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9년, 미8군 무대를 통해 데뷔한 이후 ‘9월의 사랑’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초우’ ‘연인의 길’ ‘서울의 찬가’ ‘가시나무새’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가수로 활동해온 패티 김(63)이 올해로 가수 데뷔 45주년을 맞았다. 올가을 기념 콘서트를 열 예정이지만 그는 벌써 ‘5년 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50주년 기념 및 은퇴 공연. 이제 그에게 남은 가장 큰 꿈은 아름다운 은퇴인 것일까? 어쩌면 그의 생도 마찬가지리라. 조금씩 준비가 필요한 때가 됐다.
“황혼은 온 하늘을 뒤덮으며 사라져가요. 어떤 때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혼이 더욱 아름답고 오히려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5년 후에 제 황혼이 절정을 이루며 타오를 거예요. 그때까진 자신 있어요. 제 혼을 마지막까지 다 태우고 내려와야죠.”
가수 데뷔 이후 팬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어 한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다던 그가 칠순을 앞두고 마지막 무대에 올라가 열창을 토해낼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당사자인 그의 심정은 오죽하랴. 그는 소녀 같은 심정으로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5년 뒤에도 그의 노래 혼은 ‘은퇴’라는 이름 뒤로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둘째딸 카밀라(25)가 드디어 넉달 전 자신의 첫 앨범 ‘인트로스팩트(Introspect)’를 내고 가수로 데뷔한 것. 이제 그는 딸, 카밀라를 통해 무대에 남아 ‘이제까지 45년, 그리고 다시 앞으로 45년’을 이어가며 노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근 그는 또 하나 경사를 맞았다. 큰딸 정아씨(35)가 올 6월 드디어 결혼하는 것. 정아씨는 그의 전 남편 고 길옥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의 팬이라면 누구나 지난 94년에 있었던 ‘길옥윤 이별 콘서트’를 기억할 것이다. 72년, 결혼생활 6년 만에 이혼의 아픔을 겪었던 두 사람은 이날 무대에서 다시 만났다. 길옥윤씨는 암으로 3개월 남짓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때였다. 당시 일본에 머물던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으로 귀국 콘서트를 하고 싶다. 그리고 반드시 패티 김이 함께 출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패티 김 또한 이에 응해 같이 무대에 섰다. 휠체어에 앉은 길씨를 보며 패티 김은 대범한 척 “시시하게 아프고 그러느냐?”며 질책했지만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날 무대에 올랐던 다른 게스트들도, 그리고 시청자들도 결국 모두 울고 말았다.
둘째 카밀라는 올해 드디어 가수로 데뷔, 패티 김의 뒤를 잇게 됐다. 올봄,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나 찍은 가족사진. 패티 김, 남편 게디니씨, 카밀라(사진 왼쪽부터).
이혼한 후에도 음악적 동지로서 유대를 나눴던 두 사람. 길씨와 패티 김은 우리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정아씨는 쭉 그가 맡아 키웠다. 그는 76년 이탈리아인 아르마도 게디니씨(66)와 재혼했고, 둘째딸 카밀라를 얻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게디니씨는 딸 정아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두 딸은 어느 자매보다 우애가 좋았다. 카밀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과 행복이 충만한 가족’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왔던 것.
하지만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게디니씨는 은퇴 이후 보트로 바다를 유랑하고 있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근무하는 정아씨는 늦은 나이에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난민 구호활동을 벌이며 세계를 떠돌았던 것.
전기나 물이 끊기는 일이 잦은 분쟁 지역에서 “며칠 동안 씻지 못해 돼지새끼 같다”는 이메일을 띄워오는 딸은 어머니 패티 김의 마음을 자주 안타깝게 했다. 그런 딸이 이제 같이 난민구호활동을 하던 영국인 크렉씨와 6월 화촉을 밝힐 예정인 것.
지난 4월26일 ‘미주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 할리우드 보울 음악대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던 패티 김과 카밀라는 이곳에서 오랜만에 정아씨와 해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비 신랑 크렉씨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정아씨와 카밀라는 반가움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두 사람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살더라도 항상 기억하자며 발등에 거북이 문신을 나란히 새겨넣기도 한 사이. 때문에 오랜만에 가족과 해후하면서 정아씨가 준비한 선물 또한 거북 모양의 액세서리였다.
“전 일반적인 엄마하고는 달랐던 것 같아요. 공연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도 많았고, 아이들과 같이 있을 시간도 적었죠.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많아요. 하지만 언젠가 아이들도 제 마음을 알아줄 거라 생각해요.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게 올해로 25주기인데, 지금도 우리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물이 나요. 아이들도 언젠가 아이를 키우고 그렇게 되면 알게 되겠죠. 엄마의 마음이 어떤 건지….”
“50주년 기념 공연까지는 거뜬하다”는 그지만 그 또한 세월을 속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노안이 문제다. 돋보기가 없이는 신문도 읽기 힘든 상태. 그는 “세월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정작 내가 늙는 것을 느끼는 것은 노안 때문이 아니다. 내 나이 스물, 서른 시절에는 건방지고 거만했다. 하지만 이제 겸손해지는 나를 느끼면서 늙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세월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딸 정아씨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이제 눈이 침침해 무대 위의 전기선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도 무대 위에 서는 어머니가 혹 발을 잘못디뎌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것. 때문에 예비신랑 크렉씨와 함께 패티 김의 무대를 지켜보던 그는 결국 눈가에 물기를 비치고 말았다.
은퇴 후 요트를 타고 파도 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항해하며 노년을 즐겨왔던 게디니씨는 요즘 딸의 결혼식 준비로 정신이 없다고 한다. 결혼식을 치르기로 한 곳이 전기도 안 들어오는 오지의 섬인지라 전기 설비를 갖추는 일부터 음식을 준비하는 일까지 할 일이 한도 끝도 없는데 그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혹 모를 일이다. 내년 쯤 패티 김이 드디어 할머니가 될 지도. 패티 김은 “생각만으로도 징그럽다”며 폭소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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