자신을 잘 추스르며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장과 사회에서의 배려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학교 뿐 아니라 일반 직장에서도 안식년 제도 도입과 연월차 휴가 보장 등으로 기러기 가족이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서로 믿음과 공감대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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