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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장미화 이혼 후 첫 인생 고백

“이혼 후 한 남자와의 잘못된 만남, 부도 등 드라마틱했던 고통의 세월 20년”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최숙영 ■ 사진·지재만 기자

입력 2003.01.09 13:04:00

가수 장미화가 이혼 후 굴곡진 삶을 살았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한 남자와의 사랑, 사업 실패, 어머니의 죽음 등 사연도 많았다. 이 모든 역경을 딛고 다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미화의 이혼 후 첫 인생 고백.
가수 장미화 이혼 후 첫 인생 고백

장미화(53), 사람들은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떤 이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란다.“장미화씨도 많이 늙었네요.”
그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하긴 히트곡 ‘안녕하세요’를 불렀던 것이 30년 전이니,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하고 노래를 부르며 발랄하게 춤을 추던 그녀의 앳된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늙을 줄 알았겠어요? 인생은 참 허망한 거예요. 제가 항상 웃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니까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온 줄 아는데, 저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은 순간도 많았어요. 진짜 죽으려고 지갑 하나 들고 집밖을 나섰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럴 때마다 제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 아들이죠. 내가 죽으면 혼자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결국 아들 때문에 죽지 못했어요.”
장미화는 피곤한지 연신 손으로 눈과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이 많이 늙어보였다. 그것은 뭐랄까, 마치 그녀의 지나온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83년 장미화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 네살 연하였던 남편은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남자였다. 그 때문에 다투는 일도 많았다. 이혼을 결심하기까지는 마음의 갈등이 많았다. 연예인이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장미화도 별 수 없구나, 얼마 살지 못하고 이혼하는구나” 하는 말을 듣기 싫어서 심사숙고했지만, 벌어진 부부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이혼한 뒤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어요. 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안 좋은 얘기를 하는 게 들릴 때마다 눈물이 났죠. 누군들 이혼하고 싶어서 했겠어요. 제 자신이 초라하고 슬펐어요.”
결혼 3년 만에 성격 차이로 남편과 헤어져
가수 장미화 이혼 후 첫 인생 고백

가수 장미화와 아들 김형준. 장미화는 친구처럼 지내는 아들과는 성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스스럼없이 나눈다고 한다.


다행히 ‘애상’ ‘내 인생 바람에 실어’ 등의 노래가 히트하면서 재기에는 성공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말았다. 85년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는데,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부인과 이혼할 테니 결혼해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할 수 없잖아요. 저는 그러지 말라고 그 남자를 설득했어요. 급기야 그 남자의 부인을 만나서 ‘제발 남편을 말려달라’고 부탁까지 했어요. 그 여자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정말이지 도망치고 싶었어요. 당장 이민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아들은 어리지, 친정엄마는 몇십년째 병으로 앓아 누워있지, 그럴 처지도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 남자와의 관계는 10년이나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금전적인 손해도 봤다. 그 남자가 사업을 했기 때문에 사업자금을 대주다 장미화의 집까지 넘어갔다. 헤어질 때도 어렵게 헤어졌다고 털어놓는다.
“그 이후 전 남자들이 무섭고 싫어졌어요.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수활동을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것까지 고민을 했어요. 만나야 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어요. 애초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죠.”
장미화는 이제 남자라면 넌덜머리가 난다며 재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했다. 이혼하면서 ‘내 사전에 결혼은 없다!’고 단단히 결심을 하기도 했지만, 이혼 후 그 남자를 만나면서 사람에 질린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그 남자와 헤어진 뒤에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93년 동료 연예인에게 곗돈을 떼인 것이 시초였다. 95년에는 청담동에 보디숍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망하고 말았다. 2001년 부도가 났고, 미국에 있었던 그녀는 친정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서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 빚쟁이들한테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2001년 가을 친정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나올 수가 있어야죠. 빚진 사람들에게 ‘제발 어머니 장례식만 보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람들은 그럴 때 알아보는 것 같아요. 결국 아들 혼자서 장례식을 치렀죠. 그때 제 심정이 어땠겠어요. 미국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너무 슬펐어요. 제가 무남독녀 외딸인데다 30년 동안 친정엄마 병수발을 했는데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도 한이 돼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그에 관한 나쁜 소문이었다. ‘돈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도망갔다’는 식의 소문이 돌자 빚쟁이들이 더 난리를 쳤다. 그랬던 사람들이, 그녀가 일이 잘 풀리자 입에 발린 소리만 하더라고. 그는 ‘이것이 인간사인가’ 싶고 사람들에게서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후 일년 동안 하루에 밤업소 7군데를 뛰면서 일했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빚을 갚았죠. 남들 다 쉬는 일요일에 나가서 노래를 부를 때면 서글픈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빚은 거의 다 갚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저를 배신한 사람들, 저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스승이 된 거예요.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 했거든요. 지금은 고맙게 생각해요. 그때 그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가수 장미화 이혼 후 첫 인생 고백

지금도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할 때가 행복하다는 장미화는 최근 디너쇼 공연을 가졌다.

그는 지금 후회가 되는 게 있다면 전남편하고 이혼한 것이라고 했다. 전남편과 안 맞아서 이혼을 했지만 아들(김형준·23)한테 못할 짓을 한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들을 위해서 좀더 참고 살 걸…, 부모의 이혼이 아이한테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이제와 생각하면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당신 아니면 내가 못살 줄 알아?” 하는 오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꾹 눌러 찍었던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아들은 다행히 잘 자라주었어요. 열다섯살에 유학을 보냈는데 뉴질랜드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올해 시드니대학을 졸업해요. 유학은 본인이 가겠다고 해서 보내준 건데 아무 연고도 없는 뉴질랜드에 가서 혼자 잘 적응한 것을 보면 기특하죠. 한국에도 일년에 한번 방학 때나 엄마 얼굴 본다고 나왔지, 공부한다고 자주 나오지도 않았어요. 제가 아들한테 갔던 적은 한번도 없었고요. 저도 아버지 없이 자랐기 때문에 아들도 강하게 키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내뱉는 식으로 차갑게 하고 아들 하나라고 과보호하는 일도 없었지요. 그것만큼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미화는 요즘 아들하고는 친구처럼 지낸다. 주점에 가서 삼겹살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술잔을 부딪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또 아들하고는 못 하는 얘기가 없다. 성생활에 관한 것까지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허물없이 지낸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저는 전남편하고도 친구처럼 지내요. 만나서 술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서로 고민도 털어놓지요. 친구들은 ‘자존심도 없냐?’고 하는데 이혼한 것이 남편의 탓만은 아니잖아요. 살다 보면 서로가 안 맞을 수도 있는 일이고, 제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또 우리네 인생이 아니겠어요. 좋은 게 좋은 거죠. 나이가 들수록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너그러워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아요.”
그말과 함께 입을 활짝 벌리고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장미화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선도 많이 베푸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에게 베풀면 거기서 얻는 기쁨이 클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가진 게 없을 때 남을 돕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있을 때도 물론 베풀어야 하지만, 가진 게 없을 때 특히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사람들하고 공유하면서 세상을 사는 것, 그게 행복이 아닌가 싶어요.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나누면서 사는 게 뭐가 어려워요.”
그녀를 보면 인생의 도를 깨우친 사람 같다. 그동안 굴곡진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남은 바람이 있다면, 죽는 날까지 노래를 부르다가 죽고 싶다는 것이다. “‘장미화가 살아 있다, 늙어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을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또 돈을 벌면 앞장서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도 열심히 돕고 싶고요”라고 자신의 속내를 꺼내보인다. 그녀의 말처럼 어려운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 재기에 성공한 그녀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여성동아 2003년 1월 4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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