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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수집가’ 조희봉씨가 들려준 헌책방 순례의 숨겨진 즐거움

“헌책을 읽는다는 건 빠른 속도의 시대, 거꾸로 사는 재미를 누리는 일이죠”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3.03.04 15:14:00

조희봉씨는 10여년 동안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헌책을 구입해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책값이 싸기 때문에? 그 답을 알려면 그가 펴낸 책 ‘전작주의자의 꿈’을 읽어볼 일이다. 초판본, 절판본, 고서와 희귀본….
‘헌책 수집가’들의 구입 리스트들에는 이런 목록들이 올라가 있다고 하는데… 조씨가 털어놓은 ‘헌책 수집가’로서 살아가기, 그 낯선 즐거움에 대하여.
‘헌책 수집가’ 조희봉씨가 들려준  헌책방 순례의 숨겨진 즐거움

클릭 몇번이면 인터넷으로 책을 살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발품 팔아 헌책방만을 순례하며 책을 사 모으는 아날로그적인 삶의 주인공이 있다. ‘헌책 수집가’이자 평범한 회사원인 조희봉씨(33)가 그 주인공.
대학교 때부터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4천여권의 책을 헌 책방에서 ‘구제’해왔던 그가 ‘전작주의자의 꿈’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헌책방과 헌책을 통해 ‘세상 건너는 법’을 익혔노라 자부하는 조씨가 이제 와서야 조심스레 고백하는 ‘연애편지’이며(당연히 그 수신자는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이다),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풀어낸 ‘독서일기’이자 책과 함께해온 자신을 돌이켜보는 ‘자기고백적 에세이’다.
조씨가 책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즐겼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의 집에는 늘 책이 넘쳐났다. 그가 어느 정도로 독서광인가 하는 것은 식습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국 없이는 밥을 먹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빨리 밥 먹고 책을 읽기 위한 욕심으로 국에 말아서 후딱 먹어치우는 버릇을 들인 탓이라나.
그런 그가 헌책방에 다니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부터. 한달에 평균 20~30권의 책을 사 모았다고 한다. 왜 굳이 헌책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헌책방에서는 대부분의 책을 반값에 살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에요. 일반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 보물도 헌책방에는 있어요. 나온 지 얼마 안돼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장되어버린 책들, 희귀한 책들이 숨겨져 있어요. 그걸 발견하는 재미가 가장 크죠. 무엇보다 헌책을 사 모으는 가장 큰 이유는 숨어있는 세상의 반쪽을 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빠르게 살아가는 세상의 속도를 거스르며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는, 거꾸로 사는 재미가 거기엔 숨어 있죠.”
비록 ‘헌책’이라고 하지만, 집의 책꽂이에 빼곡하게 꼽힌 그의 책들은 ‘새책’이나 진배없다. 살살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이 닦아낸 후 아세테이트지로 커버까지 씌우는 수고로움을 그가 감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전에는 일일이 라벨을 붙이고 분류까지 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정도로 ‘까탈’을 부리진 않지만, 책을 읽다 말고 책장 끄트머리를 접어서 읽은 곳을 표시하거나 아무렇게나 책을 펼쳐서 뒤집어 놔두거나, 심지어 책 겉장을 확 제껴 읽거나 하는 행동은 그를 기겁하게 만든다. 물론 책의 외형을 훼손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책 사랑법’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읽다가 중요한 대목이 나오면 색연필로 살짝 밑줄 그어가며 읽는 건 용인(?)한다.
이런 책사랑도 유별나지만, 조씨가 ‘책 수집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끌어들인 개념은 더 독특하다. ‘전작주의(全作主義).’ 그의 설명을 빌리자면 전작주의란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모으고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해냄으로써 그 작가와 작품세계를 온전히 자기의 세계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를 ‘전작주의’로 이끈 건 소설가 이윤기씨다. 이윤기의 소설 ‘하늘의 문’이 그를 ‘전작주의’로 이끌었다. “종교소설인가 싶으면 성장소설이고, 또 연애소설이기도 한” ‘하늘의 문’에 반해 무려 5번이나 통독한 그는 ‘장미의 이름’과 같은, 이윤기가 번역한 책을 포함해서 이윤기의 모든 저작을 찾아 읽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모은 이윤기의 책은 소설, 기타 번역서 포함 모두 합쳐 72종 92권에 이른다. 심지어 그 책 중에는 저자인 이윤기 본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책들이 포함돼 있다. 그렇게 시작된 이윤기와의 인연은 그가 결혼식 주례를 이씨에게 부탁함에 따라 ‘진짜배기’가 됐다.
“그간에 이윤기 선생님과는 일면식도 없었죠. 저 혼자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분이기에 용기를 내서 편지를 썼어요. 이제껏 모은 선생님의 책 90여권을 찍은 사진과 저를 소개하는 편지를 원고지 10매 분량으로 써서 부쳤죠. 그러고 흔쾌한 승락을 받았습니다.”
제자를 키우지 않겠노라 공언했던 이씨지만 조씨의 열정에 감복해 그를 ‘1호 제자’로 공인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책이 길이 되고 삶이 되는 아름다운 ‘기적’인 셈이다.
“‘전작주의’란 일종의 적극적 독자운동일 거예요. 이윤기 선생님께선 역으로 이런 말씀도 해주셨어요. ‘작가가 멈추면 전작주의자도 멈추는 것이다. 그러니 ‘이윤기’에만 갇혀있어선 곤란하다. 빨리 치고 빠져라’라고….”
이윤기말고도 그가 ‘전작’에 도전하고 있는 인물은 안정효, 김우창, 고종석 등이 있다. 그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당대의 치열함과 진정성을 견지한 작품활동을 해온 인생의 스승들’이라는 개념을 갖고 작가에게 접근해왔고 위의 인물들은 충분히 그 자격에 합당한 작가들이라고. 요즘은 ‘생의 이면’의 이승우와 소설가 김원일 등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헌책 수집가’ 조희봉씨가 들려준  헌책방 순례의 숨겨진 즐거움

