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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함께 하는 삶

고아원, 사회복지시설 등 찾아 다니며 무료 공연한 배우 최경식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임소영 ■ 사진·성경훈

2003. 01. 14

‘말’ 대신 표정과 몸짓만으로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 팬터마임 배우 최경식씨가 그 주인공. 5년 전부터 고아원, 사회복지시설, 교도소 등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다니며 자선공연을 펼치고 있는 그를 현장에서 만났다.

고아원, 사회복지시설 등 찾아 다니며 무료 공연한 배우 최경식

군대시절, 마임의 매력에 빠졌다는 최경식씨.


지난 12월5일 전라북도 전주시 동암사회복지관에선 이색적인 공연이 열렸다. 5년 전부터 고아원, 사회복지시설, 교도소 등 그늘진 곳을 찾아 다니며 자선공연을 펼쳐온 최경식씨(39, 전주시립극단 단원)가 동암사회복지관 아이들에게 웃음을 전달해주러 온 것. 평소 팬터마임 공연을 접한 적이 없는 아이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일찌감치 강당을 점령(?)했고, 공연소식을 들은 마을 주민들까지 대열에 합세하여 복지관은 이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알록달록한 피에로 복장을 한 최씨가 무대에 올라 마술쇼와 풍선묘기로 동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이들은 피에로 아저씨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깜짝 묘기에 연신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함께 춤추고 풍선묘기나 마술도 따라 배우며 공연 분위기는 한참 무르익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팬터마임. 그는 팬터마임의 거장, 마르셀 마르소의 <가면 만드는 사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원래는 비극으로 끝나야 하는 원작의 엔딩 부분을 살짝 수정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인간은 결국 불행의 가면을 벗지 못한다’는 마르소와는 달리 ‘세상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으므로 희망을 버리지 말자’며 불행의 가면을 멀리 던져버렸다. 박수갈채 속에 공연은 막을 내렸다.
공연이 끝나자 아이들은 일제히 무대로 올라갔다. 최씨에게 안겨 뽀뽀하고 악수하며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는 아이들. 최씨는 그런 아이들에게 일일이 사인도 해주고 기념촬영도 하면서 내년에 또 올 것을 기약했다.
“한달에 열번 무대에 오른다면 그중 한번은 외롭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공연하고 싶어요.”
최씨가 정해놓은 무대에 오르는 원칙이다. 또한 이것은 그가 해마다 자선순회공연에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년 1백여 차례의 빡빡한 공연 일정 속에서 굳이 자선공연을 챙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마임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공연 레퍼토리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다윗과 골리앗> <골고다 언덕길> <돌아온 탕자> 등 성서 이야기를 주로 마임으로 연출해서 보여준다. 그 작품들은 대부분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교도소, 치매병원, 알코올중독 전문병원, 고아원 등에서 공연됐다.
최씨가 연극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전주대학교 시절, 연극동아리 ‘볏단’에 들어가면서였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성극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무대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볏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2년 뒤 군대에 갔다. 말년병 시절이던 88년, 그는 연극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씨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연극계에는 팬터마임하는 배우가 거의 없었어요. 독자적인 연극장르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분위기였으니까요. 하지만 팬터마임에 전 생애를 건 유진규 선생님은 달랐어요. 그만큼 헌신적이었죠.”
아무리 척박한 연극계 풍토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유진규 선생의 옹고집을 마음 속으로 존경해오던 최씨였다. 그런 유진규 선생이 춘천시립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에 최씨는 ‘탈영’(?)을 감수하고서라도 공연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몰래 나와서, 공연을 보고 군대로 돌아가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거예요. 내무반에서 알아챘을까 걱정돼서가 아니라, 막연하나마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았다는 기쁨에 마구 가슴이 뛰더군요.”
제대 후 그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극단 ‘황토’에 들어갔다. 연극배우가 되기로 한 이상 학교보다는 극단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최씨는 오른쪽 가슴에는 연극을, 그리고 왼쪽 가슴에는 팬터마임을 담고 생활했다. 그리고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남보다 두배나 연습에 피땀을 쏟았다.

고아원, 사회복지시설 등 찾아 다니며 무료 공연한 배우 최경식

마임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최경식씨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자선공연을 5년째 펼쳐오고 있다.


“대체로 팬터마임 배우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정부 지원도 없고 상설 공연장도 없고 그렇다고 마임 마니아들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대부분 이같은 상황을 견디지 못해 중도에 팬터마임을 포기하고 맙니다.”
최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팬터마임 공연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84년부터 95년까지 연극배우도 겸했다. 92년도에 전주시립극단 단원이 됐고 전북연극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95년부터 3년 동안 전주시립극단 상임 단무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생활도 안정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늘 팬터마임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95년 거장 마르셀 마르소의 내한공연을 보고 과감히 꿈을 좇기로 했다.
“70세 노인이 한시간 넘도록 열연을 하는데…. 사람의 몸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더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갈등하면서 보낸 지난 10년이 아까웠다. 더 늦기 전에 팬터마임 배우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1인극단 ‘달란트 연극마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관객이 몇명이 들건 간에 꾸준히 공연하고 작품을 만들었다.
“‘왜 이제 와서 힘든 길을 가려 하냐’며 모두들 만류했어요. 하지만 마임에 대한 제 열정을 멈출 수는 없었지요.”
팬터마임 배우로 거듭나기 위해 최씨는 몸 만들기에 매달렸다. 이미 많이 굳어진 몸을 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연습밖에는 왕도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을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강도 높은 연습을 반복했다. 마임이스트로서 최씨의 장점은 다양한 표정 연기다. 중학생 시절, 엄마가 돌아가신 충격에 말없이 방안에 틀어박혀 거울하고만 놀았던 유년기의 체험이 연극적 기초가 되어준 모양이었다.
“전 관객과 ‘호흡하는 마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사람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있어야 하죠. 새가 어떻게 숨을 쉬는지, 태양이 어떻게 뜨고 지는지, 절망스러운 표정은 어떨 때 나오는지… 마임이스트는 이 모든 것을 자세하게 봐야 합니다.”
최씨는 자신이 그랬듯이 ‘호흡하는 마임’, ‘살아 있는 마임’을 보고 나면 누구나 마임 마니아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최씨가 꼽는 팬터마임만의 매력은 바로 ‘세계성’이다.
“언어와 인종은 달라도 느끼는 감정은 같거든요. 팬터마임은 언어가 아니라 육체를 통해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기 때문에 세계 어디를 가도 통할 수 있어요.”
그는 이런 팬터마임의 매력을 이용해 지난 2000년에 중국과 몽골로 선교 순회공연을 나서기도 했다. 현지에서 공연장소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마임을 충분히 이해했고, 여덟 차례의 공연을 모두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춘천국제마임페스티벌, 채만식 연극제, 전주 풍남제, 세계아동청소년예술축제 등 각종 행사에 초청받아 그의 작품을 선보여왔다.
“앞으로 팬터마임을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마임이스트층이 얇아요. 그러다 보니 발전도 더딘 것 같고요. 팬터마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좀더 힘을 모았으면 좋겠어요.”
마임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팬터마임 선교사, 최경식씨. 그는 오늘도 사회의 응달진 곳만을 찾아 다니며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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