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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장관과 남편까지 속이고 억대 가로챈 간 큰 여인 사기행각 전말

‘난 전직 장관의 딸, 수천억원 재산 상속받는다’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최승현

입력 2003.01.14 15:56:00

한때 정권의 실세였던 전직 고위층 인사의 숨겨진 딸을 사칭해 억대 금품을 챙긴 간 큰 여성이 최근 경찰에 붙잡혔다. 전직 무속인 출신의 박씨가 그 주인공. 이 여성이 늘어놓는 화려한 언변에 20여명의 선량한 서민은 물론 전직 고위층 인사, 심지어 그의 남편까지도 철저히 속아왔다고 한다. 그의 신출귀몰 사기행각의 전말.
전직 장관과 남편까지 속이고 억대 가로챈 간 큰 여인 사기행각 전말

지난해 11월초 H은행 성남지역 지점 앞에 검은색 에쿠우스 한대가 멈춰섰다.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서둘러 승용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그들이 열어주는 뒷문에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수행하는 경호원들에게 커다란 골프가방을 들린 채 여성은 당당히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없이 은행 VIP코너를 찾은 여성은 은행 관계자에게 수십억원대의 현금을 예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의 손가락은 경호원이 들고 있는 골프가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처럼 대형 고객을 맞자 은행측은 분주히 움직였다. 얼마 뒤, 은행이 마련한 자금운용 플랜을 듣고 있던 여성은 “알겠습니다. 다른 곳도 좀 알아 봐야겠네요”라는 짧은 말을 남긴 채 유유히 은행을 빠져나왔다.
경호원까지 대동하고 은행을 찾은 여성은 11월25일 경기도 분당경찰서에 사기혐의로 붙잡힌 박현옥씨(가명·36)다. 애초부터 은행 방문은 경호원들에게 재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지만 그의 의도를 알 턱 없는 은행 관계자들은 멀어져 가는 골프가방을 바라보며 마른침만 삼켜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년 전, 박씨는 교도소에 수감된 신세였다. 당시에도 이번 사건에서 사용한 수법과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사기행각을 일삼다 덜미를 잡혔던 것. 박씨는 그 안에서도 함께 수감중인 동료들에게 예의 ‘전직 실세 장관의 숨겨진 딸’ ‘수천억원대 상속녀’를 운운하며 자신을 포장했다. 그 주변에 모여든 몇몇 수감자 사이에서 이 말을 귀담아 들은 여성이 있었다. 바로 1년 뒤 박씨의 동서가 된 이민희씨(가명·47)다.
박씨가 늘어놓는 거짓말을 철썩같이 믿은 이씨는 그와 ‘언니’ ‘동생’ 사이로 발전했다. 급기야 이씨는 이듬해 출소하는 박씨에게 자신의 시동생 김명진씨(가명·45)를 소개시켜주기에 이른다.
박씨의 과거를 알 길 없는 김씨. 결혼에 실패한 아픈 경험을 갖고 있던 그는 그저 이 부잣집 딸과의 만남을 더없이 기뻐했다. 99년 1월부터 동거생활을 시작한 두 사람은 같은 해 8월 아예 혼인신고를 마치고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들 부부는 처음 얼마간은 평범하게 살았다. 하지만 김씨가 박씨에게 ‘상속받기로 했다는 막대한 재산’에 대해 물으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박씨가 “외가쪽과의 법정분쟁으로 묶여 있다”고 둘러대자 아내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한 남편 김씨가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아내가 막대한 재산을 놓고 소송을 벌이고 있는데 일단 돈 좀 빌려줘라. 나중에 재산 관리인이라도 되면 수입이 괜찮을 것”이라며 4천만∼5천만원을 받아내 박씨에게 건넸다.
박씨의 사기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부 둘 다 특별한 벌이가 없어 생활이 쪼들리자 살던 집마저 처분하고 지난해 3월부터 여관을 전전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자 박씨는 다시 사기행각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가 사용한 수법은 시누이와 남편, 그리고 남편의 친척들을 속였던 방법과 유사했다. 자신이 과거 정권의 실세였던 M 전장관의 숨겨진 딸이고, 수천억원대의 부동산을 상속받았지만 현재 법정분쟁에 휘말려 소송비용이 필요하다, 이 비용을 지원해주면 자신의 재산관리인으로 고용해 초고액 연봉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다.
박씨는 이런 수법으로 지난해 중순 남편 김씨가 과거 한 회사의 영업직으로 근무할 당시 동료로 지냈던 변씨에게 1천만원 가량을 받아냈다. 지난해 8월22일에는 경기도 성남의 한 여인숙에 투숙하면서 여인숙 주인 윤진원씨(가명·43)로부터 3천만원을 가로채기도 했다.
박씨에게 속은 사람들은 ‘연봉 수억원대 재산관리인’이란 자리에 현혹됐던 피해자뿐만이 아니다. 그가 재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고용했던 10여명의 사설 경호원들 역시 박씨에게 감쪽같이 속고 말았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피해자들을 만날 때면 수천억원대 상속녀의 신분에 맞게 렌터카 회사에서 빌린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운전이나 경호를 맡아줄 경호원들이 필요했던 것.

