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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허심탄회한 대화

영화 ‘그 집 앞’에서 ‘섹스 폭식증’ ‘음식 거식증’ 연기한 이선진&최윤선

“섹시함과 순결 요구하는 이율배반적인 사회가 여성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어요”

■ 글·조득진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 장소협찬·친니

입력 2003.06.03 16:36:00

여성의 식욕과 성욕에 관한 사실적이고 진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 화제다. 이미 몇편의 독립영화로 실력을 인정받은 김진아 감독의 영화 ‘그 집 앞’. ‘섹스 폭식증’과 ‘음식 거식증’이라는 뒤틀린 욕망을 다룬 이 영화의 주인공 이선진·최윤선을 만나 여성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그 집 앞’에서 ‘섹스 폭식증’ ‘음식 거식증’ 연기한 이선진&최윤선

영화 ‘그 집 앞’은 가인과 도희, 두 여자와 희수라는 남자가 등장하는 심리극이다. ‘집에 머무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가인은 거식증을 앓으며 집안에 칩거하는 미국 유학생. 거식증에 걸려 괴로워하는 자신을 감당치 못해 남자친구 희수마저 한국으로 떠나버리자, 허전함에 못 이겨 준이라는 이름의 유부남과 섹스를 한다. 그리곤 더욱 심한 거식증에 빠져든다.
다른 인물 도희는 성적 불감증에 걸린 인물로 준의 아내다. 도희는 남편과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홀로 유럽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와 섹스를 하고,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자 낙태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온다. 임신 뒤 도희는 예전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몸 안에서 성욕이 마구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길 위를 떠도는 여자’라는 이름 그대로 거리를 배회하며 뭇사내들과 몸을 섞는다. 그러던 중 한국으로 돌아온 가인의 남자친구 희수를 만나게 된다. 뜻밖에도 희수는, 도희에게서 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영화를 제작한 김진아 감독은 미국 칼아츠영화학교 재학중, 거식증을 앓는 자신을 찍은 ‘김진아의 비디오일기’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데뷔하면서 화제가 됐던 인물.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며 자폐적으로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던 중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도희’라는 인물을 발견하곤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식욕과 더불어 성욕이 중요한 모티프. 속내를 드러내기가 조금은 버거운 이야기지만 영화의 주인공 도희와 가인 역을 맡았던 이선진(29)·최윤선(25)은 영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20대 여성의 욕망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이선진(이하 이) 어떤 여자든 저마다 성적인 욕구가 있게 마련인데 우리나라에선 그것을 자유롭게 표출하기가 힘든 것 같아. 도희는 그런 기본적인 욕구를 마구 꺼내어 표현하는 여자라고 할 수 있지. 자신의 성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한 후 자기 안의 여자를 느끼게 된 거야.
최윤선(이하 최) 임신 후 도희가 겪는 몸과 정신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남편의 아이가 아닌, 하룻밤 성적 욕망을 푼 남자의 아이라는 죄책감과 밀려오는 성적 욕망 사이에서의 혼돈, 사회적 관념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그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니까.
실제 임신을 하면 갑자기 성욕이 강해지는 여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하지만 대부분 ‘밝힌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쉬쉬’ 감추고 살아간다고 하더라. 임신중에도 얼마든지 섹스를 즐길 수 있는데 말이야.
영화가 개봉되고 나면 논란이 좀 있을 것 같아. 임신한 여자가 자신의 욕망을 못 이겨 처음 만난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부분은 관객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갈 테니까. 그러나 여자의 심리 중엔 분명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해. 영화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저 여자 왜 저래?’ 하면서도 분명 가슴속에 뭔가 뜨거운 것을 느끼는 여자관객도 있을 거야.

임신한 여자의 폭식적 섹스 충격적, 그러나 공감하는 관객 있을 것
영화 ‘그 집 앞’에서 ‘섹스 폭식증’ ‘음식 거식증’ 연기한 이선진&최윤선

영화 ‘그 집 앞’에서 섹스와 음식을 통해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한 배우 이선진(왼쪽)·최윤선.


