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동아 로고

Celeb 당당한 여자들

이혼한 이순주씨 모녀 3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연

■ 글·이지은 기자(smiley@donga.com)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3.02.07 15:53:00

“성이 다르고 법적 동거인에 불과하다지만 우린 누구보다 끈끈한 모녀지간이에요”
서울 홍익대 앞에서 주점 ‘하회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이순주씨. 어머니 김언년씨,
딸 나영이와 함께 사는 그의 집에는 남자가 단 한명도 없다. 성(姓)이 다른 두 아이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딸을 위해 재결합했지만 또다시 이혼을 택해야 했던 이씨.
이들이 남자없이 살아온 지난 삶은 어느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했다.
이혼한 이순주씨 모녀 3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연

너무 닮았다. 모녀지간이 아니랄까봐 살짝 끝이 올라간 눈매와 동그란 코끝, 야무진 입매에 이마 선까지 셋이 똑같다. 서울 홍익대 앞에서 11년째 주점 ‘하회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이순주씨(40)와 어머니 김언년씨(76) 그리고 딸 지나영양(11). 이들 모녀 3대가 사는 집에는 남자가 단 한명도 없다. 어머니 김씨는 첫 남편과 사별한 후 두번째 남편과 헤어졌고, 이씨 역시 이혼 후 딸 나영이를 혼자 키우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들은 당당했다. 남자한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했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멋진 여자들이다.
“17세에 첫 남편과 결혼했지. 당시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을 정신대로 보낸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거든. 그래서 아버지가 서둘러 시집을 보냈어. 남편의 성도 이름도 모른 채 첫날밤을 치러야 했지. 결혼한 지 얼마 안돼 나라가 해방이 됐어. 남편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경찰이었는데, 그때는 똑똑한 사람들 대다수가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거든. 물론 내 남편도 그랬지. 남편은 경찰직에서 쫓겨났고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는 처지가 됐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는 걸. 남편 때문에 나도 감옥에 몇 번 들어갔었어. 그러다 전쟁이 터졌지.”
김언년씨가 자신의 기구절창한 삶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일본 정신대 징집을 피해 결혼한 첫 남편은 우익을 대표하는 경찰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좌익사상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결국 남편은 경찰 조직에서 쫓겨났고 구치소를 여러 번 들락거리는 처지가 됐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남편은 사상이 같은 북한군을 도왔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 돼 국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했을 때 구치소로 끌려가 한때 동료였던 경찰들에게 심한 고문을 받게 됐다.
“그때 상황은 아주 끔찍했어. 특히 북한군에게 가족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북한군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모두 몽둥이로 다 때려 죽이려고 했으니까. 구치소로 잡혀간 남편은 너무 괴롭고 무섭다며 밥에다 비상을 섞어달라고 말할 정도였어. 그러다가 스스로 목을 매 죽어버렸어. 그때 내 나이가 스물둘이었고 첫째아들이 두살인가 그랬어. 그래도 아들이 제사라도 지내주니 다행이지, 뭐.”
아들 낳아준다는 조건으로 만난 두번째 남편, 딸 낳은 후 바로 헤어져
청상과부가 된 김씨는 어린 아들을 키우며 도둑질 빼놓고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고생을 했다. 그렇게 10여년이 흐른 후 그는 고향인 청주에 있는 담배공장에 취직하려고 했다. 당시 담배공장 일은 몸이 편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그래서 10년간 모았던 돈을 공장장에게 ‘뇌물’로 주고 자리 하나를 얻으려던 때 마침 4·19가 터져 공장장이 ‘잘리고’ 말았다.
“돈만 날리고 공장에도 못들어 갔지. 그래서 서울 영등포시장으로 올라와 국수를 팔았어. 겨우 가게 터를 잡고 숨통이 트일 만했을 때 순주 아버지를 만난 거야. 그때 난 서른여덟이었고 애 아버지는 환갑이었어. 그 사람은 아내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지. 그런데 딸만 여섯이어서 나보고 아들을 낳아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딱 1년 같이 살았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말이야.”
하지만 그는 딸인 이순주씨를 낳았고 바로 두번째 남편과 헤어졌다. 같이 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 김언년씨에게 남은 것은 성(姓)이 다른 두 자식뿐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자꾸 순주를 지 아버지에게 줘버리라는 거야. 하지만 애가 그 집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어. 의붓어머니에 여섯명이나 되는 의붓언니들 사이에서 말이지. 그리고 내가 낳았으면 내 자식인데 왜 남자에게 줘? 그럴 수는 없었지. 두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몸무게가 38kg까지 빠졌다니까. 몸이 완전히 맛이 가니까 그제서야 어머니가 순주를 키워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큰아들 데리고 서울에서 장사를 했고 순주는 일곱살 때까지 고향 청주에서 자랐어.”