한 경호업체에 소속된 이들은 “가끔 경호를 맡아주면 나중에 거액의 연봉을 주겠다”는 박씨의 말에 속아 그의 사기행각을 거들어야 했다. 또 그는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현금을 가득 채운 것으로 위장한 골프가방을 맡겨 은행들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골프가방에 들어 있던 내용물은 헌 종이에 불과했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경호원들은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이 가방을 들고 다니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비록 박씨의 화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처럼 많은 피해자들이 그에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은 선뜻 납득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이 사건을 조사한 분당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수법이지만 유치한 수법에 넘어가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라고 말했다.
범행이 횟수를 더해감에 따라 박씨는 점점 대담해졌다.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아버지라고 밝힌 M 전 장관을 속인 대목은 그녀의 대담함을 잘 보여준다.
피해자들 앞에서 아버지라 속인 전직 장관 만나는 대담성 보이기도
지난해 9월 중순, 박씨는 경기도 분당의 한 미용실을 찾았다. 특유의 화술로 원장 이현주씨(가명·46)와 금세 가까워진 박씨. 둘 사이의 대화가 무르익으면서 그녀는 이씨의 남편 조동훈씨(가명·49)가 20여년 동안 세무공무원으로 재직했다는 사실과 현재 공직을 그만둔 채 다른 회사에 근무하고 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박씨는 “남편이야말로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며 예의 ‘수천억원대 상속재산’을 들먹였다. 남편이 재산관리인이 될 경우 수억원대 연봉을 보장하겠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박씨가 갖가지 명목으로 이씨에게 돈을 뜯어낸 것은 물론이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수차례에 걸쳐 4백여만원이란 돈을 건네주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자 답답해진 이씨가 박씨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며 졸라댔던 것. 그러자 박씨는 지난 10월말 대담하게도 모 학원재단의 이사장으로 있는 M 전장관의 사무실에 이씨를 데려갔다.
이씨를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게 한 박씨는 M 전장관을 만나서 그가 운영하고 있는 재단에 50억원 상당의 기부금을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M 전장관으로서는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재단으로 찾아온 박씨를 의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날 오후 이렇듯 M 전장관과 안면을 튼 박씨는 저녁 무렵, 이번에는 이씨를 데리고 M 전장관의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아버지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집 안으로 들어간 박씨. 이씨는 그 집 앞에서 박씨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뒤 박씨는 M 전장관과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나왔다. 한 손에는 M 전장관의 부인이 쓴 책까지 들고 있었다.
박씨의 범행은 여기까지였다. 이씨에게 이런 모습까지 보여준 박씨는 그가 자신에게 완전히 속아넘어갔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이씨는 며칠 뒤 직접 M 전장관을 찾아갔고, 박씨의 정체는 탄로가 났다.
피해자 이씨는 물론 자신의 남편, 경호원, 전직 장관까지 농락했던 박씨. 그는 결국 피해자 이씨와 M 전장관의 신고로 오랜 사기행각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박씨는 현재 구치소에 수감중이다.

여성동아 2003년 1월 4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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