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야생초를 닮은 사람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박윤희(자유기고가) ■ 사진·김형우 기자

2002. 11. 21

”야생초와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진짜 농사꾼이 되고 싶어요” 감옥 안에서 자신의 고질병인 만성기관지염을 고쳐보려고 풀을 뜯어먹다가 ‘야생초 박사’가 된 양심수 황대권. 그는 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 간첩이 되어 13년 2개월 동안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는 동안 1백여종의 야생초를 직접 기르며 ‘생태주의자’로 변모하게 됐는데 최근 옥중편지를 엮은 책 <야생초 편지>를 내놓아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공동체 세상을 꿈꾸는 사람 황대권. 풀꽃 향기처럼 생생한 그의 내적 고백이 여기 있다

의 저자 황대권
‘제비꽃을 모듬야초무침에 넣으면(불행히도 이 안에는 따로 무쳐 먹을 만큼의 제비꽃이 없다) 보라색 꽃이 구미를 당긴다. 밥 먹을 때 꽃을 하나 따서 밥숟갈 위에 얹어 먹으니 향긋한 게 이색적인 맛이 나더구나. 대부분 사람들이 나물 하면 야초의 잎과 줄기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꽃까지 먹을 수 있는 야초들이 많다. 나는 나물을 할 때 꽃이 보이면 웬만한 것은 다 따 넣어서 무쳐 먹는다. <중략>…밖에 나가면 해 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각종 꽃을 따서 꽃 샐러드를 한번 만들어 먹는 것이다. 멋질 것 같지 않니?’ (야생초 편지), ‘제비꽃’ 중에서)
만일 당신이 1평 남짓한 감옥 안에 있는 한 무기징역수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그리고 이런 사연이 실린 봉함엽서 안에서 무기징역수가 직접 그린 실제 제비꽃 크기의 세밀화를 발견하게 된다면?
아마 무기징역수가 제비꽃에 바친 시간의 길이와 사색의 깊이를 떠올리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제비꽃의 보라색 꽃잎은 그의 들숨이고, 초록색 잎사귀는 그의 날숨처럼 느껴져 그가 감옥 안에서 살고자 몸부림치며 찾아낸 ‘숨구멍’ 하나를 본 듯한 참담함에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황대권씨(47)는 감옥에서 키운 야생초 체험담을 편지글 형태로 엮은 옥중서간집 <야생초 편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서울대 농대 출신인 그는 지난 85년 6월, 미국 유학 도중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잠시 한국에 들렀다가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체포되던 당시 그는 결혼한 지 10개월 된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있는 서른살의 가장이었다. 석방되기까지 그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은 자그마치 13년 2개월. 그 사이 연좌제 아닌 연좌제로 생계가 막연했던 부인이 떠났고 그의 30대가 몽땅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양심수란 이름으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못생기고 쓸모가 없어 사람들로부터 ‘잡초’라고 버림받은 쇠뜨기, 조밥나물, 애기똥풀 등 무려 1백여 종이나 되는 야생초를 감옥 안에서 키웠다. 그리고 야생초와 나눈 ‘교감’을 글과 그림으로 옮겨 세상 밖 사람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바로 <야생초 편지>는 안동교도소와 대전교도소를 거치며 그가 만났던 귀중한 ‘옥중 동지’ 야생초에 관한 이야기이자, 간첩 누명을 쓴 조작 간첩이 ‘생태주의자’로 변모하게 된 과정을 담은 희귀한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감옥 안에서 1백여종의 야생초 키우며 ‘토끼’라고 불린 양심수
여의도 생태공원에서 그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 8일. 그는 수수한 생활한복 차림에 몇가지 그림도구를 챙겨 들고 나타났다. 어떤 풀이 몸에 좋으냐고 말을 건네자 그가 대꾸 없이 한동안 미소만 짓는다.
“책 나오고 나서 그런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풀 한 포기 먹는다고 건강이 달라지겠어요? 우리의 생활 자체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생태주의적인 삶이 되어야지요.”
현재 그는 ‘생태공동체연구모임(www.commune.or.kr)’을 이끌며 국내외 생태공동체 연구를 하고 있는 생태공동체운동가. 그런데 <야생초 편지>가 출간된 이후 그를 마치 야생초를 활용한 ‘민간요법 치료사’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야생초 편지>를 읽다 보면 그가 야생초를 뜯어먹으면서 만성기관지염과 요통, 치통까지 고쳤다는 사실에 그간 ‘잡스러운 풀’로만 여겨졌던 야생초에 눈독 아닌 눈독을 들이게 된다.
“감옥 안에서 몸이 완전히 망가져서 죽도록 고생을 했어요. 특히 만성기관지염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죠. 어떤 날은 기침을 하다가 그대로 탈진해버리기도 했어요. 감옥이라 의사의 진료를 받기도 어려웠고 나눠주는 약이라고 해봤자 무좀환자나 배탈환자랑 별반 다를 게 없이 똑같이 처방되는 알약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래서 ‘내몸은 내가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야생초를 뜯어먹기 시작했어요.”
그는 야생초를 이용해 일종의 ‘자연요법’을 시도한 것인데, 딱히 어떤 풀이라고 할 것도 없이 약 1년 동안 1백여종의 야생초를 직접 키우고 날로 뜯어먹다 보니 감쪽같이 만성기관지염이 나았다. 감옥 안 동료들은 그를 ‘토끼’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그는 씀바귀, 질경이, 뽀리뱅이, 민들레, 명아주 등의 야생초를 이용해 ‘들풀모듬’ ‘야생초 물김치’ ‘야생초 초무침’ 등 다양한 야생초 요리를 직접 개발해 재소자들과 나눠 먹었다.
“야생초에는 우리가 모르는 맛과 향기, 영양의 에센스가 다양하게 들어 있어요. 그래서 야생초에 한번 맛을 들이면 일반 채소들은 싱거워서 맛이 없어요. 영양의 에센스는 다 야생초에 들어 있어요. 야생초를 먹게 되면 영양제나 비타민을 따로 먹을 필요가 없지요.”
감옥 안에 있을 때 그가 야생초나 자연요법, 동양의학과 관련해 섭렵한 책만 해도 큰 책장으로 4개가 되는데 그가 생활했던 감옥 안에는 그의 책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야생초를 절기마다 뜯어서 말려가지고 그걸 비닐봉지에 담아 방에 죽 걸어놓았어요. 한 10여 가지 말려서 이것을 분위기에 따라 차로 우려 먹었지요. 가령 내가 오늘 좀 우울하다 그러면 우울한 기분에 맞는 차맛이 있는데 그걸 달여 먹어요. 또 오늘은 즐겁다 그러면 즐거울 때 먹는 차를 마시고요. 이런 맛은 자기가 직접 연구해보면 스스로 알게 돼요.”
이런 방법으로 그는 자신이 직접 키운 국화꽃을 갈무리해두었다가 차로 만들어 마셨는데, 덕분에 천성적으로 기관지가 약했던 그가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겨울을 넘겼다.
출소 후 그는 자기 집 옥상에도 수십여종의 야생초 꽃밭을 만들어 여름이면 입맛에 따라 야생초를 뽑아 먹고 찬바람이 불면 야생초의 씨앗을 갈무리해 다음 봄을 기다린다.

