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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남자의 삶

한국 영화간판의 역사 보여준 광주의 ‘마지막 영화 간판쟁이’ 박태규

“손으로 그린 영화간판이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 기획·이지은 기자(smiley@donga.com) ■ 글·이서영 ■ 사진·박성배

2002. 12. 17

광주의 마지막 영화간판쟁이이자 민중미술작가인 박태규씨. 2002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이기도 한 그가 최근 광주 롯데화랑에서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박태규 전>을 열었다. 한국 영화간판의 역사를 보여준 전시회 이야기와 ‘쟁이’로서 치열한 그의 삶을 들어본다.

한국 영화간판의 역사 보여준 광주의 ‘마지막 영화 간판쟁이’ 박태규
새로운 것에 대해 열광하고 있는 사이 가만히 추억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들. 우리는 그 목록에서 손으로 그린 극장 영화간판을 확인한다. 붓의 속도감, 페인트와 광목천의 질감, 어눌한 사람의 냄새. 이런 것들로 인해 정겨웠던 극장 간판이 내려지고, 매끄럽기 그지없어 도리어 마음의 문턱에 걸리고 마는 세련된 실사 간판들이 걸리고 있다.
영화간판쟁이 3세대인 박태규씨(40). 10여년 동안 광주극장에서 간판을 그려온 그는 올해 안타까운 호칭 하나를 얻었다.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극장 대형화 추세에 밀려 광주에서도 단관들이 복합상영관으로 모습을 바꾸거나 문을 닫으면서 극장간판의 수요가 급속하게 줄어들었고 그 와중에 선배와 동료들이 대부분 전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맞춰오던 극장미술부의 후배가 극장 사정으로 떠나면서 그는 홀로 남았다.
“손으로 그린 영화간판이 사라져가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홀로 남았지만 여전히 씩씩하게 영화간판을 그리고 있는 그는 지난 11월 광주 롯데화랑으로부터 창작지원을 받아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박태규 전>을 열었다. 사라져버릴 지경에 처한 영화극장간판들을 우리 앞에 새롭게 불러 세우는 전시회였다. 전시장 안은 온통 영화간판의 숲이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그는 한국 영화사를 장식한 영화 60여편의 간판을 그렸다. 그것은 곧 한국사람들의 역사나 다름없다. <아리랑> <영자의 전성시대> <빙점> <만추> <여로> <김의 전쟁> <피아골> 등 대표적인 한국영화와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의 그림 속에서 서로 만났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영화들이 풍기는 추억의 냄새 때문인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특별한 감회에 젖었고 간판쟁이 역시 가슴이 벅찼다.
“마지막 영화간판쟁이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마침 제게 주어진 전시기회가 있어 영화간판의 역사를 정리하겠다고 결심했죠.”
상황반 자의반으로 영화간판 역사의 증언자가 된 그도 한동안 영화간판을 밥벌이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잘 그려진 영화간판을 보면서 대형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극장 간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생계해결의 목적이 더 컸죠.”
호남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80년대 학생운동이 격렬했던 당시 대학 미술패 활동을 하면서 걸개그림과 공동벽화 등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대형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만큼 잘 그려진 극장 간판을 보면 능숙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고. 졸업 후 어느날 극장 간판을 보다가 문득 ‘막막한 생계문제와 그림 그리는 일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저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극장 미술부를 찾아갔다.
“받아주기는 했는데, 다들 ‘네가 얼마나 버티겠느냐’ 하는 표정들이었어요.”

사실 극장 미술부 생활은 쉽지 않았다. 간판을 그리는 데는 얼씬도 못했다. 선배들이 그리고 난 후에 붓을 빨거나 다 그려진 간판을 손수레에 싣고 개봉관과 소극장으로 나르는 일을 해야 했다. ‘미대까지 나온 놈이 버티기 힘들 것이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버텼고 자투리 간판을 이용해 열심히 연습을 했다. 에나멜 페인트와 형광색 안료, 인쇄용 잉크 등을 배합해 간판의 화려하고 선명한 색깔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몇 개월이 지나자 다른 이들보다 빨리 기회가 왔다. 사실상 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글씨 쓰기와 분필 데생을 맡은 것. 그날은 극장에 들어온 이후 가장 기쁜 날이었다.
데생에서 채색으로, 그리고 소극장용 간판 전담자로 2~3년이 지나면서 그는 제몫을 해내는 간판쟁이로 성장해갔다. 하지만 그에게 간판은 간판이었다. 생활이고 생계를 해결해주는 방편이었다. 그의 꿈은 그곳에 없었다. 간판작업을 끝내면 시간을 쪼개 한쪽 귀퉁이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작업실을 둘로 나눠 한켠에서 간판을 그리고 한켠에서는 회화작업을 했다. 민중미술계열의 작가들과 함께 그룹전에 참여했고 나름대로 자기 색깔을 갖기 위해 분투했다. 미술패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 김희련씨 역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작업을 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힘겹고 어려운 일상을 견뎠다.
한국 영화간판의 역사 보여준 광주의 ‘마지막 영화 간판쟁이’ 박태규

그가 그린 영화간판들.


“어느날 제 그림을 보는데 참 낯설었어요.”
자신의 작품 속에 자기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극장간판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그림에는 극장간판과 관객들이 나누는 공감과 소통이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고민 속에서 그는 영화간판과 작업사이에 있었던 벽을 허물었다. 영화간판의 형식을 그림에 끌어들인 것. 일단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담은 가상의 영화를 떠올렸다. 그 다음에는 그 영화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영화간판을 그렸다. 제주도 4·3사건, 노근리사건, 함평양민학살사건 등이 그의 그림 속에서 새로운 역사영화로 탄생됐다. 작업이 명료해졌다. 그는 그 작품들을 모아 2000년 1월 <3인전>이라는 전시회를 가졌다.
“그렇게 작업하면서 ‘아, 영화간판 속에 내가 있었구나’ 깨달았죠.”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영화간판쟁이임을 즐겁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일단 마음이 편해졌다. 간판작업과 회화작업이 함께 풀려가는 기분이었다.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찾기 시작한 것. 그려내는 기술이야 선배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 여겨졌지만 어떤 작가보다도 치열하게 그려온 시간들이었다. 간판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던 것도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됐다. 영화간판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내려져 다시 개봉될 영화를 위해 하얗게 지워진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그는 사진으로라도 그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2002 광주비엔날레 프로젝트3-집행유예전>에서 그는 또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가상의 영화 <광주탈출>이 그것. 이 영화간판을 통해 그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속시원하게 털어놓았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평론가들은 그가 영화간판쟁이라는 생업 속에서 찾아낸 예술형식에 주목했고, 관람객들은 그가 전달하는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광주 롯데화랑의 지원프로그램으로 그는 또 한번 자신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다. 영화간판으로 가득 채운 전시회에서 ‘오늘도 광주극장의 간판을 그리고 있는 마지막 영화간판쟁이’로서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극장에서 영화간판이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자신이 할 일은 우리의 애정과 추억이 묻어있는 영화간판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전시가 끝나도 그는 여전히 영화간판을 그릴 것이다. 만약 극장에서 더 이상 영화간판이 필요치 않아진다면 영화간판을 들고 새로운 소통처를 찾아나설 것이다. 그는 스스로 다짐하듯 광주극장 홈페이지(cinemakwangju.com)에 심경을 담아 글을 올렸다. ‘영화간판이 나로 인해 역사 속으로 묻히지 않고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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