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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사람의 삶

중증장애인과 살며 1년에 약값 7천원 쓰는 이색 ‘돌파리’ 목사 임락경

”자연을 상하게 하지 않는 음식은 사람도 병들게 하지 않아요”

■ 글·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사진·홍승표

2003. 04. 03

유기농 농사꾼,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목사, 책까지 펴낸 민간치료 전문가, 된장공장 운영…. 그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끝이 없다. 평생 소외된 사람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이 시대의 기인 임락경 목사의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지혜를 들어보았다.

중증장애인과 살며 1년에 약값 7천원 쓰는 이색 ‘돌파리’ 목사 임락경

서울에서 경기도 포천, 백운산계곡을 지나 강원도 화천 광덕고개를 넘으면 광덕주유소가 보이고 헌병검문소가 나온다. 헌병의 수신호를 받아 좌회전을 해서 들어서면 왼쪽에 돌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엉성한 것 같으면서도 멋스럽게 지어진 2층 돌집은 인근에 있는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랑, 주황 지붕의 집들과는 전혀 달라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실개천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면 대문도 담도 없는 돌집이 맨몸으로 낯선 이방인을 맞이하고, 차 소리에 잠이 깬 개 두 마리가 슬쩍 고개를 들어 보더니 이내 하품을 하며 제자리로 돌아가 눕는다. 이곳이 바로 임락경 목사(59)와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시골교회’다.
‘수군수군’ 사람 소리가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임목사와 이곳 식구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듣고 있으니 지금 건물이 지은 지 20년이 넘어 새로 짓기 위한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임목사에게 기자의 명함을 주자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찾더니 복사용지 이면지를 잘라놓은 것 같은 종이쪼가리 한장을 건넨다. ‘촌놈 임락경’이라고 씌어 있는 그의 명함이다.
이곳에서 벌써 20년 넘게 중증장애인 30명이 임목사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세살배기 아기처럼 임목사에게 들러붙어 얼굴을 비비고 살갗을 맞대는 스물셋의 정신지체장애인 여성은 그가 다섯살 때부터 데려다 기른 딸이라 한다.
중증장애인이 30명이면 혼자 돌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함께 도와주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를 묻자 임목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자들은 자꾸 장애인이 몇명이고, 봉사자가 몇명이고 하는 식으로 구분을 지어 물어보는데, 그게 가장 기분이 나빠요. 저희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함께 살고 싶으면 사는 거고 함께 살면 한 식구니까 서로 도우며 사는 거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우린 봉사를 하겠다고 오는 사람은 아예 받지도 않아요.”
그는 처음부터 장애인 시설로 시골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내다보니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장애인이 많아졌을 뿐이라는 것. 그래서 30명이면 장애인시설로 등록을 해 정부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다.
여느 복지시설 같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가야 하는 장애인들 때문에 병원을 오가는 승합차와 운전기사를 따로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곳엔 다운증후군과 정신지체·지체장애 등 중증장애인이 대부분이지만, 몇 년째 병원에 간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한다. 한해 평균 약값이 회충약을 사는 데 쓴 7천원이 고작. 이곳에서 1년만 지내면 아픈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23년간 초상을 딱 세번 치렀다. 97세 되신 할머니가 노환으로 사망했고, 몇해 전 8년간 간질 앓던 사람이 사망했다. 그리고 작년에 한명이 산에서 실족사를 했다.
“제초제를 먹고 쓰러져서 몸이 마비된 분이었어요. 병원에서도 포기했는데 우리집으로 와서 십몇년을 살았죠. 건강도 많이 회복해 다리를 절기는 했지만 자기 집에도 곧잘 찾아가곤 했어요. 그날도 보이지 않아 자기 집에 간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산에서 발견이 되었어요. 평소 산에 가지 않아서 거기까진 살펴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더라고요.”
그동안 초상 세번밖에 안 치렀다는 건 그만큼 식구들이 건강하다는 얘기다. 직접 본 식구들의 피부도 웬만한 처녀들보다 뽀얗고 예뻤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는 공장 근처에 간 물건들은 아예 안 먹고 안 쓴다. 비누도 만들어 쓰고 이도 소금으로 닦는다. 식용유도 안 쓴다. 물론 라면이나 과자도 먹지 않는다.
음식은 쌀만 인근 유기농가에서 가져올 뿐 식탁에 오른 밥 속의 잡곡들과 배추, 무, 당근, 감자, 콩나물 등 채소들과 양념들은 모두 이곳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산물들이다. 간식도 직접 생산한 달걀과 꿀 등을 먹는다.
“시장에 안 가려고 하다보니까 정육점에도 안 가야 하더라고요. 또 설거지물을 그냥 버려 물을 오염시키면 안되겠다 싶어서 돼지를 길렀죠. 그래서 잡아먹기도 하고…. 또 사람이 채소로만 살 수는 없으니까 달걀을 얻기 위해 닭을 기르고, 오리농사를 하던 사람이 버리게 된 오리를 주어서 기르다 먹기도 하고, 가끔 약으로 쓰려고 사슴도 몇 마리 길러요. 물론 짐승도 전부 유기농으로 기르죠.”