의 저자 황대권
“그런데 감옥 안에 있을 때보다 출소한 후 몸이 더 망가지고 있어요. 도시생활 자체가 생태주의적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죠. 원래 커피나 청량음료를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는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그게 불가능해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야생초를 기르고 먹어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매일 술, 담배에 절어 있으면서 ‘자연요법’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는 역설적이게도 “감옥 안의 삶이 서울생활에 비교하면 훨씬 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무공해 삶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도시적인 생활습성에 익숙해지면서 감옥 안에서 건강에 효과를 보았던 ‘요료법(尿療法)’도 지금은 거의 중단한 상태다.
“오줌은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생수’예요. 또 오줌 속에는 우리 몸에 필요한 미량 원소가 들어 있는데 이런 것들이 몸속에 들어가 생기를 북돋아주거든요. 저는 감옥에서 매일 아침 제 첫 오줌을 받아 마셨고, 오줌으로 양치도 했어요. 감옥에서 잇몸이 나빠져 어금니만 8개가 빠졌는데 요료법을 하면서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거든요. 그런데 서울에서 살다 보니까 도저히 요료법을 할 수가 없더군요.”
그가 요료법을 못 하는 이유는 먹는 음식과 관련이 있다.
“출소 후 서울에 살면서 육류, 커피를 비롯한 각종 잡다한 것을 먹다 보면 다음날 자고 일어났을 때 오줌에서 악취가 나요. 먹는 음식에 따라 오줌의 색과 냄새가 달라지거든요.”
그는 “결국 ‘자연과 공생’하면서 ‘자기 삶의 총체성’을 유기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정신과 몸의 병을 고치는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런 인간과 자연의 순환고리를 무시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야생초를 먹거나 요료법을 실시하는 것, 또 그밖의 각종 자연요법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매우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런 고민에서 출발해 지난 2년 동안 영국 임페리얼 대학에서 생태농업 석사과정을 마쳤고 유럽의 여러 대안공동체를 직접 찾아 다녔다. 지금은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국내 50여곳의 생태공동체를 답사하며 이에 관한 편람을 만들고 있다.
“저를 이상주의자로 지적하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분명한 대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자연 속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지 못하더라도 ‘도시농업운동’을 하면서 생태주의적 삶에 가까워질 수 있어요.”
그가 제안하는 도시농업운동은 이렇다.
“앞으로 농산물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 더이상 농사를 못 짓게 돼요. 미국이나 중국, 호주처럼 광대한 면적에 어마어마하게 농사짓는 나라하고 우리하고는 가격경쟁이 될 수 없거든요. 저는 이 기회에 상업주의 농업을 아예 짓지 말자 이겁니다. 개인별 혹은 공동체별로 농사를 지어서 서로 나눠 먹자 그거죠. 주부들이 단독주택 옥상에서 하우스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도시에서 가까운 농토를 임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생태농장’을 만들고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 지금의 농업문제가 해결됩니다.”

