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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정화 앞장선 청담 대종사 평전 낸 혜자 스님

“청담 스님은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진리를 실천한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지재만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2.12.17 10:40:00

최근 도선사 주지 혜자 스님이 한국 불교사의 큰스님인 청담 스님의 평전 <빈 연못에 바람이 울고 있다>를 펴냈다.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중앙종회 의장을 지낸 청담 스님은 성철 스님 등과 더불어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고 불교정화를 위해 수많은 불전(佛戰)을 치러낸 인물이다.
시봉으로 청담 스님의 임종을 지켰던 혜자 스님의 입을 통해 들어본 그의 숨겨진 명암.
불교정화 앞장선 청담 대종사 평전 낸 혜자 스님
‘청담 대종사 탄신 100주년’을 기려 삼각산(북한산) 도선사는 추모의 염으로 가득 찼다. 100주년을 기념해 3만6천5백등의 등불을 밝혔고, 경내에 청담 스님의 기념관이 건립됐다. 지난 10월 15일, 도선사 야외무대에서 열린 청담기념관 개관식에는 김성재 문화관광부 장관, 김수환 추기경 등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축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청담 스님을 회고했다.
“저는 청담스님을 68년에서 71년 열반하시기 전까지, 이른바 종교간의 대화의 자리를 통하여 여러 차례 뵐 수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사적으로도 한두 차례 더 뵌 것으로 기억합니다. … 청담 스님은 분명히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저에게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길을 찾는 인간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 분이 구한 진리와 찾은 길은 한국 불교의 교단정화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청담 스님이 불교정화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는지는, 저를 찾아오시어 가톨릭에서는 수도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사제 양성을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친히 남녀 수도원과 신학교를 찾아가시기까지 한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스님이 구하신 것은 불교정화 이상의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분명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큰스님이었습니다.”
불교정화. 해방 이후 국내 각 사찰의 실질적인 소유권, 운영권은 대처승에게 있었다. 그런 와중 54년 이승만 전대통령은 ‘독신 비구승에게 사찰 농지를 반환하여 세계에 자랑스러운 사찰 문화재를 보호하게 하라’는 취지의 ‘사찰정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청담 스님을 위시한 비구승들은 승려 자격의 8대 원칙을 세워 대처승의 승려 자격을 박탈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찰의 소유, 운영권을 되찾으려는 운동을 벌였다. 불교정화 운동은 비구와 대처 사이의 치열하고도 오랜 공방 끝에 비구측이 종권을 확보하고 태고사(현 조계사)를 인수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다시 분쟁이 벌어져 70년 현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종단이 양분되는 사태를 맞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청담은 불교정화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때문에 혹자는 한국 불교 정법 회복의 일등 공신으로 청담을 추모하고 혹자는 종단의 극한 대립을 만든 관제승으로 그를 폄훼하기도 한다. 열반에 든 지 31년.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청담에 대한 재평가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 최근 그의 마지막 시봉이었던 현 도선사 주지 혜자 스님(50)이 이상균 기자와 더불어 청담 평전을 펴냈다. 14세 때 출가해 청담 스님이 열반에 든 71년까지 도선사에서 말년의 청담을 모셨던 그는 청담 스님의 생애를 조목조목 고증, 기록하는 힘든 작업을 해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라는, 살불살조종(殺佛殺祖宗)의 전통을 갖고 있는 불가에서 기념관을 짓고, 평전을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일지 모르나 중생교화, 대중포교를 위해선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행장을 후대에 전하는 소임이 스님과 제 인연 속에 있나 싶습니다.”
출가전, 청담은 항일 투쟁에 앞장선 우국 청년이었다. 그가 불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대의 명승인 포명 스님과 만나면서부터다. 당시 진주 농업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청담은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호국사에서 물을 마시게 됐다. 정신없이 물을 마시는 것을 본 포명 스님은 “갈증이 심했나 보군. 그러나 마음이 타는 것을 물로 식힐 수는 없지”하며 말을 걸어왔다.
“스님, 마음이 괴로울 때 이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 마음을 이리 내어놓으면 편하게 해주지.”
묘한 선문답 끝에서 한 깨달음의 서광을 보았던 것일까, 청담은 그 길로 출가를 결심했다. 그러나 아직 학생 신분인 그를 선뜻 받아주는 절은 없었다. 해인사, 백양사 등으로 다니며 출가할 뜻을 밝혔으나 학업을 마치고 오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고교 졸업을 1년 앞둔 1926년, 그는 일본 유학중인 친구를 따라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효고켄 송운사 주지와 잘 알고 있던 친구가 출가를 주선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청담은 그곳에서 행자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후 송운사 주지 아키모도 준카 스님은 청담에게 엉뚱한 심부름을 시켰다.
“푸줏간에서 고기를 사와라.”
중에게 고기를 사오라니! 분노한 청담은 그 길로 귀국선에 올랐다. 이 일은 훗날 그가 ‘왜색 불교’를 몰아내기 위해 앞장서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분분하다. 비록 대처를 허용했지만, 일본에서도 승려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때문에 이 심부름은 청담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선문답이었으리란 해석도 있다. 어찌됐건 청담은 그해 겨울, 조선으로 돌아와 경남 옥천사에서 정식 출가했다.

