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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유쾌한씨를 보라

옛날 장난감 수집, 보존, 연구하는 현태준의 별난 즐거움

“남들은 보잘것없다지만, 우리의 추억이 담겨있어 좋아요”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지재만 기자

2002. 12. 18

우주소년 아톰, 철인 28호. 이것들은, 7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른바 386세대에게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문화적 기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한 아이의 아빠, 엄마가 돼서 ‘추억의 장난감’들을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저씨의 장난감 일기>의 저자 현태준씨는 그 대답의 적임자가 아닐까 싶다. 5천점이 넘는 장난감을 수집하면서 엽기발랄한 책을 펴내고 있는 이 ‘뚱땡이 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하다.

옛날 장난감 수집, 보존, 연구하는 현태준의 별난 즐거움
동그란 종이딱지, 튜브에 든 본드를 빨대에 돌돌 만 후 불면 무지갯빛 풍선이 만들어지는 동아풍선, 호~불면 파이프 안의 공이 춤을 추던 마도로스 파이프, 프라모델로 많이 나와있던 미니 장갑차와 지프차, TV방영 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우주소년 아톰과 철인 28호 인형…. 70년대 어린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대표적 장난감 목록이다.
군것질거리라고는 마미 비스킷, 신앙촌 미루꾸(밀크 캐러멜) 밖에 없던 가난한 시절, 연탄난로가 피워진 침침한 만화가게에 재미 삼아 들어갔다간 엄마한테 귀를 잡혀 끌려나오기 일쑤던 그 시절에는 지금 보면 투박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이런 장난감도 귀하디 귀한 것으로 대우받았다.
‘그땐 그랬지’ 아련한 추억을 안겨주는 그 시절 장난감들이 한권의 책 속에 담겨졌다. <아저씨의 장난감 일기>의 저자 현태준씨(37)는 유년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접했던 장난감을 다양한 도판과 함께 수록했다. 아울러 익살스런 문체로 그 시절과 장난감에 얽힌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낸다.
‘장난감 수집’이 취미라는 이 수상한 아저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신식 공작실’ 사무실을 찾아갔다. 15평 남짓한 사무실은 천장까지 빼곡하게 장난감과 교재 상자로 들어차 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형국이다. 산발한 인형들은 저 좋을 대로 자리잡고 손님들을 맞는다. 비좁기는 바닥도 마찬가지. 쌓여있는 잡다한 물건들을 피해서 요령껏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야 한다.
가까이에서 본 현씨는 자신의 캐릭터와 똑 닮았다. 얼굴을 반 이상 가리는 두꺼운 뿔테 안경, 푹 눌러쓴 털모자, 큰 덩치에 어린애같이 천진한 표정과 말투.
“사람들에게 장난감을 수집한다고 하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해요. 하지만 어린시절 장난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잖아요.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장난감을 잊어버린다면 애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전 동심을 찾자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저 동년배 친구들끼리 ‘맞아. 우리 유년기는 저랬어’하고 맞장구치면서, 작지만 소중했던 역사를 잊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그가 장난감 수집을 시작한 것은 96년. 아내 남인숙씨(35)와 ‘신식공작실과 얼레꼴레’라는 가게를 홍대 앞에서 운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식공작실과 얼레꼴레’는 특이하고 촌티나는 소품을 파는 가게였다. 동전이 들어갈 때마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종이 저금통이나 어릴 적 교과서에 등장한 철수와 영희를 주인공으로 한 배지, 유치하지만 정겹게 느껴지는 종이소품들을 팔았다. 그때 가게 옆에 오래된 문방구가 있었다. 점포 정리를 하던 주인 할아버지는 “필요한 거 있으면 싸게 팔게”라고 했다. 뒤져보니 재미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1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다량의 프라모델을 비롯한 낡은 장난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싸구려처럼 보이는 국산 장난감에 큰 애정이 가지는 않았다.
“98년 IMF가 터지면서 가게의 문을 닫았죠. 벌이도 신통찮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돈을 털어서 친척들이 있는 미국과 캐나다로 떠났어요. 그러나 거기서 그 나라의 장난감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깜짝 놀란 거예요. 옛날 옛적의 장난감들이 대부분 보존되어 있고, 그걸 애지중지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아, 우리에게도 옛날 장난감이 많았는데 하는 생각이 미쳤죠.”

옛날 장난감 수집, 보존, 연구하는 현태준의 별난 즐거움

‘짝퉁’ 철인 28호.

