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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 아줌마의 속시원~한 수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진 마력(魔力)

입력 2002.10.10 12:33:00

미안하다는 말은 가장 쉬운 말인 듯싶지만 실상 참 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직 가정과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하지 않고 친구들에게 왕따당하지 않고 안부전화를 받으며 살 수 있는 비결은 “미안해요”라는 말을 잘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큰 사고를 쳤을 때만 용서를 비는 게 아니다.
내가 오해했을 때, 뭔가 남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때도 미안하다고 말한다.
또 윗사람뿐 아니라 후배들이나 딸아이에게도 내가 잘못했을 경우 솔직하게 용서를 빈다.
그러면 오해는 사르르 풀리고 잘못은 죄사함을 받는다. ‘미안해요’의 형제는 ‘용서한다’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진 마력(魔力)
세상에서 가장 값진 말이 무얼까. 아름답고 고귀한 단어들이 많겠지만 난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가 가장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가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미안하다는 가장 쉬운 말이면서도 실상 내 입으로 하기가 무척 어려운 말이다. 오죽하면 미안하다는 말은 가장 하기 어려운 말(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이란 노래까지 있을까.
얼마 전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이런 말을 했다.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많아요. 수시로 끼어들기를 하는 얌체족도 있고 차비 깎아달라는 승객도 있고. 하지만 미안하다고 하거나 손신호라도 보내면 기분이 풀리죠. 누가 내 차를 뒤에서 박아도 먼저 ‘아이구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면 어지간하면 그냥 돌려보내거나 어떻게 하면 싸게 수리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아니 도대체’ 라면서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꼭 시시비비를 따져 보험처리를 하도록 하죠. 말 한마디면 수십만원도 버는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그 말을 아끼는지 몰라요.”
사실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수시로 혹혹거리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목숨 걸고 흥분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내가 아직 가정과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하지 않고, 친구들에게 왕따당하지 않고 안부전화를 받으며 살 수 있는 비결은 ‘미안해요’란 말을 잘하기 때문인 것 같다. 손윗사람들은 물론 선배나 상사, 심지어 후배와 하나밖에 없는 내 딸에게도 기꺼이 “죄송합니다”와 “미안해”라고 말한다.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흥, 잘못했다고? 그럼 뭐를 잘못했는지 명세표를 적고 앞으로 얼마나 잘할 건지 계획서를 써보라”고 하며 시비를 걸 사람은 드물다.
꼭 내가 사고를 치거나 실수했을 때, 상대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쳤을 때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는 게 아니다. 내가 오해했을 때도, 뭔가 남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때도 이 한마디만 하면 금방 “명랑 사회가 구현”된다.
만나보지도 않고 그냥 얄미워하던 이가 있었다. 남들이 그 여자를 여우라 했고 과거 행적을 과장되게 설명하기도 해서 난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인데 X표를 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아유, 그 여자가 말야. 완전히 두 얼굴인데다가 집안도 어쩌구 저쩌구” 하며 험담을 늘어놓은 적도 있다. 그러다 어느날, 그 여자의 친구 소개로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엔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괜히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함께 호~호 거리며 매운 낙지 볶음을 먹어서일까. 우리는 금방 식욕으로 우정을 느꼈고 알고보니 그 여자는 포장만 얄밉게 생겼지 속내는 다정다감한 여자였다. 다른 사생활이야 내 알 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난 그날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솔직히 댁을 잘 몰랐을 땐 굉장히 여우에다 경우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남들 소문만 듣고 나도 소문 좀 낸 과거가 있다우. 이제 실물을 확인하니 내가 오해한 것 같아요. 다시 좋은 여자라고 소문내줄 테니 나 너무 미워하지 마슈.”

그후로 우린 밥 벗으로 자주 만난다. 그날 밥값을 그 여자가 내서 내가 치사하게 마음을 바꾼 건 절대 아니다. 밥값에 버금가는 비싼 커피 값을 내가 냈다.
후배들에게도 수시로 “미안해” “어머, 그거 내가 잘못한 거야”라고 말한다. 언젠가 내 후배가 기사를 부실하게 써서 다른 선배에게 지적을 받아 우울해했다. 그 기사를 내가 봐줬어야 하는데 저녁에 행사가 있어 제대로 봐주지 못하고 먼저 넘기라고 한 거여서 책임이 사실 내게 있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 회사 근처의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사주며 또 잘못했다고 고백했다.
‘미안해요’ 형제는 ‘용서한다’
딸에게는 누구나 멋지고 존경받는 어머니가 되고 싶을 게다. 하지만 난 존경은 포기했다. 그저 사랑받고 이해받기만 원한다. 존경받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위엄과 권위를 자랑하느라 기진맥진하느니 그냥 내가 편하게 지내고 싶다. 물론 딸아이에게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는 않는다. 준비물을 안 챙겨주거나, 숙제를 돌봐주지 않은 것에 대해선 별로 미안하지도 않다. 다만 약속을 해놓고도 못 지켰을 땐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럼 입술이 삐죽 나왔던 딸아이도 “괜찮아, 다음부터 잘해”라며 자기가 엄마 같은 표정을 짓는다.
얼마 전에도 웃어른과 미묘한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아주 사소한 오해였는데 “저 분이 그러는데” “유인경이 그랬대요” 등 다른 사람들이 전해주는 말만 듣고 각자 억울해하고 괘씸해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나는 솔직한 내 감정을 토로한다며 그분에게 “어쩌면 그러실 수 있나요?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러시나요? 왜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등 항의를 했다. 평소엔 말을 버벅거리던 내가 마치 대본 연습을 한 배우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발음도 선명하게 말을 해버렸다. 그래서 누명을 벗고 속이 시원해졌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내 성격이 뜻밖에 과격하다는 것만 보여줬을 뿐 갈등의 골만 더 깊어졌다. 그러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내가 그분이라면 정말 너무 불쾌하고 어이없을 것 같았다. 후배가, 그것도 정확한 사실도 아닌 소문만으로 따지고 들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그래서 금방 꼬리를 내리고 용서를 구했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 메일을 보냈다.
“반성했습니다. 제가 아직도 공주병이 치유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해받을 수도 있는데 사건전말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고 제 억울함만 주장한 것 같습니다.”
당연히 오해는 스르르 풀렸고 죄사함(?)도 받았다. ‘미안해요’의 형제는 ‘용서한다’란다. 미안하다는 말과 항상 붙어다닌다는 말이다. 또 우리 마음이 우리 입을 이길 때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난 독자들에게 ‘미안해요’와 ‘감사해요’란 말을 동시에 하려 한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고 뭐가 고마우냐고요? 내가 그동안 여기에 수다 떤 글들을 모아서 책을 냈는데 일일이 못 전해드리니까 미안하고, 또 그걸 사주실 거니까 감사하다는 뜻이랍니다. 용서해주세요!!!

여성동아 2002년 10월 4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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