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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디쓴 인생살이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시인 유안진

“이제는 교수 직 떠나 오로지 시만 쓰며 살고 싶습니다”

■ 글·박상건(시인, 문화선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교수) ■ 사진·김성남 기자

입력 2003.03.04 14:53:00

‘단아한 내적 아름다움의 시인’이라 칭송받아온 유안진 시인은 알고 보면 누구보다 인생살이의 온갖 신산을 겪은 주인공이다. 안동 양반가의 딸로 태어나 홀로 외지생활을 해야 했던 유년기와 지독한 가난, 병고에 시달렸던 지난 세월들. 이제 예순을 훌쩍 넘긴 그는 자신을 등단시킨 문학적 스승 박목월을 떠올리며 “시만 쓰며 살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쓰디쓴 인생살이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시인 유안진

유안진 시인은 안동 양반가의 장녀로 태어났으나 줄줄이 이어진 남동생의 죽음으로 홀로 외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유안진 시인(62). 그가 변신을 꿈꾸고 있다. 시인, 수필가,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이제는 교수직도 버리고 오로지 ‘시인’으로만 살아가고 싶다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그는 시인, 수필가로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내놓은 저력의 작가다. 아직도 많은 독자들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을 주실 때는 언제나 고난의 보자기를 주십니다’와 같은 그의 문장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수필을 내놓는 바람에 ‘다작’이니 ‘센티멘털리즘에 치우친 상업적인 글’이니, 하는 비판 역시 쏟아진 것이 사실이다. 워낙 많은 글을 양산하다 보니 심지어 이 책에서 쓴 글과 저 책에서 쓴 글이 다르기도 했다. 예컨대 어느 책에서는 전문직 여성이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느 책에서는 주부야말로 보람 있다는 식이다. 그런 비판에 대해 유안진 시인은 “청탁을 거절 못해 쓰다 보면 한입으로 상반된 얘길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서 쓴 적은 없다. 상반된 내용도 제각기 진실은 있는 것 아닌가”하고 반문한다.
때론 매서운 비난에 “베스트셀러가 뭐가 나쁘냐”고 강하게 반문하기도 하지만, 그 반문 뒤에는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는 눈물겨운 고백이 숨겨져 있다.
유안진 시인은 안동 무실 유씨로 양반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고향인 안동 임동면 용계마을은 여성의 절개와 남성의 의기가 깃든 곳으로 예로부터 유명했다. 남편상을 당하자 손수 삭발하고, 3년간 시묘를 마친 뒤 단식 끝에 자결했다는 젊은 아내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고향 주변에는 수두룩했다. 진사에 급제했던 그의 증조부는 기미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군 총에 맞아 돌아가셨을 만큼 성품이 대쪽 같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유로우면서도 마음의 법도를 중시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자 어른들은 한시를 읊거나 사서를 읽고, 아낙네들은 내방가사를 짓는 분위기에 젖어 살았다. 봄 가을이면 마을에 시회(詩會·백일장)가 열렸고 기량이 뛰어난 작품을 가려 시상도 했다. 남자에게는 통영갓, 아낙네들에게는 버선과 적삼이 시상품으로 주어졌다.
정든 고향. 그러나 그는 열네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였고 거기엔 가슴 아픈 가족사가 숨어있다. 그에게는 남동생이 셋 있었는데 채 자라지도 못한 채 모두 죽었다. 문중에서는 딸을 낯선 외지로 내보내 설움과 푸대접을 받는 액땜을 치르지 않으면, 대가 끊길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의 부모는 어린 딸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부친은 주위로부터 새장가를 들어야 한다는 부추김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딸은 외지로 보낸 채, 교회로 산사로 점집을 돌며 자식을 점지해달라 애원해야 했다고 한다.
양반가라고는 해도 넉넉지 않은 형편 에 낯선 곳에서 사춘기를 맞이한 소녀 유안진은 책을 읽으며 외로움을 잊었다. 이내 ‘문학 열병’에 빠졌다. 헌 책방에서 권당 2환씩 주고 빌린 김래성, 방인근, 정비석의 연애소설이나 이광수의 ‘흙’ ‘무정’ 등을 읽었다. 당시 일기에는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띄우는 편지가 가득했다.
고교 백일장에서 만난 박목월 선생과 각별한 인연
‘시인’을 꿈꾸던 중학교 2학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문예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준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의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이 구절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왜 순서가 ‘봄·여름·가을’이 아니에요?”라는 깜찍한 질문을 던졌고, 당황한 선생님은 “야, 소월이 그렇게 쓰면 쓴 거지. 웬 말이 그리 많어?”라고 그를 윽박질렀다. 그때부터 그는 ‘소심증’에 빠졌다고 했다.
학창 시절은 늘 궁핍했다. 여고시절 3년 내내 미용실에 머리 맡기는 비용이 아까워 손수 가위로 머리를 다듬곤 했던 그였다. 소풍 가는 비용도 아까워했던 그는 소풍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책을 사 읽었다.
고교 2년생일 때 백일장에서 만난 박목월 시인이 그의 ‘문학적 스승’이다. 그의 시를 칭찬해준 박목월 선생을 잊지 못했던 유시인은 61년 서울대 교육심리학과에 입학한 후 편지를 부쳤다. 시간이 흐른 후 “한양대로 놀러오게”라는 목월 선생의 짤막한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목월 선생을 만나러 한양대로 가는 길목엔 찔레꽃들이 유난히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 길을 유시인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고.