중증장애인과 살며 1년에 약값 7천원 쓰는 이색 ‘돌파리’ 목사 임락경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서로 도우며 어울려 살아가는 시골교회 사람들.


이렇게 살고 있으니 당연히 몸도, 자연도 망가진 곳이 있을 리 없다. 정신지체 장애인 연수씨(28)는 4년 전 이곳에 처음 올 때만 해도 관절염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고도 이런 식생활만으로 지금은 닭모이를 주며 임목사를 도울 만큼 건강해졌다. 온갖 치료를 받아도 악화되던 간경화로 고생하다 이곳에 온 고선주씨(42)는 하루 종일 토하기만 해 제발 물이라도 마셔 갈증이나마 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2개월 만에 구토가 그치고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명이 짧다고 알려진 다운증후군, 뇌성마비, 정신지체들도 이곳에선 예외다. 유아 때 들어와 이곳에서 자란 정신지체 장애인 태은(24)·진경씨(28), 온 지 9년 된 다운증후군을 앓는 원석(32)·봉수씨(33)는 오히려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옛날에는 못 먹어 생긴 병이 많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너무 먹어 생긴 병이 많아요. 체하면 며칠 굶으면 나을 것을, 소화제 먹고 위장약 먹고…. 쓸데없는 일이죠. 조금씩 덜 먹어도 돼요. 우리 식구들을 잘 봐요. 뚱뚱이도 홀쭉이도 없어요. 정신장애인들은 자칫 너무 많이 먹거나 혹은 너무 안 먹거나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집 식구들은 그렇지 않죠. 고루 건강해요.”
음식이 약이 되고 약이 곧 음식이라는 그의 철학은 민간요법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재작년 자신의 민간요법 노하우를 담은 <돌파리 잔소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책에는 물과 녹두, 미나리 같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으로 갖가지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원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집에는 마을 주민이나 지인들로부터 식중독이나 체했다며 치료법을 묻는 전화가 하루에도 여러통씩 걸려온다.
그가 민간요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관련이 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는 60년대 내내 이현필 선생이 운영하는 결핵환자촌인 무등산 동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당시 돈이 없어 환자들을 병원에 데려갈 수 없으니까 민간에서 내려오는 요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경험담을 귀담아 들었다가 활용하곤 했다.
“70년대가 되니까 결핵환자가 없어져요. 왜 그런가 했더니 결핵은 못 먹어서 생긴 병인데 잘 먹게 되면서 결핵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경기도로 와서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실직자들과 함께 살았어요. 그러다 80년에 이곳으로 왔는데 하나둘 장애인이 늘더니 어느날 보니까 이렇게 장애인과 살고 있더군요.”
그는 일제시대에는 나병, 60년대에는 결핵, 70년대에는 정신지체, 90년대에는 암이 가장 큰 병이었다면 지금은 아토피성피부염이라고 단정한다.
“강남에 사는 어린이 1백%가 아토피성피부염을 앓아요. 서울 사대문 안은 50%, 서울 변두리는 20%, 서울 근교는 10%, 시골은 1%예요. 그 1%는 외부에서 온 사람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아토피성피부염은 오염된 음식과 오염된 환경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자연식을 하고 환경을 바꾸면 고쳐지죠. 제가 지금 감리교 교육원에서 아토피 관련 강의를 하고 있는데 3일 동안 합숙을 시켜요. 그래야 식습관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그는 음식뿐 아니라 환경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돌과 나무의 중요성을 이따금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고. 시골교회는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데도 장애인 시설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가 적다. 모두 나무 덕분이라고 한다.
“돌이 물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나무가 냄새를 정화시킨다는 것은 이곳에 와서 알았어요. 사람이 죽으면 냄새가 심한데 제초제를 먹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이상하게 냄새가 덜하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방안에 놓인 커다란 나무 책상 때문이었어요. 나무가 냄새를 흡수한 거죠. 그래서 이번에 집을 새로 지을 때는 돌은 물론 나무도 많이 넣으려고 해요.”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 하루하루가 코미디 보는 것처럼 즐거워”
그는 민간요법뿐 아니라 집터와 수맥도 본다. 수맥은 완전히 경험으로만 알게 됐다. 물론 이치는 배웠지만 나머지는 홀로 터득했다. 요즘도 그는 종종 수맥을 봐달라는 사람들의 부름을 받고 먼길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온천수는 절대 보지 않는다고 한다. 전에 온천수 몇개를 봐주었다가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온천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되더라고요. 평화롭던 마을이 황폐해졌어요. 주민들은 고향을 잃고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죄다 때밀이나 주차관리원이 되어 살고 있어요. 마을 개울엔 물이 마르고 오염만 되더라고요. 이제는 마을 공동우물을 찾아주거나 정신병원 같은 곳에서 부탁할 때에만 일을 해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앞으로 교육문제와 병원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두 가지 문제를 내가 해결해보겠다고 결심을 했죠. 지금까진 거의 해결한 셈이에요.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병원에 안 가도 되니까 병원문제는 해결한 셈이고, 학교는 안 다녔어도 제가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읽는 신문과 잡지에 실리고 또 제 강의를 들으러 오기도 하니까요(웃음).”
