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새로운 시작

외화 번역가로 명성 날리다 <야인시대>로 연기 복귀한 영화배우 조상구

“20여년간 가슴 속에 쌓아왔던 연기에 대한 한, 이번에 다 터뜨리겠습니다”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조영철 기자, SBS 홍보실,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3. 02. 07

외화 번역가로 명성을 날리던 조상구가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역으로 7년여 만에 브라운관에 돌아왔다. 배우로서 살겠다는 고집 하나로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내다 마흔 줄에 시작한 영화 번역으로 성공한 조상구. 그가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연기를 시작한 이유, 그리고 고단했던 지난 삶의 역정을 들어보았다.

외화 번역가로 명성 날리다 로 연기 복귀한 영화배우 조상구

인기리에 방영중인 SBS 드라마 <야인시대>가 2부 방영에 접어들었다. 탤런트 김영철이 안재모의 뒤를 이어 ‘김두한’역을 맡은 <야인시대> 2부는 광복 이후, 좌우 혼란기를 거쳐 정치 ‘야인’으로 활약하는 김두한의 장년기를 다루게 된다. 이른바 야인시대 정치편. 1부가 예상 외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시청률 50%대의 기염을 토하긴 했지만, <야인시대>의 무게중심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2부에 있었다. 아무래도 드라마적 요소나 매력은 시라소니나 이정재 등 현대사의 걸물들이 등장하는 2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부를 위해 준비됐던 1부가 기대 이상의 빅 히트를 기록하자 오히려 부담은 김영철을 비롯한 2부 출연진이 지게 됐다. <태조 왕건> <위기의 남자> 등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김영철을 확보해놓긴 했지만, 드라마의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선 전작의 성공 요인이기도 했던 감칠맛 나는 조연의 확보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김두한과 자웅을 겨루게 될 시라소니 역을 누가 맡을 것인지가 시청자들의 주관심사였다.
‘시라소니’는 일제시대에 북만주 일대를 주름잡던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의 주먹꾼 이성순의 별칭. 이성순은 특기인 박치기로 당대의 내로라하는 주먹들을 눕히며 ‘평양 박치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야인시대>의 장형일 PD는 캐스팅에 대한 궁금증과 관련,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키가 작고 날카로운 이미지의 연기자를 찾고 있는데, 탤런트뿐만 아니라 연극·영화배우들 중 캐릭터가 어울리는 배우 가운데 선택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드디어 시라소니의 윤곽이 1부 마지막을 통해 드러났다.
가난과 투병 등 고난 끊임없었지만 연기의 꿈 고집한 외곬
1부의 마지막 장면, 해방을 맞아 거리로 뛰쳐나온 군중들 사이로 걸어가던 김두한이 문득 뒤를 돌아본다. 순간, 김두한의 얼굴은 안재모에서 김영철로 바뀐다. 뒤를 돌아보는 김영철의 시선에 걸리는 날카로운 눈매의 새로운 ‘야인’. 고심 끝에 장PD가 선발한 인물은 바로 영화 <외인구단> 등에 출연한 바 있는 조상구(49·본명 최재현)였다.
“한동안 잊혀진 배우가 됐었지요. 지명도가 없는데 누가 조상구를 씁니까? 시라소니 역으로 섭외가 왔을 때도 별 기대는 안했어요. 저말고도 많은 배우가 오디션을 보러왔고, 또 장감독님이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하시길래 안되겠구나 했죠. 그냥 그때 장감독님 말씀이 그랬어요. ‘눈매는 마음에 든다’고. 말끝이 흐려지길래 이번에도 아니구나 하고 집에 왔는데 제가 됐다는 겁니다. 바로 집사람에게 전화해서 ‘나 시라소니 먹었어!’하고 소리를 질렀죠(웃음).”
조상구를 기억하는 사람은 적어도 30대 이상이다. 그는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감독 등이 주축이 돼 결성한 청년영화동호회 ‘영상시대’ 신인배우 공모 2기로 선발되어 80년 하길종 감독의 <병태와 영자>로 데뷔했다. 그러나 이후 고만고만한 단역을 전전했을 뿐, 뚜렷한 활동은 보이지 못했다. 그가 배우로서 영화팬들에게 각인된 것은 86년 서울관객 28만명을 기록하며 흥행성공을 거뒀던 영화 <외인구단>에서 ‘조상구’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87년 <지옥의 링>에서 주연을 맡으며 날카로우면서도 음울한 이미지의 배우 ‘조상구’를 알리게 된다.
그가 만화가 이현세 원작의 영화 <외인구단> <지옥의 링> 등에 잇달아 등장하게 된 것은 사실 이현세와의 교우관계 덕이었다. 경주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현세의 단짝이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당시 친구 이현세를 통해 배역을 따냈던 것.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이미지의 그는 이후 별다른 배역을 얻지 못하고 배우로서 잠정 휴업상태에 빠졌다.
“배고팠던 시절이었어요. 극단 생활도 한 4년여 했고, 영화에선 이런저런 조연으로 전전했죠. 주연도 한 여섯 편 했지만 빛을 보지는 못했지요. 근데 자존심만 세가지고 맘에 안 드는 배역은 아예 맡지도 않은 거예요. 너희가 나를 안 알아줘도 나는 나대로 먹고 산다고 객기 부리며 산 거지요. 그 덕분에 우리 집사람만 고생이 많았죠(그는 순간 눈가가 붉어졌다). 이런 옛날 얘기 하는 걸 집사람이 싫어해서 말하기 그러네요.”
그는 82년 부인 김경숙씨(46)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영화배우이기 이전에 가장이었으나 그는 생활인으로서는 거의 백치에 가까웠다. 더욱이 83년부터 86년까지 3년간은 심하게 결핵을 앓아 아무 일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남들에게 말하면 웃지만 쌀 떨어지는 걸 걱정하던 시절”이었다는 말이 그의 당시 생활을 잘 보여준다. 그간 생활은 모두 부인 김씨가 책임져야 했다.