쓰디쓴 인생살이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시인 유안진

“한양대로 가는 길에 흰 찔레꽃에 야생벌이 잉잉거리는 모습이 참 기분 좋았어요. 당시 선생님이 40대이셨는데 참 순후하시고 어진 분이었어요. 마음속으로 선생님이 안 계시면 어쩌나,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며 가슴 졸였죠. 그만큼 제가 수줍어했거든요. 선생님은 객지에서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으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시작 노트는 끝내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제 스스로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설렁탕 사건’도 잊을 수 없다. 박목월 선생은 그를 데리고 왕십리에서 전차를 타고 화신백화점 뒤 설렁탕집으로 갔다. 설렁탕에는 간이 되어 있지 않았는데, 소심했던 그는 스승에게 옆에 놓인 소금그릇을 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맹탕인 설렁탕 국물을 꾸역꾸역 입에 떠넣었다. 목월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 수필로 썼고 “그렇게 숙맥인 걸 보니 시는 제대로 쓰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뿐인가. 작품을 보여드리기 위해 원효로 삼정다방에서 이따금 만났을 때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흰 고무신에 옷고름을 대충 매고 나온 차림새. 그러나 스승은 “작품은 좋다”고 칭찬하면서도 단 한번도 추천을 하겠노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번 모른 체하던 스승이 어느날 입을 열었다.
출산 병원비도 월부로 치러야 할 만큼 궁핍했던 살림
“어느날 제 작품을 보시고는 ‘아, 좋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유군. 나는 시 몇편 좋다고 시인을 만들어줄 순 없네’라고 하셨어요. 영문학,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살다가 어려우면 시를 포기하는데, 유군처럼 교육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 그러니 유군이 시를 포기하면 (추천한) 나는 뭐가 되겠냐는 말씀이었지요. 그만큼 제자들 추천에 엄격했던 분이셨어요. 그래서 목월 선생님이 ‘현대문학’으로 추천한 시인은 10명 안팎일 거예요.”
그 10명 안팎의 제자들에 유안진 시인도 속한다. 그는 6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토록 바라던 스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을 하게 된다.

이 긴긴 겨울을 어디에다 쓰랴아아 나는 아껴 죽고만 싶네

절망을 탐하여죽음을 무릅쓰고눈속을 걸어가는 늙은 짐승죽을자리 향하여걸음마다 핏자국을 찍으며 가는
나이 먹은 짐승이고 싶네 나는

음습한 밀림 속을 동행하는괴기스런 바람소리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탄주하는겨울 밀림의 겨울 깊은 밤을밤의 계절 겨울을



죽기 위해 걸어가며아껴 아껴 쓰고 싶네

- 밤의 계절’ 전문


이 시에는 걸어가는 길마다 죽기 위해 가는 것 같았을 시인의 심정이 절절하다. 살아있는 그 자체가 비극이었던 시절. 20~30대를 그는 돌이켜본다. 질긴 가난은 대학시절도 모자라 유학시절과 귀국 후까지 지긋지긋하도록 따라다녔다.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어 대학에 다니던 시절, 단돈 1백50달러만 들고 미국 땅으로 떠났던 국비유학시절….
78년 귀국후에는 국비 유학생이었던 만큼 한국교육개발원에서 2년을 근무해야 했다. 그후 단국대 성신여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를 맡았고 81년에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다. 그러나 경제적 형편은 나아진 게 없었다. 겨울이면 연탄재를 깔고 오르내리던 고샅길. 서울 봉천동 산꼭대기 17평 집에서 시댁 식구와 친정 식구 8명이 한데 모여 살았다. 그때의 가난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37세의 나이로 막내아들을 낳기 위해 순천향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병원비가 없더란다. 그래서 사정사정해서 월부로 갚기로 했다. “막내아들을 월부로 낳았다”는 우스갯소리는 여기서 나왔다.

