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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속시원~한 수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지혜

■ 글·유인경

2003. 01. 29

대개 주변인들을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분류하지만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만은 없다. 천하의 악당도 그 부모에겐 효성스런 아들일 수 있고 갈채 받는 영웅 역시 집에서는 마누라의 억장을 무너뜨리게 하는 최악의 남편일 수 있기 때문. 결국 사람은 ‘나와 잘 맞는 사람’과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나한테는 마귀 같고 심술궂은 시어머니가 자기 딸에겐 천하에 둘도 없는 다정한 친정어머니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무조건 착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만 나누지 말고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부딪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맞춰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즉 취향별, 식성별로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상황에 따라 만나면 된다. 나와 안 맞는 사람들을 얄미워하며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나와 잘 맞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발견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맞아 맞아”만 연발하며 살아야겠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지혜

난 직업상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데도 사람의 특성이나 가치, 혹은 진심을 알아보는 식견이 부족하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야. 또 자기 일에 아주 열심이고 봉사활동도 많이 한다더라.”
이렇게 누군가에 대해 평을 하면 곧바로 이런 답이 이어진다.
“또 시작이다. 그 인간이 얼마나 편협한 인간인데. 얼마 전에도 이런저런 일로 그 회사에서 난리가 났다던데 그 이야기는 못들었수? 하여튼 타고난 낙관주의자야. 도대체 댁 기준으로는 나쁜 사람이 어디 있수? 성격이 좋다, 귀엽다, 착실하다, 안목이 날카롭다 등 항상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잖아. 그래서 만나보면 영 아니올시다던 걸.”
참 신기하다. 난 그렇게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누구나 직접 만나보면 그렇게 역겹거나 혹은 소름이 끼칠 만큼 나쁜 기운이 감도는 이들은 별로 없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들도 직접 만나보면 의외로 싹싹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이들이 더 많았다.
얼마 전에도 한 커리어우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수년간 알고 지내는 사이로 비교적 가까운 인물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전문직 여성처럼 야무진 말투에서 깔끔한 옷차림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고 일에도 열성이었으며 항상 후배들을 칭찬하는 말을 자주 했다.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기특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멋진 여자”라고 호감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최근 그 여성이 물의를 일으키고 직장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겠지. 일에도 열심이고 나한테도 잘 해줬는데.”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서 하는 말.
“아이구, 도대체 나이는 뭘로 먹었수. 그 여자 진짜 여우란 말이에요. 유인경씨가 기자고 매스컴에도 자주 나오니까 잘 보이기 위해 달콤하게 굴었겠지만 두 얼굴을 가졌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만큼 다른 이들에겐 가혹하게 굴었다고요.”
그 점은 인정한다. 내 직업이 기자니까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내게 최상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할 게다. 기자에게 잘못 보여서 기사가 엉망진창으로 나오기를 원하진 않을 테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한 천사’의 모습으로 날 대한다.
대개 주변인들을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만 분류하지만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천하의 악당도 그 부모에겐 효성스런 아들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식에겐 최고의 멋진 아빠일수도 있으리라. 또 뛰어난 업적으로 갈채 받는 영웅 역시 집에 들어가보면 마누라의 억장을 무너뜨리게 하는 최악의 남편으로 “개돼지만도 못한 자식”이라는 욕을 먹으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결국 사람은 ‘나와 잘 맞는 사람’과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나한테는 그렇게 마귀 같고 심술궂은 시어머니가 시누이인 자기 딸에겐 천하에 둘도 없는 다정한 친정어머니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 본부인과는 사사건건 안 맞아 이혼한 후 새로 만난 둘째부인과는 찰떡궁합으로 “왜 우리가 세살 때 못 만났을까”를 외치는 커플도 많다. 남들은 다들 너무 멋지다며 꺅꺅 비명을 지르고 환호하는데도 “와, 저 여자 정말 재수없어”하고 채널을 돌린 연예인은 얼마나 많은가. 그저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내 입에서 “저런 인간은 죽어야 해” 하며 사형 선고를 내린 이들만 모아도 공원묘지 하나는 다 채우지 않을까. 편견을 가지면 안되지만 정치인 김민석, 김행, 만능연예인 박경림, 노영심 등은 내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내 취향에 맞지 있다는 이유로 내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반면 “성격이 모가 난다” “굉장히 괴팍하다”고 소문난 이들도 막상 만나보면 너무 죽이 잘 맞아서 몇년 동안 히히덕거리며 수다를 떨고 밥도 자주 먹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과 만나면 남들이 오해한다”는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겐 이상한 이들이 내겐 너무 편하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들인데 다른 이들의 평가만 믿고 단교를 할 수는 없다.
부부 사이에만 궁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친구는 물론 직장에서 역시 나와 궁합이 맞는 상사나 부하를 만나야 스트레스 덜 받고 신나게 일할 수 있다. 창의성을 존중하고 자유분방한 상사는 출퇴근 시간을 엄수하는 직원보다 유용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순발력과 재치를 갖춘 직원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지만, 매사에 법대로, 원리원칙대로를 강조하는 상사라면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도 허구헌날 술 마시고 근무태도가 나쁘면 인사고과 점수를 나쁘게 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나와 별로 잘 맞지 않는 사람도 그럭저럭 맞춰가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란 잣대로 사람들을 예단하지 않고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와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알아간다. 또 굳이 잘 맞지 않는 사람에게 혀를 깨물어가며 나 혼자 맞추려고 노력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취향별, 식성별로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상황에 따라 만나면 된다.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와는 주성치 영화를 보러 가서 서로의 유치함을 비웃지 않고 흐드러지게 웃으면 되고, 클래식 마니아와는 모처럼 공짜 티켓을 구했을 때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우아한 척하면 되고, 매운 음식에 열광하는 이와는 낙지볶음을 먹으며 땀과 콧물을 닦아가면서도 서로 추하게 느끼지 않고 정겨운 미소를 교환하면 된다.
아무리 나의 유전자를 그대로 복제한 복제인간이 태어난다고 해도 나와 모든 취향이나 가치관이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와도 뜻이 맞지 않아 수시로 싸우고, 심지어 내 뱃속에서 나온 내 자식도 나와는 얼마나 구구절절 취향이 다르고 이상이 다른가.
나와 안 맞는 사람들을 얄미워하며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나와 잘 맞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맞아 맞아”만 연발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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