헌 책방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건 ‘보물찾기’의 즐거움이 있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유려한 문체는 물론이고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정치하고도 해박한 분석, 동시대의 글쟁이들에 대한 평점 등 다양한 지식들에 놀라게 된다. “열독가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게 책 수집가의 운명”이라며 스스로 ‘책 수집가’일 뿐이라고 겸손해하지만, 열독가로서 그의 내공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 놀라움은 그의 이력을 읽고 나면 더욱 커진다.
70년 화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80년대 후반에 대학에 다녔다. 학생운동이나 사회에 대한 고민과 관심도 고만고만했던 그는 졸업 후 한 중견기업에 취직해 6년을 근무했다. 정말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력이지만 그런 그를 특별하게 만든 건 사회에 나가서도 ‘인문학적 관심’을 잃지 않았던 점일 터다.
회사원으로 살면서도 인문학적 관심은 버리지 않았던 별난 젊은이
“제가 그 시절에 대한 고민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해서, 제가 대단한 운동가이거나 한 건 아니에요. 평범한 제가 평범치 않다면, 그건 그때 그 정서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일 거예요. 회사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앞으로 대리 과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그런 경쟁 속에 지금처럼 몽상가로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거죠.”
3월초쯤 그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간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직장을 구한 그는 “좀더 느긋이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될 것 같다”고 행복해한다. 너나없이 더 많은 수입,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지위를 향해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그저 책을 좀더 많이 읽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가치관에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분명 별나 보인다. 이런 그를 아내는 어떻게 생각할까.
“제 여자친구(그는 ‘아내’를 이렇게 부른다)는 회사 그만두고 내려가고 싶다는 제 결심을 누구보다 선선히 받아들여줬어요. 물론 책 수집하느라 열심인 것도 이해해주죠. 그래도 책을 늘 깨끗하게 정리하려고 노력해요. 그래야 앞으로도 눈총받지 않을 테니까요(웃음).”
사실, 책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던 그가 나름대로 활동 방향을 잡고, 또 책까지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인터넷 헌책 동호회와의 만남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2년 동안 마스터 노릇을 하기도 했던 프리챌 헌책 동호회 ‘숨어있는 책’은 헌책과 헌책방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사랑방’이다. 조씨는 이곳에서 자신만큼이나 헌책 ‘사냥’하기를 즐기는 ‘마니아’들과 만났고, 소중한 교류를 나누게 됐다. ‘전작주의’니 하는 개념도 동호회 내에서는 일찍이 화제가 되었던 ‘화두’. 책의 많은 부분이 동호회 게시판에 올렸던 글들이기도 하다.
“보통 ‘마니아’에 대해서 현학적이거나 지식 소비적이라고들 하잖아요. 앞서의 마니아가 ‘닫힌 마니아’라면, 우리들은 ‘열린 마니아’라고 생각해요. 실제 전 동호회 활동을 하기 전만 해도 SF소설은 읽지 않았어요. 하지만 SF소설 마니아 친구들을 보면서 제 생각을 수정하게 됐죠. 서로가 서로의 ‘전작’의 대상을 인정해주고 교류하면서 관심영역이 넒어지고 성장하는 걸 느껴요.”
그는 이번에 자신의 책이 화제가 되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 ‘헌책 수집가’로서 뿌듯하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헌책이나 헌책방에 대한 선입견이나 오해를 벗긴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헌책 사랑’을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로 이해해주면 더욱 좋겠다고 기대를 걸어본다.
“헌책방이 시대의 조류일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희망은 있어요. 헌책 수집가 중에는 절판됐지만 가치 있는 책을 찾는 이들이 많아요. 이런 수요가 많아지면 출판사 측에서 재발간을 결정할 수도 있는 거죠. 그만큼 가치 있는 움직임이라 생각해요.”
그의 책을 읽고 나면 고색창연하고 지저분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한번쯤 헌책방을 찾아나서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는 ‘실제적 수집가’외에 이런 ‘잠재적 수집가’들을 위해 ‘헌책방의 메카’ 청계천을 비롯해 ‘책상은 책상이다’ 등 서울대 앞 헌책방들, 지하철 5호선 학여울역 부근의 ‘책 창고’ 등 각종 헌 책방에 대한 정보는 물론 ‘훈민정음(http://www.hunmin.co.kr)’과 같은 온라인 헌책방 등에 대한 정보까지 망라해 두었다.
YMCA 인터넷 신문 Y-TIMES에 독서 칼럼을 연재중이기도 한 조희봉씨. 서른두해 동안 잘 영근 그의 책 사랑이 참으로 보기 좋다.

여성동아 2003년 3월 4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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