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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시와 판소리의 만남

시인 김지하 & 국악인 오정해의 ‘명동 문학까페’ 만남

“예술에는 선생이 없는 법. 선생에게 배우려 말고, 책에서 익히려 하지 마세요”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조희숙 ■ 사진·조영철 기자

2002. 12. 18

외국인 노동자를 돕기 위한 취지로 기획된 명동문학카페. 이번에는 시인 김지하씨와 국악인 오정해씨가 만났다. 유난히 바람이 매서운 날씨였지만 이들이 보여준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관객들을 훈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인 김지하 & 국악인 오정해의 ‘명동 문학까페’ 만남

민족문학작가협회 주최로 기획된 명동문학카페 행사가 매주 금요일마다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는 가운데, 아홉번째 초대손님으로 시인 김지하씨(61)와 국악인 오정해씨(31)가 만났다. ‘타는 목마름으로’의 시인 김지하씨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오랜 시간 영어의 몸이었다가 80년대 석방된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최근에는 이른바 생명사상을 모태로 한, 새로운 문화운동인 율려운동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 또한 오정해씨는 91년 KBS 국악대경연에서 1등을 하며 판소리계의 샛별로 떠오른 후, 영화 <서편제>의 히로인으로 얼굴을 널리 알린 국악인. 전주 우석대 국악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그는 현재 KBS FM <풍류마을>의 진행자로도 활약중이다.
문학과 음악이라는 각각의 분야에서 전통예술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 전통적인 시어로 현대적 서정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는 정복여 시인의 차분한 진행으로 이날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정복여 : 오늘 아침 김지하 선생님의 최근 시집 <화개>가 제 10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네요.
김지하 : 평범합니다. (짤막한 대답에 관객 웃음)
정복여 : 오정해씨를 섭외하는 중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음악인협회에 전화를 걸었더니 예술인협회로 하라고 하더군요. 그후 영화인협회, 방송인협회, 배우협회까지 거친 후에야 오정해씨의 연락처를 알아냈어요.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하신 분인 셈인데, 바쁘시죠?
오정해 : 사실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요. 아이 키우며 엄마로서, 주부로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라디오 진행 때문에 간간이 좋은 음악도 듣고 있고요.
정복여 : 두 분의 약력을 살펴보니 김지하 선생님과 오정해씨는 모두 전남 목포 출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아마 목포가 예술의 고장인가 봅니다. 혹시 두 분은 서로 아는 사이이신가요?
김지하 : 오늘 처음 뵙니다. 영화에서 봤는데 실제 만나보니 미인이시군요.
오정해 : 저도 선생님을 처음 뵙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뵈니까 너무 멋지신 것 같아요.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워서 우러러 봐야 할 것 같아요. 영광입니다.
정복여 : 두 분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김지하 선생님과 오정해씨의 문학이나 음악이 전통문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김지하 선생님께서는 고달픈 민중의 신명과 개성을 표현한 ‘담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셨고, 오정해씨는 ‘국악가요’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셨지요.
오정해 국악은 어렵고 지루하고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친숙하게 대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장르가 이 국악가요에요.
“70년대가 오적(五賊)이었다면 지금은 오백, 아니 오천적쯤 될 거요”
정복여 : 김지하 선생님은 60~70년대 어두웠던 우리 시대를 밝혀주는 등불이셨지요. 특히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는 민중의 뜨거운 반응을 얻기도 했는데, 선생님의 문학이 그 당시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김지하 :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합니까?(관객 웃음) 먼저 근사했다고 말씀하시면 그런가 보다 하겠습니다.
정복여 : 그래도 이 자리에서 선생님을 통해 꼭 듣고 싶은데요.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는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의 <자유>라는 시를 변형한 겁니다. 이른바 ‘표절’은 아니고요. 예전에 유신헌법이란 것이 있었어요. 젊은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텐데, ‘종신 대통령’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헌법이 발표된 후 친구집에서 자고 내설악으로 도피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골목에 나왔는데, 누가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민주주의 만세’라고 써놓은 것을 봤어요. 그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서 쓰게 된 시입니다.
정복여 : 김지하 선생님의 시는 연극인 임진택씨에 의해 판소리로 재현되기도 했는데. 혹시 오정해씨도 현대 소설이나 시를 판소리로 부를 의향은 없으신가요?
오정해 : 솔직히 시인의 마음을 담은 귀한 작품을 훼손할까봐 겁이 나요. 하지만 이 시대의 ‘단가’를 꼭 해보고 싶어요. 단가란 판소리에서 짧게 목을 푸는 노래인데, 당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거든요. 시인의 글귀로 단가를 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시인 김지하 & 국악인 오정해의 ‘명동 문학까페’ 만남

세대를 넘어선 국악과 시의 만남. 정복여 시인(오른쪽)의 진행으로 오정해씨(왼쪽)와 김지하 시인(중간)은 시종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다.

