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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 아줌마의 속 시원~한 수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입력 2003.04.15 10:09:00

만약 몇달 뒤에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낯선 외국에 가서 전혀 다른 이름과 성격의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또 엄마의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엄마와 함께 떠나고 싶다. 고향에 가면 치매에 걸리신 엄마가 잠시라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 친한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싶고 작가 시오노 나나미와 팝가수 마돈나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들어줄게’라는 회사를 만들어 가슴 답답하고 속상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싶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별로 힘든 일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닌가.
얼마든지 여행갈 수 있고 회사를 만들지 않더라도 가까운 친구의 하소연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어줄 수 있다.
오늘 이 순간,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그게 항상 행복하고 잘 늙어가는 방법인 것 같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내가 출연하는 KBS ‘FM 대행진‘의 황정민 아나운서가 그리스로 휴가를 떠났다. 무려 열흘이나. 10년 근속에 따른 포상휴가이긴 하지만 너무 부럽다. 그리스는, 언젠가 반드시 가리라 마음먹었던 곳. 너무 가슴이 두근거려 차마 펼쳐보지 못한 영혼의 러브레터 같은 곳이다. 에메랄드빛을 그대로 보여주는 에게해, 하얀 회벽의 집들, 프랑스에서 먹어본 그리스 정통 꼬치요리 쿠스쿠스, 그윽하고 깊은 눈매와 서늘한 콧날의 그리스 사람들. ‘지중해‘ ‘일요일은 참으세요‘ 등의 영화와 여행전문지 화보에서만 보며 침을 흘리던 곳에 황정민은 룰루랄라, 독신의 자유로움을 과시하며 떠났다.
“회사에 휴가 내고 집에도 말해두고 한 1주일쯤은 충분히 다녀올 수 있지 않아? 못 떠나는 게 아니라 안 떠나는 거라고. 만약 몇달 뒤에 죽는다면 그리스에 안 다녀오겠어?”
한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맞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내가 왜 신문사에서 시달릴 것이며 몇푼 벌어보겠다고 새벽부터 동동거리고 방송국, 신문사, 강의장 등을 다닐 것인가. 곧 죽는다면 내가 왜 명품 핸드백을 못 들어 안달할 것인가. 친구가 한 말에 영감을 받아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한번 생각해봤다. 그리스 여행을 포함해서 말이다.
난 한두달 정도 낯선 외국에 가서 전혀 다른 이름과 성격의 사람으로 혼자 살아보고 싶다. 아주 촌스럽고 평온한 곳에서 말이다. 출근복이 아닌 옷, 섹시한 드레스건 배꼽티건 혹은 꽃무늬 원피스건 평소 못 입어본 옷을 입고, 날짜도 요일도 시간도 헤아리지 않고 오로지 몸이 시키는 대로 먹고, 자고, 걷고, 책을 읽고 낮잠 자고 싶다. 명함을 교환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내가 누구인지 아무런 편견을 안가진 이들과 만나고 싶다.
좀 시간이 나면 엄마를 모시고 엄마의 고향 경남 산청에 다녀오고 싶다. 엄마는 항상 “산청이 얼마나 산이 좋고 물이 맑고 공기가 신선한지” 하며 고향 자랑을 하셨다. 비교적 유복한 소녀시절을 보냈다는 엄마의 고향 마을에 가면 엄마의 정신이 잠시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요즘은 한시간도 차를 탈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지만 기저귀 채우고 링거도 들고 휠체어도 준비해서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보고 싶다. 아직 엄마 친구들이 살아계실지도 모르고, 먼 친척분은 몇분 계시니까.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행복
그 다음은 본격적으로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서 친한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난 먹는 것에 목숨을 걸 만큼 먹기를 좋아하고 식탐도 많지만 이상하게 요리는 잘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맛있고 훌륭한 요리를 만들까가 아니라 그저 대충대충, 빨리빨리 해치워서 적당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만 만들었다. 내 딸 유라에게 “엄마 회사 그만두면 말야,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울 거야”라고 말하자 유라가 펄쩍 뛰며 “엄마, 다른 것도 배울 게 많잖아”라고 말렸지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이웃들에게 최고의 요리를 맛보인 ‘바베트의 만찬‘의 주인공 바베트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정성이 가득 담긴 환상적인 요리를 만들고 싶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어대고 세계 각국의 유명 식당에도 많이 가봤으니 손맛이 아니라 기억을 되새겨서라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 것 같은데 왜 주변 반응이 썰렁한 걸까.

환경보호단체 등에 가입해 자연을 되살리는 운동에도 참여하고 싶다. 아직 기자 신분이어서 특정단체에 가입하거나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없다.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운동도 하고, 강에 가서 쓰레기도 치우고 오수나 폐기물 버리는 회사에 항의 공문도 써보내고.
만나고 싶은 이들도 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작가 시오노 나나미를 만나고 싶다. 자기가 좋아하는 곳, 이탈리아 로마에 살며 자신이 매료된 고대 로마사를 정리한 책을 팔아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도 항상 균형감각을 갖고 살아가는 시오노씨를 로마의 한 카페에서 만나 차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마돈나도 만나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 연출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상스럽기만 하던 80년대 섹시걸에서 이젠 우아하고 고혹적인 중년으로, 두 아이의 엄마로 동화까지 쓰는 마돈나의 열정과 감각을 조금이나마 훔치고 싶다. 그리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추고도 마돈나는 사랑에는 하염없이 약해서 자기를 마구 때리던 폭력남편 숀펜을 아직 잊지 못하고, 열살 어린 남편 가이 리치에게도 쩔쩔 맨다고 한다. 또 잠시라도 사랑을 나눈 남자들에겐 오히려 마돈나가 울면서 매달린다니 “이젠 좀 남자에게 강해지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들어줄게’라는 회사도 만들고 싶다. 가슴 답답하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피눈물이 나는데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자존심 때문에 털어놓기 힘든 사람들. 외롭고 쓸쓸해서 누군가의 따스한 한마디가 그리운 이들을 위해 만든 회사다. 전화를 걸거나 메일을 보내 자기 이야기를 하면 차분히 들어주고, 사연을 읽어주며 진심으로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고 슬픈 존재다. 최고 권력자란 대통령도, 벼락출세한 이들도, 돈이 너무 많아 정확한 자기 재산을 잘 모르는 이들도, 너무 예뻐서 자기 얼굴 보고 매일 깜짝 놀라는 이들도 자기 이야기에 귀기울여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써놓고 보니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어서 놀랐다. 머나먼 곳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곳에는 얼마든지 여행갈 수 있고, 그것도 어려우면 산책이라도 하면 된다. 회사를 만들지 않더라도 가까운 친구의 하소연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어주면 되지 않는가.
화창한 봄날, 마치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인 듯 오늘 이 순간,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그게 항상 행복하고 잘 늙어가는 방법인 것 같다.


여성동아 2003년 4월 4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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