이혼한 이순주씨 모녀 3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연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딸 이순주씨는 자신의 지난 삶을 술술 털어놓았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 김씨와 1년에 딱 두번밖에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명절 때에만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기 때문. 그는 항상 동구 밖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렸다.
“그때 제 별명이 귀신 씌운 아이였어요. 외할머니집 근처 동산에 신당(神堂)이 있었는데, 매일 그곳에서 엄마를 기다렸거든요. 아침 일찍 동산에 올라갔다가 밤이 돼서야 내려왔어요. 종종 사람들이 산에서 저를 보고 깜짝깜짝 놀란 적도 있었죠. 하지만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집으로 들어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일곱살이 되던 해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눈칫밥을 먹는 어린 딸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딸아이를 장돌뱅이로 만들더라도 스스로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이씨는 어릴 적부터 시장통에서 살았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워 더 꿋꿋하게 자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어릴 적 엄마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셔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가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집에 웬 할아버지가 왔는데, 엄마가 큰절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등교하는데 그 할아버지가 제 뒤를 계속 쫓아오면서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전 정말 간첩인 줄 알았어요. 그날 밤 잠결에 엄마가 할머니랑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그 할아버지가 제 아버지였던 거죠. 엄마는 ‘10년 만에 딸을 보러 오면서 옷도 한벌 사오지 않았다’ ‘아버지 보고 할아버지라고 하니까 섭섭하다고 하더라’ ‘그 인간 하나도 안 변했다’ 등의 이야기를 했어요. 너무 놀라 밤새 울었어요.”
아버지를 만났다는 기쁨보다 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와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다는 이씨. 그는 당시 아버지라는 사람이 너무 미웠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돼서 아버지를 찾아가 따귀를 때린 후 ‘낳았다고 다 아버지가 아니야’라고 소리치리라 결심했다고.
“84년 대학에 입학한 후 아버지를 만나러 갔어요. 시골에서 큰어머니랑 살고 계셨는데 물론 아버지를 때리거나 소리치지는 못했죠(웃음). 큰절을 했더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만원짜리 한장을 주시더군요. 그 돈을 평생 간직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몇년 전 소매치기를 당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사실 언제 그렇게 되셨는지는 몰라요. 친척 결혼식에 갔다가 우연히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들었죠. 그런데 지금 제 이름은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동생 호적에 올라가 있어요.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딸을 위해 전남편과 재결합했지만 성격차 극복 못해 또다시 헤어져
의상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남대문에서 옷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벌이도 시원치 않은데다가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것이어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러던 중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그저 낙천적이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장사를 하면서 심신이 많이 지친 그는 남편이 자신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줄 거라고 믿었다. 게다가 나영이를 갖게 되자 결혼을 미룰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92년 10월 결혼식을 올렸고 서울 홍대 앞에 ‘하회마을’이라는 작은 주점을 인수해 옷장사가 아닌 이른바 ‘물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이씨가 어머니를 모셨다. 이씨의 오빠가 다섯 자매의 맏딸인 여자와 결혼한 후 처가 부모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결혼생활과 일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또 결혼 전에는 그저 낙천적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생활력이 없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제가 모든 집안일을 챙겨야 했고, 남편과의 갈등이 자꾸만 심각해졌어요. 결혼한 지 1년도 안돼 각방살이를 했어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일부러 새벽까지 주점에서 일한 적도 많았고요. 결국 95년 이혼 도장을 찍었죠.”