말이 나온 김에 목사라고 불리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인가를 받지 않은 신학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그가 신학을 공부할 때만 해도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이 드물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야매로 된 거죠(웃음). 그래서 작년에 기독교방송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소속이 어디냐고 물어보길래 그랬죠, ‘대한 예수 팔아 장사해’라고(웃음). 그래도 방송국이나 제게 욕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30명이나 되는 중증장애인들을 돌보고, 5천평의 밭에서 43종의 채소를 기르고, 가축을 기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듯한데 마당엔 양봉단지가 널려 있는가 하면 된장과 간장을 제조하는 공장도 운영하고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저도 어떻게 해서 그 일들을 다 하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이것저것 움직이긴 한 것 같은데 특별히 뭘 했는지 생각나는 것도 없어요(웃음). 물론 저 혼자 이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니고 서로서로 도와가며 하는 것이죠.”
시골교회엔 임목사 이외에도 현재 장애가 없는 식구가 몇명 있다. 임목사와 함께 직접 돌을 날라가며 집을 짓고, 지금까지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이애리 원장(47), 임목사의 딸 달래씨(22), 그리고 대학시절 봉사활동을 왔다가 이곳 분위기에 반해 결혼한 후에도 함께 살고 있는 한선애씨(37), 또 노인이지만 부지런하게 일손을 거드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의 도움이 크죠. 중풍으로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식구들 관리는 다 해주세요. 두 시간마다 소변을 누는 사람, 오후 3시면 대변을 보는 사람 등을 다 기억해두었다 시간이 되면 알려주시죠. 심지어 누가 물을 얼마만큼 마셨으니까 소변을 언제 눌 것이라는 것까지 체크를 해요. 그분이 아니면 제가 그걸 다 신경 써야 하는데, 그럼 다른 일은 못하죠.”
뿐만 아니라 같은 장애인들끼리도 증세가 덜한 사람이 더 심한 사람에게 밥 먹여주고 씻겨준다. 저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우며 사는 셈이다.
“식구들과 함께 사는 게 매일 코미디예요. 그래서 웃다가 하루가 가죠. 양파를 가지고 오라고 하면 당근을 가지고 오고. 당근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고추를 뽑아오고….”
”음식은 유기농사 지어 자급자족 그외 생활비는 양봉과 된장 팔아 마련”
이웃 주민들의 도움도 큰 힘이 된다. 밖에서 보면 장애인 시설처럼 보여 반발이 심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너나 없이 달려와 불을 꺼주고, 쌀을 걷어 도와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곳 화천군 사창리는 임목사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유기농사를 지어 마을 초등학교의 급식을 전부 유기농으로 공급할 정도로 환경에 대한 의식이 높다.
“마을 사람들도 저처럼 바보인가봐요. 그렇지 않고는 제가 유기농을 짓는 것을 보곤 가르쳐달라고 할 리가 없잖아요(웃음).”
그는 10년 전부터 공장을 차려 유기농콩을 사용해 전통방식으로 만든 메주를 이용해 간장과 된장을 만들어 팔고 있다. 그렇다고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문을 듣고 주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택배로 보내주는 식이다.
“먹을 것 우리가 재배해 먹고, 헌옷 입고, 집도 직접 지어서 사니까 돈이 안들 것 같지만 그래도 나가는 게 쏠쏠해요. 양봉과 된장 팔아 번 돈이 요긴하게 쓰이죠. 그렇다고 크게 할 생각은 없어요. 몸이 따라줄 수 없으면 안되잖아요.”
이젠 나이가 든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너무 몸을 혹사한 것일까. 그는 지난해 8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다고 한다. 몸 상태를 보곤 의사가 99% 폐암이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다행히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며 웃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평생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살고, 남이 걷지 않은 길을 걷다보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의 삶은 단순히 사명감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내 자식 같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제 곁에 이들이 있으니까 함께 사는 것이고, 환경을 소중히 해야 하니까 유기농을 하는 것뿐이죠. 그리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아요. 농땡이도 부리고 쉬엄쉬엄 하는 걸요(웃음).”
그의 환한 웃음이 봄햇살만큼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시골교회 033-441-4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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