외화 번역가로 명성 날리다 로 연기 복귀한 영화배우 조상구

그가 오랜 병고를 이기고 활동에 나선 것은 86년. 영화 <외인구단>에 출연했고, 이후 <지옥의 링> 등에 주연으로 캐스팅됐지만 생활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상도동 산동네의 지하방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생활했다. 출연섭외가 끊기고, ‘이러다 영원히 다시 연기를 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결국 살 방도를 달리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화 번역을 시작한 겁니다. 그때가 88년,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비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한 때거든요. 영화 한편에 상영관 하나이던 시절이니 한해에 수입되는 외화란 게 열몇편 남짓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니 비디오로 출시할 외화가 엄청나게 밀려 있었던 거죠. 하루에도 몇편씩 외화가 수입되던 시절이니까, 비디오 번역 일은 많았거든요. 잡지, 단행본 번역하면서 비디오 번역도 같이 시작했던 거예요. 그 인연으로 90년쯤 영화 번역도 맡게 되고….”
영화배우 조상구라는 이름은 당분간 잊혀졌다. 그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는 생각에 영화 번역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YMCA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 대학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어라면 자신있었다.
편당 30만원짜리 비디오 번역, 역시 생활은 어려웠지만 점차 기반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이후 부인 김씨에겐 바깥일을 전혀 못하게 했다. 화장품 외판, 보험일 등 온갖 궂은 일을 다해왔던 부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래도 말은 여전히 퉁명스레 했다. ‘나는 죽어도 배우할 테니 살기 싫으면 가라’고 부인을 자주 윽박지르곤 했다고.
“답답했어요. 그래서 매일 뛰었습니다. 죽기살기로 뛰는 겁니다. 그렇게 뛰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요. 뛰다 보면 말이죠, 숨이 꽉 차오르면서 죽을 것 같은 사점(死點)이 오거든요. 그 사점에 이르는 순간을 즐기는 겁니다. 근데 한 92년인가 93년 무렵이었을 겁니다. 잡지사에 번역 원고를 가져다 주고 뛰어서 강변북로를 달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는 겁니다. 뛰다 말고 엎어져서 통곡을 했어요. 사람이 자의대로 사는 게 아니구나, 알고 보면 타의로 살아온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설움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겪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그의 삶은 연기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이제 생활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배우가 되기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살기 위해 배우가 되려고 했다는 것, 배우가 되건 번역작가가 되건 이제 모든 것은 가족을 돌보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배우다’라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으로 버텨왔던 시간들, 언젠가 반드시 이루고 말리라 거듭 결심해왔던 자기 실현의 욕심 따위가 일시에 무너졌다. 가족 앞에서 생활 앞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무화해야 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그것이 그의 마흔 고비였다.
“내가 보여줄 시라소니는 익살스럽고 정감 넘치는 인물”
“그때부터 인생이 쉬워집디다. 일산으로 이사하고 영화 번역으로 나름대로 이름을 얻었지요. <레옹> 번역하고 나서부터는 이른바 일류 번역가로 대접받았어요(웃음). 먹고 살 만해졌지만 그래도 연기에 대한 미련이 없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살았죠. 가족들에게도 그랬어요. ‘내가 영화 하는 거 싫으면 나 안하마’라고. 집사람도 애들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래요(웃음).”
90년대 중반 드라마 <미망> <폴리스> 이후 6, 7년간 그는 전혀 연기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남기영 감독의 <우렁각시>로 연기활동을 재개했던 것. ‘어찌됐건 나는 배우다’라는 그의 외고집은 그렇게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이번 시라소니 역을 저는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섭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거든요. 다만 지명도가 너무 떨어진다는 약점 때문에 배역을 맡지 못했는데, 이 역을 계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이제 시작이죠(웃음).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보여줄 ‘시라소니’는 단순히 강한 사나이는 아니라고 한다. 익살스럽고 때론 정감이 넘치는 인물로 고향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사지에 뛰어드는 의리의 평안도 사나이의 모습으로 그릴 것이라고 한다. 조상구는 ‘오래도록 연기에 굶주려온 만큼 한꺼번에 다 터뜨리겠다’며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이제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의 ‘새로운 시작’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