불교정화 앞장선 청담 대종사 평전 낸 혜자 스님

소년 시절 청담 스님의 시봉을 맡았던 혜자 스님(현 도선사 주지)은 스님의 유품을 모아 청담 기념관을 세웠다.

출가 이후 청담이 보여준 수행의 엄준함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참는다는 뜻의 인욕(忍辱)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훗날 불교계에서는 인욕제일 청담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그는 한겨울에도 항상 맨발을 고집했고, 방에 불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젊은 시절 청담은 눈이 서너길이나 쌓여 막혀버린 고산준령 암자에서 홀로 보름 넘어 식음을 전폐하고 가부좌로 정진하다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큰스님(청담)은 외출후 돌아오면 먼저 후원(부엌)에 들리셨는데 수채 구멍을 훑어 콩나물 대가리를 손수 주우셨습니다. 그리고 나지막히 ‘이걸 끊여 내 상에 올리라’고 제자들에게 명했습니다. 또 아침은 반드시 죽을 드셨는데 그걸 자시면서도 ‘옛 스님들은 하늘의 별이 비칠 정도로 묽게 먹었는데 너무 되다’며 질타를 하셨죠.”
엄중한 출가 수행중에도 독립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일본 경찰의 심한 고문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런 고난의 시절이 지나고 드디어 해방을 맞았다. 47년, 청담은 성철 등과 함께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며 봉암사로 들어갔다. 이른바 이것이 현대 한국 불교의 혁명적 사건, 봉암사 결사다. 봉암사 결사는 한 신자가 불경을 시주하면서 시작됐다. 청담, 성철, 자운, 성수, 도우, 홍경, 종수 스님 등 당시의 학승들은 그 불경을 들고 봉암사에 모여 앉았다. 봉암사에서 제대로 불경을 공부하며, 부처님 법대로 청정한 수행을 실천에 옮기자는 취지의 이 모임은, 결사의 심정으로 모였다 하여 훗날 봉암사 결사라 부르게 됐다.
성철과 청담. 동시대의 도반으로 봉암사 결사를 같이했던 두 사람은 이후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성철은 불교 정화에 대해 종교적인 해법을 주장했다. 그는 통치자의 부름에도 “중과 위정자가 할 일이 따로 있다”며 만남 자체를 거절했다. 반면 청담은 경무대와 청와대를 드나들며 비구 중심의 종단을 만들자는 불교정화 운동에 대해 정권이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인욕고행의 수행을 거쳐온 점에서 두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이후 봉암사 결사의 뜻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54년, 이승만 전대통령의 ‘사찰 정화 담화문’ 발표 이후 본격적인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됐다. 청담은 “설령 금생의 성불을 미룬다 하더라도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고 부처가 되겠다”며 선봉에 나섰다. 그러나 대처승을 내쫓으면서 그 또한 인간적 고뇌와 번민을 피할 수는 없었다. 혜자 스님은 청담의 말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스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우리 제자들이 들 것에 모시고 산길을 내려갔습니다. 산중턱쯤 내려갔을 때 스님이 잠시 쉬자고 하시더니 제자들에게 물으시더군요. ‘내가 불교정화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절에서 나가게 했다. 그러니 나에게 원한을 가진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밤중에, 이런 산속에서 나를 해치려고 덤벼든다면 너희는 어찌하겠느냐?’ 하고요. 그래, 당시 기운 넘치던 상좌들이 호기롭게 대답을 했습니다. 수십명이 와도 단숨에 때려눕힐 테니 걱정마시라고.”
한밤중,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산길을 가다보니 노스님이 불안한가 보다고 제자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엄한 질책이었다.
“내가 보복을 당하더라도 너희는 상대방에게 덤벼들어선 안된다. 오히려 나에게 ‘스님의 인과를 믿으십시오. 다 받을만한 인과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해야 내 제자다.”
약 20여년간 갈등과 반목을 겪은 끝에 결국 종단이 70년 조계종과 천태종으로 양분되면서 불교정화는 일단락이 났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71년, 그는 ‘모든 일을 마쳤다’는 뜻이었는지 세수 70세, 법랍 45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71년 11월 19일 동국대학교에서 거행된 청담의 영결식에는 6만여명의 조객이 운집해 그의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지막을 따르는 대장례 행렬은 법구가 도선사에 이르기까지 계속 뒤를 이어 끊일 줄 몰랐다.

여성동아 2002년 12월 4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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