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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주 특별한 요리 사랑

연봉1억원 받는 美은행원 포기하고 연봉2천5백만원의 요리사 된 장정은

■ 기획·이지은 기자(smiley@donga.com) ■글·조희숙 ■ 사진·최문갑 기자

2003. 04. 03

청담동 샌드위치 전문점 ‘더 카페(The Cafe)’의 수석주방장 장정은씨. 고액 연봉이 보장된 ‘빵빵한’ 직장을 마다하고 요리사로 변신한 그는 전업 4년 만에 수석주방장 자리에 오른 신세대 요리사다. 연봉 1억원과 바꿀 수 없는 그의 이색만족 스토리를 들어본다.

연봉1억원 받는 美은행원 포기하고 연봉2천5백만원의 요리사 된 장정은

“하루 종일 불편한 정장을 입고 딱딱한 책상 앞에 앉아서 일하는 게 재미없어졌어요. 그러다 갑자기 ‘요리를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근처 레스토랑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미국 10대 은행에 꼽히는 버지니아주의 선트러스트 은행 본사 대부계 직원이었던 장정은씨(30). 4년 전 그가 쾌적한 근무환경과 1억원의 고액연봉, 퇴근시간 동료들과 어울려 마시던 시원한 맥주 한잔의 여유까지 뿌리치고 나온 이유는 단순히 “요리가 하고 싶어서”였다.
요리수업을 받기 위해 그가 처음 선택한 곳은 지역신문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간 한 그리스 식당.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신출내기 견습생의 의욕은 흔쾌히 받아들여졌지만 주방 안에서의 도제수업은 한마디로 ‘하드 트레이닝’이었다. 단번에 시급 6달러짜리 주방보조원으로 전락(?)한 그는, 컴퓨터가 아닌 도마 앞에서 하루 몇시간 동안 고기만 두드리는 단순한 작업도 “제대로 하라”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
“식당 주인이 주방장도 겸하고 있었는데 굉장히 다혈질인 사람이었어요. 처음엔 주방에서 프라이팬이 날아다니고 욕설이 오가는 것이 너무 놀라웠지만 나중엔 익숙해지더라고요. 그만둘 때 그 다혈질 주인이 저한테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해줘서 참 기분이 좋았죠.”
8개월간의 실전 경험을 쌓은 그는 현지 커뮤니티 컬리지(전문대학)에 다니며 체계적인 요리수업을 받았다. 학교 다니는 틈틈이 현지 식당에서 실무도 병행하며 요리사로서 자격을 갖춰갔다. 그후 2001년 9월 귀국한 그는 힐튼호텔에서 무보수로 주방생활을 시작해 무교동 파이낸스센터의 이탈리아 식당을 거쳐 지금의 청담동 샌드위치 전문점 ‘더 카페’의 수석주방장 자리로 옮기게 됐다.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주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어릴 때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샌드위치를 먹어봤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이곳(현 직장)이 아니었다면 길거리라도 나가서 팔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았던 거죠.”
그가 요리사가 된 배경에는 여러 나라를 돌며 생활했던 성장환경이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현직 대사인 아버지를 따라 그와 가족들은 한국보다 주로 외국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다. 미국, 캐나다, 태국, 스페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23년 동안 타국생활을 한 그는 초등학교 여섯군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각각 두군데씩 옮겨다녀야 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 그곳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특히 현지의 다양한 음식들을 접하면서 요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것 같아요.”
3남매 중 맏딸인 그는 평소 자립심과 독립심이 강한 편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요리를 시작한 것도 부모님과 ‘상의’했다기보다 ‘통보’에 가까웠고, 물론 부모님의 반대는 매우 완강했다.
“지난 설날에 가족들에게 프랑스식 갈비찜을 만들어 드렸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지금은 제 직업을 인정해 주시는 편이지만 처음에는 ‘안된다’며 단호하게 반대하셨어요. 특히 아버지는 보수적인 편이라 지금도 딸이 요리사라는 얘기는 밖에서 안하세요.”

연봉1억원 받는 美은행원 포기하고 연봉2천5백만원의 요리사 된 장정은

그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접하다 보니 요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고 말한다.


요리사로 전업한 지 올해 4년째. 짧은 시간 안에 주방장으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르는 것은 묻고 안되면 될 때까지 해내고 마는 근성이 비결이었다. 오래 신어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신고 다닐 정도로 털털하지만 일할 때는 주변에서 말을 붙이지 못할 만큼 무섭게 일에 집중하는 편이다. 이는 대학시절 미국 유수의 은행에 스카우트된 엘리트였지만 주방 안에서 그의 이력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탓이다. 그래서 주방보조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메뉴를 주문 받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간단한 아침 세트 메뉴였지만 내손으로 만든 음식이 손님 앞에 나간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어요. 가끔 계산하던 손님이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을 때는 정말 뿌듯했어요. 지금도 ‘맛있다’는 칭찬보다 ‘어떻게 만들었냐’는 질문이 제겐 최고의 칭찬이에요.”
그가 현재 주방장으로 있는 식당은 각국의 스타일에 맞는 퓨전 샌드위치 전문점. 그가 개발한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동남아식 샌드위치와 이스라엘 전통 콩을 갈아 넣은 중동식 샌드위치가 인기 메뉴. 그의 요리 비법 중 하나는 계량스푼이나 컵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손맛에 있다.
“처음 요리를 배울 때부터 계량컵은 써보지 않았어요. 서양 사람들도 우리나라에서처럼 손으로 재료를 섞고 직접 맛을 보며 ‘간’을 하는 손맛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가장 맛있는 요리는 먹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요리라고 생각해요.”
퓨전식 서양요리 전문가이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식탁은 제대로 못 챙길 때가 더 많다.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주방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끼니는 대부분 인근 식당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게다가 주요 선택 메뉴도 뜻밖에 설렁탕이나 삼계탕에 김치란다.
“한국사람이라서 그런지 한식이 제일 좋더라고요.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서울 시내 맛집도 찾아다니며 먹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제일 안타까워요. 가끔은 식당 선택을 잘못해 음식 맛에 실망할 때도 있지만 불평은 못하겠더라고요.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제가 잘 알잖아요.”
현재 장정은씨의 연봉은 2천5백만원선으로 예전의 4분의 1 수준. 하지만 그는 “아직 요리를 선택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고 말한다. 그의 모습을 보니 삶의 즐거움과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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