귀국한 후에 그는 본격적으로 장난감을 찾아다녔다. 돈암동과 같이 오래된 동네의 문방구에 특히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꼭 구하고 싶어도 이미 품절이 돼버린 것들도 꽤 많았다. 완구회사가 망하거나 재고분을 싹 처리한 경우가 그렇다. 그는 장난감들의 은인인 셈이다. 그냥 두었다면 쓰레기통이나 소각장에 처박혔을 테니, ‘목숨’을 구해준 게 맞다.
현씨는 서울대 미대 도자기공예과를 졸업했다. 현재 각종 잡지에 만화나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재하고,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있다. 스스로 ‘대학시절부터 예술적인 작품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투박하고 못난 우리 장난감을 사 모으는 일이 정말 좋을까 궁금했다. 선진국의 장난감은 얼마나 세련되고 정밀한가.
“처음엔 솔직히 짜증이 났어요. 사기도 싫을 정도였죠. 그런데 모으다 보니까 특징이 보여요. 우주소년 아톰을 볼까요. ‘원본’인 일본 아톰을 그대로 베껴내질 못하니까 어설픈 대로 ‘짝퉁’ 아톰을 만들어냈는데, 그 표정이 이상하게 불쌍하고 측은해요. 우리 정서와 비슷한 구석이 보이면서 그게 정겹고 좋아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아무리 못 만든 거라도 꼭 사요.”
TV에서 보았던 씩씩하고 정의로운 아톰. 그 아톰을 가지고 싶었던 아이들. 그러나 실제 아이들 손에 쥐어진 건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든 표정이거나 얼굴은 어린데 몸은 청년의 것을 달고 있는 ‘짝퉁’ 아톰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아톰’에 로켓추진 장치를 부착해서 남루한 현실을 잊고 날아올렸다. 못난 우리 장난감마다 이런 어린시절의 향수가 오버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온갖 먼지를 뒤집어쓴 잡다한 장난감을 모으는 걸 이해해줄 아내가 어디 있을까. 현씨는 갑자기 꾸중 듣는 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물론 싫어하죠. 아내가 처음엔 질색을 했어요. 장난감에 묻은 먼지와 곰팡이 때문에 1년 내내 비염으로 고생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만큼 이해해주니 다행이죠. 여하튼 집에는 절대로 위생상 둘 수가 없어요. 쥐똥, 먼지, 곰팡이… 어휴, 세살 난 아들을 생각하면 절대로 안돼요.”
홍익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아내 남씨와는 홍대 앞 록바에서 춤추다 만났다고 한다. 당시 남씨는 패션디자이너였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뚱뚱하지 않았다는 현씨를 보면서 ‘재밌는 남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 부부는 취향도 비슷했다. 만난 지 1년 반 만에 결혼했고 서로 재미난 일을 하며, 이제껏 살아왔다. 한때 패션업체 ‘쌈지’의 디자인 실장으로도 일했던 아내 남씨는 지금은 아이들 동화책을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결코 평범한 동화책은 아닐 듯싶은데, 얼굴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남씨는 그저 빙긋 웃고만 만다(사진촬영도 극구 사양했다).
요즘 영화관에서는 <몽정기>라는 작품이 상영중이다. 유치해 보이는 선과 색채로 눈길을 확 끄는 포스터를 보고 ‘어디서 본 듯한데…’하고 갸웃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는 작년에 출간된 현씨의 책 <뽈랄라 대행진>을 봤을 것이다(그가 포스터의 그림을 그렸다).
‘뽈랄라’는 ‘뽀르노’와 ‘랄랄라’의 합성어다. 남의 시선 의식하고 체면 차리느라, 좋아하지만 결코 내색할 수 없는 것들을 뽀르노라 칭한다면, 그걸 드러내고 ‘랄랄라’ 좋아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캐릭터 ‘뚱땡이 아저씨’는 잘 씻지 않아 지저분하고, 여자들만 보면 응큼한 시선을 보내고, 제육볶음과 탕수육을 너무 좋아해서 살이 쪄버린 별볼일 없는 아저씨다.

옛날 장난감 수집, 보존, 연구하는 현태준의 별난 즐거움

그는 96년부터 장난감을 수집, 현재 5천여점이 넘는 우리 장난감을 보유하고 있다.