의 저자 황대권
야생초에서 비롯된 그의 사색은 지금 각종 수입농산물로 파탄 지경에 이른 국내 농업문제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그의 부지런한 손은 그가 감옥 안에서 즐겨 먹었다는 이름 모를 야생초의 연필 소묘를 마쳐가고 있었다. 미대 지망생이었던 그는 틈만 나면 그림 그리기가 취미다. 원래 화가들의 엄지손가락은 그들의 이력만큼이나 유난히 ‘못생긴 표정’을 가지고 있는데, 연필을 놀리는 그의 손을 유심히 보고 있자니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유독 불거져 있다.
“군대에서 다쳐서 힘줄이 끊어졌어요. 지금도 엄지손가락을 위로 못 들어올려요.”
그런데도 세심한 관찰력으로 야생초를 쓱쓱 그려내는 솜씨가 놀랍다. 더구나 이 손으로 그는 출소 후 초보농사꾼 노릇도 했다.
“98년 출소한 후 한 5개월 정도 부모님 집에서 살다가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 2만여평의 임야를 개간했어요. 아버지가 무덤자리 하신다고 사두신 땅이었는데 워낙 버려져 있던 땅이어서 바위 캐내고 나무 뿌리 뽑아내느라 고생 좀 했어요. 산속이라 물이 없어서 플라스틱 배관작업까지 일일이 다 했거든요. 그때 ‘농부는 만능이어야 한다’고 절실히 느꼈어요.”
그때 2만 그루의 오가피나무를 심었는데, 국제사면위원회 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유학 가게 되면서 현재까지 농사꾼 직업은 유보해놓은 상태다.
“지금 당장 농촌으로 내려가 야생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지만 아버님이 중풍으로 많이 편찮으시니까 서울을 떠날 수가 없네요. 지금은 틈만 나면 제가 농사지을 땅을 찾아 전국으로 돌아다녀요.”
과거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으로 삶 전체를 뿌리째 빼앗겼던 그가 새롭게 뿌리내릴 땅의 조건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지기(地氣)가 통하는 곳이요. 그냥 한번 어느 땅이고 발을 처음 디뎠을 때 ‘아, 여기다!’ 싶게 저를 확 끌어당기는 땅이면 자리를 잡을 생각이에요. 풍수 책을 여러 권 보기는 했는데 산야를 지극 정성으로 헤매고 다니는 것말고는 별방법이 없어요.”
젊은 시절, 제3세계 정치학 및 혁명론에 빠져 있었던 그는 의외로 논리나 분석에 치우치기보다는 직관과 감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그는 감옥 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 마음으로 작정하고 <주역>을 공부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의 점괘를 들여다보고 그만 공부하려는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점괘에 서른부터 징역살이할 운명이라고 나오는 거예요. 무섭고 끔찍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주역책을 탁 덮어버렸어요.”
13년 2개월간의 ‘징역독’이 채 빠지지 않아서일까. 가끔 스타일을 구기는 사회부적응 현상이 그를 괴롭힌다.
“막 출소해서는 몰랐는데 몇년 지나니까 사회적응이 더 쉽지 않아요. 아직도 도시의 야경이 적응되지 않아요. 밤중에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하고 차들이 씽씽 달리는 것을 보면 괜히 촌놈이 처음 서울 온 것처럼 마음이 붕붕 떠서 싱숭생숭해져요. 게다가 일도 복잡하고 선후도 잘 안 가려지네요. 컴맹상태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런지 메일박스를 쳐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지금 답장 못한 이메일이 50통도 넘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답장 안해준다고 서운하게 생각하지만 제가 아직 인터넷에 적응이 안 돼요.”
80년대 이후, 시대의 유행에 포말처럼 휩쓸려간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장기수와 양심수 혹은 조작 간첩의 이름으로 13년을 살았던 황대권씨는 ‘전체와의 조화’와 ‘이웃과의 공생’을 염두에 두고 다시 실천의 중요성, 지속성이 갖는 의미를 치열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