영화의 줄거리를 들은 사람들은 야한 상상을 하더라고. 도희의 섹스 신을 기대하고 있는 거겠지. 내용은 이 남자 저 남자와 잠을 자는 것이지만 기대처럼 섹스 신은 없잖아.
가인의 경우도 그래. 유부남과의 우연한 섹스, 희수와의 이별 등은 전화의 자동응답장치나 가인의 혼잣말 같은 내레이션으로 처리되거든. ‘그의 집에서 관계를 맺은 건 처음이었어. 그리고 이제 그와는 마지막이야.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는 불감증인 아내를 대신할 여자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나는 그저 네가 떠난 뒤 내 몸을 데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하는 식으로 말야.
사실 오디션을 앞두고 이 영화의 줄거리를 접했을 땐 ‘노출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배우가 노출이 싫어 배역을 포기한다는 것도 웃기고 해서 일단 오디션에 참여했지. 도희라는 인물이 키만 멀쩡하게 크지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적인 매력이 거의 없는 캐릭터잖아. 감독은 일단 내 큰 키가 마음에 들었나봐. 혹시 모르지. 내게 성적 매력이 없어서 뽑은 것일지도, 하하.

영화 ‘그 집 앞’에서 ‘섹스 폭식증’ ‘음식 거식증’ 연기한 이선진&최윤선

모델 출신의 이선진은 이번 작품으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무대 위 화려한 조명도 좋지만 연기를 통해 자신의 다양한 면을 발견하고 있다고.


대학에서 연극무대에 오른 걸 제외하곤 완전 초보인 내가 가인 역할에 발탁된 건 행운이었지. 마지막 오디션에 세명의 지원자가 남았는데 감독은 캐릭터를 위해 약간 통통한 체형을 원하더라고. 맞는 사람이 한명 있긴 했는데, 인상이 너무 강해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어 안되겠다고 하더라. 그 다음 통통한 사람이 바로 나였어.
특이한 것은 시나리오가 대사보다는 지문 위주였다는 거야. 오디션 때 요구사항도 ‘지친 듯한 표정으로 나무에 기대앉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였어. 이런 테스트로 캐스팅 판단이 가능할까 의아했지만 일단 연기를 해봤지. 아니나 다를까. 감독의 표정이 영 아니더라고. 글렀구나 하는 마음에 ‘휴우’하면서 숨을 내쉬는데 ‘바로 그 모습이 도희’라며 좋아하더라.
가인이라는 배역엔 감독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어. 스스로에게 지쳐 우울증에 빠진 모습. 그런데 오디션 당시 내 마음 상태도 그랬어. 하는 일이 죄다 안돼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었거든.
촬영할 때도 감독은 주문을 하기보다는 배우에게 맡기는 스타일이었잖아. 상황만 던져놓고 그냥 찍는 것. 그러다 보니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배우도 모를 정도였지. 일부러 ‘오버’해서 여성의 심리를 연기하기보다는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을 찾으려 한 것 같아.
인물의 심리묘사를 대사가 아닌 행동과 눈빛, 상황으로 보여주려는 거였겠지. 애써 설명하지 않고 관객의 느낌에 맡기는 거 말야.
가장 좋은 연기는 배역에 녹아드는 것이라고 하잖아. 난 촬영을 하면서 여러 곳에서 도희에게 빠져드는 나를 느낄 수 있었어. ‘멍하게 앉아 있다’는 지문이 단순히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잖아. 도희가 거리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살리려고 노력했지. 도희와 똑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거리를 배회하고 많은 사람들 틈에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거든.
혹시 그게 섹스와 관련된 건 아니고?
섹스에 대한 욕구는 솔직히 도희를 이해할 만큼 경험이 많지 않아서, 하하. 대구에서 계속 자라다가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간혹 갈 곳이 없으면 명동거리에 우두커니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어. 명동이라는 곳이 커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잖아. 다 짝지어 다니는데 왜 나만 혼자 이렇게 있을까. 어울리지 못하고 떠 있는 느낌이 들었지.
도희는 처음부터 그런 감정을 가지고 살아온 여자였던 것 같아. 결국 기댈 수 있는 곳은 남편이었는데 그마저도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았으니….
영화촬영 내내 만약 내가 도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난 꽤 현실적이거든. 아마 아기를 지우고,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났을 거야. 물론 우리 사회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타의에 의해 혼자 살게 되더라도 현실을 우선으로 생각했을 거야.
내가 가인이었다면 글쎄…. 도희의 남편과 사랑이 아닌, 외롭고 허전한 몸을 달래기 위해 섹스를 나누는 가인이 안타까웠어. 차라리 그런 상황이라면 그냥 즐기고 지나치면 될 일을 유부남과의 섹스라는 것 때문에 가슴속엔 항상 그의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욕망과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였지.