어머니 김씨는 자신이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웠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또 자신의 드센 팔자가 딸에게 대물림되는 것 같아 너무 속상했다. 그래서 손녀 나영이를 생각해서라도 꾹 참고 같이 살라고 딸을 설득했다. 이순주씨 역시 딸을 위해 다시 한번 잘 해보겠다며 재결합했지만 결국 2002년 또다시 이혼하고 말았다.
“한번 안되는 건 안되더라고요. 처음 이혼할 때는 어머니가 극구 말리셨지만 두번째 이혼 때는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먼저 헤어지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남편과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우리 엄마도 아버지 없이 나를 키웠는데,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혼도장을 찍을 때 나영이 친권을 다 위임받았어요. 엄마도 저를 책임졌잖아요. 저도 나영이를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죠. 나영이 호적이야 남편에게 있지만. 그거 아세요? 우리 세명은 법적으로 가족이 아닌 동거인이에요. 제일 가까운 가족인데도 말이죠.”
“맹자 엄마는 자기 아들을 믿지 못했나 봐요. 하지만 전 제 딸을 믿어요”
이씨는 나영이가 아빠를 보고 싶어할 때면 언제라도 만나게 해준다. 그 역시 아버지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어떤 건지 알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종종 나영이에게 “할머니는 못돼서 엄마에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아. 나영이가 아빠 보고 싶으면 언제나 말해. 엄마랑 아빠는 친구니까 싫으면 보지 않을 수 있지만 너랑 아빠는 가족이거든”이라고 말하곤 했다. 키도 덩치도 큰 나영이는 구김살없이 매우 밝다. 또래보다 어른스러워 특히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 ‘짱’인 꼬마 여걸. 엄마와 항상 많은 대화를 나누며 친구처럼 지내는 나영이지만 아빠를 만나고 온 날이면 새침해져 엄마를 피하곤 한다. 아직 부모의 이혼이 어린 가슴에 상처로 남은 탓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랬듯 나영이 역시 스스로 상처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는다.
‘하회마을’은 이 모녀 3대가 함께 꾸려나가는 그들만의 공간이다. 이순주씨가 직접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김언년씨는 카운터를 맡는다. 나영이는 보통 밤 11시까지 있으면서 엄마의 잔심부름하기도 하고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거나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98년 심야 영업금지가 풀리기 전에는 종종 12시 넘어서 몰래 영업할 때 나영이가 망을 보기도 했다. 어린 나영이를 술집에서 키우는 것이 교육상 좋지 않다고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지만 이순주씨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히 말한다.
“저는 우리 나영이를 믿어요. 물론 술집에 있으면 좋지 않은 모습들을 많이 보죠. 하지만 나영이가 평생 술집을 안갈 것도 아니고,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을 보지 않을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나영이한테 ‘술 먹고 주정하는 건 나쁘니 저렇게 하면 안된다’고 가르쳐줘요. 나영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고요. 또 어릴 적부터 저를 도와주다 보니 학교에서도 또래들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학급 일도 잘한다고 해요. 맹자 엄마는 훌륭한 아들을 만들기 위해 이사를 세번씩 했다는데, 자기 아들을 믿지 못했던 모양이죠(웃음).”
이순주씨는 훗날 나영이가 독신으로 산다거나 남편과 맞지 않아 헤어진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김언년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손녀 나영이만은 평범하게 보통 여자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
“나이가 드니까 참 인생이 덧없는 것 같아. 딸도 나랑 비슷하게 사는 걸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아프지. 남편하고 아이 키우면서 사는 게 여자 행복인데. 큰아들은 ‘엄마가 키워서 순주도 엄마처럼 산다’고 그러는데, 그 말도 맞는 것 같아. 나영이는 평범하게 살아야지. 그렇고 말고.”
하지만 이씨는 “엄마는 말만 저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 김씨도 은연중 남자없이 사는 게 자유롭고 편하다는 걸 알고 있을 거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너무 당당해요. 엄마와 나영이, 저 모두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남자없이 여자 셋이서 살지만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자부하고요. 남자만 핏줄이 있나요? 우린 모두 성이 다르고 법적으로는 동거인에 불과하다지만 누구보다도 끈끈한 모녀지간인 걸요.”

여성동아 2003년 2월 470호
Celeb 목록보기 좋아요

Print Edition

How to be a woman

생각하는 여자가 읽는 매거진!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이번호목차이번 호 구입하기

독자알림

더보기

Follow up on SNS

여성동아 에디터가 핫뉴스, 최신 트렌드와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전해 드립니다.

  • 여성동아 페이스북
  • 여성동아 인스타그램
  • 여성동아 유튜브
  • 여성동아 네이버포스트
  • 여성동아 네이버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