정복여 : 김지하 선생님께선 <오적>을 발표하시면서 재벌, 국회의원 등 다섯 부류의 적을 꼽으셨잖아요. 현재에도 오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만일 있다면 어떤 부류라고 꼽으실건가요?
김지하 : 지금은 오적 정도가 아니라 오백, 아니 오천적쯤 될 겁니다. 다 열거할 수 없어요.
정복여 : 우리는 사방이 도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군요(관객 웃음). 몸을 잘 사려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정해씨는 영화 <서편제>가 그토록 유명해질 것을 예상하셨나요?
오정해 : 아니에요.
정복여 : 당시 스승이신 김소희 명창께서 오정해씨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두고 많이 걱정하셨다는 기사도 있었는데요.
오정해 : 영화를 하기 전에 개그맨 이원승씨와 <하늘천 따지>라는 연극을 먼저 했어요. 그것이 첫 외도였죠. 당시에는 선생님께서 반대하셨어요. 솔직히 그때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제가 후배를 가르치다 보니까, 선생님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소리라는 것이 힘든 작업인데도 어떤 큰 영광이나 명예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기가 쉽거든요. 반대로 영화 <서편제> 출연 당시에는 선생님이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시사회에 오셔서 제 등을 토닥여주기도 하셨는데, 기사에는 엉뚱하게 제가 파문당했다, 쫓겨났다고 보도가 됐더군요.
정복여 : 지난 6월은 월드컵이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김지하 선생님께서 붉은악마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하신 것을 봤는데요.
김지하 : 약 7백만명의 인파가 아니, TV 앞에 붙어있는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약 3천5백만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이들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흩어지면서 모이고 모이면서 흩어지는 동안 사고 한번 내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고 아, 우리 민족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랑스러워 해도 됩니다. 다만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3박자와 2박자, 대∼한민국, 그리고 빨간 깃발은 모두 문화적 공적이에요. 나는 4·19세대지만 그때는 우리가 한 것이 혁명인지 몰랐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가 나면서 우리가 한 것이 혁명인 줄 알았고, 그때부터 우리는 민족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시작입니다. 붉은악마도 앞으로 할 일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민족통일도 되고, 아시아가 세계 인류에 이바지하는 길도 열릴 것입니다.
정복여 : 김지하 선생님은 서울대 미학과를 나오셨죠? 어릴 적 꿈이 화가였다고 들었는데 문학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궁금합니다.
김지하 : 당시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가 예순둘인데, 우리 때만 해도 그림은 배고프다고 해서 못하게 했어요. 그 때문에 스스로 검열을 했던 것 같습니다. 미술은 안된다고. 그런데 지금 그림보다 더 배고픈 시를 짓고 있어요. 그것은 명동과 관계가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명동에서 하숙을 했었는데, 국어시간에 시를 쓰는 숙제가 있었어요. 당시 내 눈에 비친, 이상한 옷을 입고 거리를 오가는 현대여성에 관한 시를 지었는데, 국어 선생님께서 부르더니 시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며 시집을 빌려주셨습니다. 그때부터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이런 분들의 시를 읽었어요. 덕분에 그림보다 더 배고픈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명동에 오니까 그 생각이 나는군요.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게 낫겠다 싶어 요즘에는 먹물로 그림을 자꾸 그립니다. 결국 언젠가는 시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아요. 여러분은 아이를 낳거든 하고 싶은 대로 놔두기 바랍니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시인 김지하 & 국악인 오정해의 ‘명동 문학까페’ 만남

젊은이들의 요청으로 사인을 해주고 있는 김지하 시인.