영화 ‘그 집 앞’에서 ‘섹스 폭식증’ ‘음식 거식증’ 연기한 이선진&최윤선

중앙대 연극과 출신의 최윤선은 다소곳하고 가녀린 외모를 지녔지만 거식증에 걸린 역할을 훌륭하게 잘해냈다는 평이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거식증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도 어떤 뒤틀린 욕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왜 없겠어.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억눌려 있는 게 하나둘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 특히 남자들의 시선에 많이 묶여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예쁜 몸, 내가 풍기는 이미지, 유행에 따라가려는 성향.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배우가 됐는데, 오히려 그것에 더 얽매이게 되는 것 같아.
난 사실 도희보다는 가인에게서 내 모습을 봤어. 거식증까지는 아니지만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이 많았거든. 남들은 ‘뺄 살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모델들 사이에선 다른 모델보다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해. 예전엔 ‘그런 몸으로 쇼 하고 싶으냐’는 선배들의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곤 했지. 조금만 관리를 안해도 살이 붙는 타입이라 아마 좋다는 다이어트는 다 해봤을 거야. 짧은 기간에 효과를 보려고 며칠을 물 한모금 먹지 않은 적도 있어. 거식증까지는 아니어도 우울증을 조금 겪기도 했다니까.
무엇보다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20대 여성의 최대 고민은 섹스인 것 같아. 많이 개방됐다, 처녀가 아니면 어떠냐고 하지만 현실은 안 그렇잖아. 결혼을 위해 욕망을 저당잡힌 사회. 섹스와 결혼이 맞물리는 나이라 더욱 혼란스러운 것 같아. 생각이 깨어 있다고 하는 요즘 신세대들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여자는 처녀였으면’ 하는 바람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남자 자신의 성적 욕망은 여기저기 풀고 다니면서 여자들에겐 조신함을 요구하고 있는 거지.
그런 성적 순결함과 함께 요구되는 게 섹시함이야. 조신함을 요구하면서도 반대로 남자에게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 있는 여자를 요구한다? 너무 이율배반적이지 않니? 더욱 큰 문제는 그 섹시함도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획일화되어 있다는 거야.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개성은 온데간데없고, 영화와 CF 속의 ‘쭉쭉 빵빵’한 여자들만 남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화 ‘그 집 앞’은 여자의 몸과 욕망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어. 여자 감독이 여자 주인공들을 통해 여자들의 심리를 그려내는. 90년대에 개봉했던 영화 ‘301 302’ 같기도 하고 ‘델마와 루이스’ 같기도 한 영화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성급하게 메시지를 주려 하기보다는 그저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더 중심을 둔 것 같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폭로가 될 거라고 생각해.
영화의 끝부분에 가면 도희 혼자 여관에 처량하게 누워 있다가 성욕이 치밀어 자위를 하는 장면이 나와. 영화를 여는 첫 내레이션에서 “난 절대 울지 않는다. 난 눈물이 없다”고 했던 도희는 그때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지. 자위를 하면서 지금까지 억눌렸던 자신의 울분을 다 털어놓는 거야. 감독이 ‘누구에게나 억눌린 욕망이 있다. 네 안의 그것을 끄집어 도희와 함께 위로해봐라’는 주문을 하더군. 오전 11시에 여관에 들어가 밤늦게까지 촬영을 했어. 나중엔 내 감정에 휩싸여 술을 마셔가며 촬영을 해야 했을 정도였지. 힘들었지만 그 장면이 가장 궁금해. 그 장면을 보고 관객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그 촬영을 하고 난 후 비로소 도희에게 애착이 생기더군.
사실 상업적으로 뜰 영화는 아니잖아. 대박이 날 리도 없고. 처음부터 감독은 “외국 영화제에만 출품을 하고 국내에선 개봉을 안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하더군. 첫 스크린 진출인데 나라고 왜 예쁜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겠어. 하지만 ‘내가 살면 배역이 죽는다’는 게 내 신조야. 인상에 남는 배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로 데뷔하는 것은 행운이지.
나도 그래. 이 영화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키 크고, 늘씬하고 ‘옷발’ 잘 받고 활달하고… 등의 고정된 내 이미지를 부수기 위해서야. 몇년 동안 그런 이미지만 보였으니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한 결과지. 그러나 나도 화장을 지우면 촌스럽고 평범하기 그지없거든. 그런 부분을 찾아내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
맞아. 언니나 나나 노메이크업에 출연 의상도 딱 한벌이었지. 그거 생각나? 영화사에서 다른 영화 시사회에 오라고 해서 예쁘게 차리고 갔더니 스태프들이 몰라보던 거. 그 정도면 연기자로서는 성공한 것 아닌가? 난 영화를 찍으며 포장되지 않은 내 안의 욕망을 만날 수 있어서 가장 좋았어. 앞으로는 그런 욕망과 자주 만나며 살고 싶어.

여성동아 2003년 6월 4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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