“ ‘아저씨’라는 표현은 별볼일 없는 30~40대 남자를 부르는 표현이잖아요. 권위적인 ‘선생님’이라거나 ‘사장님’하고 달리, ‘아저씨’는 친근하고 약간 막 대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을 주고요. 왜 자기모멸적인 표현을 쓰느냐고 하는데, 전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 잘난 놈이 아니거든요. 어렸을 때도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고백 한번 못할 정도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어요. 전 ‘아저씨면 어떠냐, 그러니까 희망을 가지고 더 열심히 살자’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아저씨의 좋은 점이라고 봐요.”
출간 당시 상당한 화제를 모은 <뽈랄라 대행진>은 ‘매월 18일은 바람피는 날- 너도 나도 동참하여 선진가정 이룩하자’는 황당한 표어가 담긴 포스터와 알록달록 재밌고 유치한 만화, 그의 은밀한 고백이 숨겨져 있는 소년시절 일기장까지 등장하는 난잡하면서도 재미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솔직함이다. 아줌마 아저씨들은 너나없이 킬킬거리며 그의 책을 읽었고, 심지어 패션업체 <쌈지>의 천호균 사장은 지나치게 점잖 빼는 재미없는 모임에 갈 때마다 ‘문제의’ 포스터를 보여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 정도였다. <뽈랄라 대행진>은 또한, 여선생님의 블라우스 사이로 비치는 브래지어끈만 봐도 잠을 못 이루던 사춘기 소년의 ‘아저씨’ 버전이다. 돌이켜보면 유쾌하진 않을지 몰라도 외면할 수는 없는, 주체할 수 없는 성욕과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던 소년기에 대한 정직한 응시.
“남세스런 내용이라서 여자 독자들에게 욕 먹지나 않을까 우려했지만, 웬걸요. 여자 독자들이 더 재밌대요. 아내도 그랬고요. 반면에 남자 독자들은 제 책을 썩 좋아하지 않던걸요. 아마 숨기고 싶은 응큼하고 치사스런 남자들의 속성을 까발린 게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뽈랄라 대행진> 이후 그는 그토록 좋아하는 제육볶음과 탕수육을 자제하고 있다. 더 이상 살쪄서는 안된다는 위기감 때문이라고 했다. 또 지저분한 것도 많이 고쳤다. 이빨 닦고 손 씻지 않고는 귀여운 아들 근처에도 못 가게 하는 ‘마나님’ 때문이다.
“남자들의 응큼한 속내 까발린 <뽈랄라 대행진> 여자들이 더 좋아해요”
“그동안 책에 실린 장난감을 구입하고 싶다는 제안은 받지 않았느냐. 특이한 장난감인데다가 한정 소장품인 만큼 마니아들의 표적이 될 것 같다”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그런 전화는 한통도 받은 바 없다”고 뜨악한 반응을 보인다. 그 표정에는 자신만큼이나 장난감을 좋아하고 수집하는 ‘또라이’가 또 있느냐는 의아함도 서려 있다. 물론 그의 주변에는 어린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난감에 애착을 보이거나 각종 완구들을 왕성하게 소비하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이른바 ‘키덜트족(kid + adult의 합성어. 동심의 세계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는 순수한 감성의 소유자를 일컫는 용어)’ 말이다. 그러나 현씨는 ‘키덜트족’이란 말에 펄쩍 뛰었다.
“‘키덜트족’이라니 정말 질색이에요. 어떤 심리학자는 ‘키덜트족’을 두고 복잡한 현대사회의 경쟁과 스트레스를 잊고 어린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퇴행적 행동이라고 잘난 척 해석을 하더군요. 언론도 그래요. 일목요연 정리 안 하면 큰일 나나요? 자신들이 용납할 수 없고 거슬리는 것들은 무조건 ‘이는 어떤 어떤 것이다’하고 정의 내려서 변방으로 밀어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인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키덜트족 = 철 없는 어른’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에 반기를 드는 현씨. 하긴 30~40대 보통 아저씨들의 눈에는 이들이 어처구니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자. ‘군대 이야기, 정치 이야기, 학벌 이야기’ 빼면 할 얘기가 없는 아저씨들보다야 이들이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기성의 권위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이들의 문화는 얼마든지 21세기적 가치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책들을 계속 낼 겁니다. 절 더러 삐딱하다거나 엽기라거나 발칙하다는 분들도 있는데요. 전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할 뿐입니다.”
그저 앞으로도 ‘뽈랄라 아저씨’로 살고 싶다는 현태준씨의 마지막 말이 유쾌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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