정복여 : 작년 인사동에서 난초 그림전을 여셨지요. 말씀을 들으니, 혹 선생님께서 시보다 난을 치는 데 더 무게를 둔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김지하 : 글쎄요, 아마도 시를 쓰겠지요. 사람에게는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은 부모도 못 막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마시란 이야기예요. 오정해씨처럼 노래하고 싶다면 노래하게 해야지 못하게 하면 노래보다 더 배고픈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정복여 : 최근 시집 <화개>를 보면 선생님의 변모가 느껴집니다.
김지하 : 예술에는 선생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옆에서 도와줄 뿐이지요. 자기 안에 ‘귀신의 세계’가 있어요. 그 안에 숨어있는 신령한 세계가 소리하도록 선생은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선생한테 배울 생각 말고, 책에서 배울 생각 마시기 바랍니다. 그림은 그리고, 시는 쓰고, 노래는 하는 것입니다.
오정해 : ‘예술에는 선생이 없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도 판소리를 누구의 권유로 시작한 게 아니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소리’를 듣고 좋아서 5학년부터 시작했어요. 뭔지 모르고 그저 좋아서 시작했다가 김소희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웠어요. 지금은 소리한다고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소리 공부에 게을러진 상태지만요.
정복여 :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의 따님이 김지하 선생님의 부인이신데요. 최근 ‘아내를 스승으로 모시고 살 만큼 공처가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화개>의 ‘아내에게’라는 시를 보면, ‘내가 뒤늦게 나무를 사랑한 것은 깨달아서가 아니라 외로워서이고, 내가 아내를 사랑한 것은 외로워서가 아니라 깨달아서다’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실제 선생님께서는 어떤 깨달음이 있으셨나요?
김지하 : 앞으로는 공처가라는 말을 쓰지 마세요. 여자한테 잘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여자는 남자한테 잘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마누라가 없다면 내가 밥해 먹어야지 별 수 있나. 소지(청소)할 사람이 없다면 자기가 해야 하는 거지. 나는 공처가가 아니에요. 젊었을 때는 감옥에 오래 있어서 집사람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었어요. 그렇다고 내가 마누라 패는 일은 없었어요(관객 웃음).
정복여 : 10년 수감생활을 통해 젊은 날 많은 것을 잃으셨는데요. 한편으로 수감생활을 통해 얻으신 것도 있지 않으신가요?
김지하 : 자유가 좋은 겁니다. 감옥은 없어져야 합니다. 감옥에 오래 있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오래 있으면 병이 생깁니다. 그 안에서 교훈? 개똥도 없습니다.
정복여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구체적으로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면 언제를 꼽겠습니까?
김지하 : 자꾸 점수 따는 말만 시키시는군요. 또 점수 딸 얘기를 하겠습니다(웃음). 젊어서는 감옥 가는 일이 겁나지 않았어요. 유신 이후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첫아이를 가졌는데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일 일이 생겼어요. 안할 수도 없었고 하자니 가정을 떠나기 싫었어요. 내 나이 33세, 처음으로 맛본 가정입니다. 감옥 가는 게 부담이더군요. 아주 절망적이었어요. ‘빈 산’이라는 시가 그 무렵 나왔어요. 내 시가 별로 절망적이지 않은 편인데, 그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어요. 아내와 가족에게 미안해서 정말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그 시절을 넘겼는지 모르겠어요.
정복여 : 오정해씨도 소리를 하면서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오정해 : 여고시절, 김소희 선생님 댁에서 3년간 공부를 했어요. 서양음악의 레슨이라면 시간당 레슨비를 치르고 배우면 그만이지만, 우리 전통음악은 다릅니다. 먼저 인간적인 교육을 하죠. 사람으로서 갖출 예절, 사람 대하는 법 등을 먼저 배우게 해요. 그 과정도 혹독합니다. 사춘기의 소녀가 하기엔 버거운 경험이었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가 없다는 게 힘들었어요.
정복여 : 이곳 명동에 얽힌 추억이 있는가요?
김지하 : 학생시절 학생운동도 했지만 연극운동도 했습니다. 최불암씨와 같이 공연도 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하는 술집이 이곳에 있었어요. 목이 마르면 그 술집에서 술을 얻어 먹곤 했어요. 그때는 술을 얻어 마시는 게 부끄럽지 않았어요.
오정해 : 전 명동에 얽힌 큰 추억은 없어요. 단지 사람이 많다는 것. 사람 많은 곳에 가본 일이 드물어서 일부러 사람들의 부딪힘을 느끼기 위해서 찾아오기도 했지요.
정복여 :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김지하 : 외국인 노동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도 한때 농촌에서 도심의 공장으로 취직하기 위해 남녀가 농사를 버리고 올라왔었는데, 그들의 처지가 지금의 외국인 노동자와 같습니다. 적선이나 하듯 도와주는 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체의 산업경제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저 복지기금을 낸다거나 마음으로 동정하는 소극적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정해 : 저는 국악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여러분, 이런 자리에 많이 오세요. 그리고 직접 듣고 좋으시면 앞으로 공연장으로 오세요.
대담 중간에 오정해씨가 KBS 드라마 <이제마>의 삽입곡인 ‘여인’과 단가를 부르자, 김지하 시인은 자신의 시 ‘빈 산’을 직접 낭독함으로써 화답하기도 했다. 오정해씨와 온 관객들이 어우러져 흥겨운 ‘진도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아홉번째 명동문학카페의 밤은 저물었다.
젊은이들의 요청으로 사인을 해주고 있는 김지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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