쓰디쓴 인생살이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시인 유안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어느 문학지에 펑크난 원고 대신 실린 것이라고 한다.


가난만 그를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19세 때부터 앓아온 만성신장염은 지금도 그를 괴롭히는 병이다. 얼마 전에는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조차 받았다. 그뿐인가. 남편 역시 항암치료를 받기도 했다. 왜 그렇게 삶에는 아픔과 고통만이 저며드는 것인가. 그의 시 ‘밤의 계절’에는 이런 세월이 응축돼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수필에 매달리기 시작한 때는 귀국하면서부터. 실토하자면 얼마 안 되는 원고료라도 급했다. 월급은 집 마련하느라 구한 은행돈의 이자로 전부 들어가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점에서 우연히 손댄 수필 한편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세상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지란지교를 꿈꾸며’. 그러나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저작권이 보호받지 못하는 당시였으니 해적판이 판쳤고, 그러다 보니 인세도 많이 까먹을 수밖에. 그러나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80년대 독자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재수생, 신입생, 직장인, 가정주부 할 것 없이 다양하고 폭 넓은 독자군단은 따뜻한 정서와 용기를 주는 그의 글을 사랑했다.
재밌는 건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탄생 비화다. ‘문학사상’의 필자 한명이 펑크낸 원고의 대타가 바로 그였고, 하룻밤 만에 쓴 글이라는 것. 그러거나 말거나 이 글은 발표되자마자 장안의 화제가 됐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줄이었다. 고등학생들은 이 글을 암송했고 이 글을 베껴넣은 공책이나 책갈피 책받침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청소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이 글구절은 단골 멘트였다. 이래저래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던 ‘지란지교…’였다.
이젠 살만해졌건만 유시인은 그 시절 힘겹던 가난을 결코 잊지 않고, 도리어 베풀기 위해 애쓰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생들의 생활비를 지금도 여전히 지원하고, 심장병 돕기와 불우이웃들을 위해 일정 기부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사후 장기 기증’을 약속한 증서는 늘 손가방에 넣고 다닌다. 320ml짜리 피 한 봉지를 뽑아주면서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내가 할 수 있는 짓은 이 짓거리뿐…(‘봄비 한 주머니’중)”이라고 노래한 시인. 까무러치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누군가 기다려주고 싶다고 노래한 시인. 이제는 그렇게 아프고 슬픈, 연약한 이들에게 사랑 주는 누이가 되어 돌아온 유안진 시인.

누가 들어도 하품할 이 나이에는반나절은 눈이 쉬고 반나절은 귀가 쉬는겨울 산하가 되고 싶다세상의 누이가 되고 싶을 따름이다

빵빠르를 울리며 출현해서는젊음을 요절내듯 결단내듯치닫는 신세대도어리광 받아주듯 손뼉쳐주고 싶다.

- ‘누이’중에서


유시인은 새로운 시집을 낼 때마다 늘 다른 빛깔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시 한편 한편이 독립국가”라고 말할 정도다. 삶도 시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변화하려 하지 않으면 변화는 너무 느리게 오거나 변화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
“문학은 해볼 만한 것이죠.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니까 사실의 기록이고, 문학은 실패한 자의 기록이죠. 그래서 진실하거든요. 실패한 자가 큰 시, 위대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문학뿐입니다. 정말로 시다운 시, 제가 바라는 만큼의 좋은 시를 한번 써보고 싶어요. 소원이 있다면 그것뿐이에요.”
이렇게 시를 쓰는 길을 위해 그는 업무가 많은 교수직에서 가능한 빨리 벗어나겠노라 결심했다. 글을 써서 집도 샀고, 그런 대로 괜찮은 생활을 유지해왔으련만, 10여년 동안 한번도 바꾼 일 없다는 중고 엘란트라를 몰고 유시인은 방배성당 성 마리아상 앞에서 두손 모아 기도했다. 시 쓰는 축복을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시에 복무하는 시인이 되게 해달라면서.


여성동아 2003년 3월 4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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