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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붉은 꽃의 노래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함정임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2.10.09 14:13:00

이제 가을도 중순, 시월이 가기 전에 그곳에 가야 한다. 백일하고도 하루 이틀이 지나도 꽃은 피어 어머니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외지로 떠났다가 돌아오던 그때처럼 어머니 어깨에 기대어 마지막 붉은 꽃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마지막 붉은 꽃의 노래
외지로 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면 주문처럼 되뇌이는 노래가 있다. 착륙을 준비하는 비행기의 급격한 흐름 속에 일으키는 현기증처럼 빛바랜 영혼을 울리는 노래다. 노래는 저 아래 펼쳐지는 강과 흙과 초목들처럼 피와 살과 뼈를, 그리하여 지난 여름의 짧은 인생을 들려준다. 노래는 폭풍처럼 몰아쳤던 격정적인 사랑을, 그리하여 폭풍과 함께 쓸려보내야 했던 쓰라린 사랑을 돌려준다. 노래를 부르며 나도 모르게 거울을 꺼내본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거울, 그러나 세월은 여전히 그 안에 흐르고 있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이성복 詩, ‘그 여름의 끝’)
백일홍을 보러 나갔다가 장미꽃을 보았다. 꽃은 깊어가는 가을에도 지천에 붉고, 지천에 지고 있다. 어떤 꽃은 꽃잎이 너무 헐벗어 야윈 모습이 안타깝고, 어떤 꽃은 작아도 늦게라도 온전히 피어나는 모습이 고결하다. 다투어 담 넘어 올라가던 장미 덩굴, 가시를 피해 간신히 꽃더미 아래 벤치에 앉아있다 가곤 했다. 장미 냄새 몸 가득 채우고 육교를 넘어오면 흰장미 노란장미 자랑 삼아 저만치 피어 있었다.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있는가. 장미를 보고 돌아오면서도 백일홍 생각을 끊지 못했다.
어머니는 백일홍을 늦여름 지나 늦가을까지 길렀다. 좀 일찍 꽃을 피운 백일홍은 팔월까지 모습이 화려했고, 좀 늦게 꽃을 피운 백일홍은 구월지나 시월까지 모습이 단정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한동안 꽃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집안 어디에도 꽃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차례 태풍이 지나가고 손님처럼 어머니가 내 집을 다녀가신 이후다. 외지에서 찍은 사진들과 지도들, 지도에 표시된 여러 도시들에서 거두어온 팸플릿들로 수북한 탁자 한켠을 비집고 유리컵이 놓여져 있다. 맨드라미꽃, 싸리꽃이 단출하게 꽂혀 있다. 어머니는 꽃이 꽂힌 그 컵에 둥글레차를 마셨었다. 그리고 원고 쓰는 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어린 외손자의 손을 잡고 육교 너머 작은 동산에 갔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어느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백일홍은 차마 꺾지 못할 꽃이더라. 담장에 울울하던 장미꽃 몇 송이 꺾어오실 때 하시던 말씀이었다. 백일홍보다 장미를 더 좋아한 나는 어머니도 내 마음과 같으리라, 그래서 가시를 피해 아프게 꽃대를 자르면서까지 장미를 가까이 두는 것이라, 오해했었다.
그 여름 나는 폭풍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이성복 詩, ‘그 여름의 끝’)

마지막 붉은 꽃의 노래
지난 여름 백일홍을 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화단에는 언제나 백일홍이 있었다. 붉은 꽃은 물론 노란 꽃도 있었다. 백일홍은 백일 동안 붉게 타오르기도 했지만, 백일 동안 노랗게 빛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여러가지 꽃을 많이 길렀고, 그 꽃들을 꺾어 집안 곳곳에 꽂아두곤 하셨다. 여러가지 색깔의 장미와 여러가지 색깔의 과꽃, 깨꽃, 금잔화, 백합, 수국, 양귀비까지 여름이 가까워지면 어머니의 화단은 밤이어도 꽃들로 눈이 부셨다. 꽃이 듬성듬성해지는 가을이 오면 어머니는 길가에 흐드러진 코스모스나 부처꽃, 싸리꽃들을 적당히 꺾어 단 하루라도 유리잔에 꽂아놓곤 하셨다. 나는 꽃은 화단에 두고 보기도 좋지만, 꺾어서 경대 위에 놓고 보기도 좋은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일찍부터 배웠다. 그러나 꽃을 키우고, 꽃을 꺾는 어머니의 진심은 무얼까, 생각해본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다.
아마 어머니는 백일홍을 찾아 나섰으리라. 어머니는 나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화단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화단은 물론 공원과 육교 너머 작은 동산의 표정을 훤히 꿰차고 있다. 육교 너머 마을엔 없는 게 없다, 백일홍만 빼고. 처음 육교 너머 마을에 산책 삼아 다녀오시고 한 말씀이었다. 대추나무 감나무 자두나무 모과나무, 심지어 석류나무까지 보고 오셔서 한 말씀이었다. 왜 백일홍만 찾으세요, 다른 꽃 다 놔두고. 내가 속없이 물었다. 어머니는 버릇처럼 안경테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셨다. 화단을 잃어버린 후 어머니는 계절을 잃어버린 듯, 멍하니 노을 붉은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많다는 것을 형제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詩, ‘그 여름의 끝’)
백일홍을 찾아나갔다가 또다시 장미꽃을 보았다. 구절초, 개미취, 부처꽃, 싸리꽃, 키 작은 꽃들이 저들끼리 어울려 피어 있고, 잎새 없이 단출한 꽃대 위에 장미 열매만이 붉었던 꽃의 기억을 되돌리고 있다. 어머니가 지나갔던 길목에 서서 백일홍의 흔적을 찾아본다. 맨드라미꽃과 싸리꽃은 어디 있더라, 동산에 올라가 가을빛이 한창인 마을을 내려다본다. 내년엔 어머니께 두어평 마당을 마련해드려야 할 텐데…, 경주에 사는 언니가 안부 전화 끝에 말끝을 흐렸다. 저 아래 그 많은 마당에도 백일홍은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여름날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울퉁불퉁 제멋대로 줄기 휘어진 장미 나무 열매를 꺾어와 이리저리 유리병에 꽂아놓고 어머니를 불렀다. 백일홍 빛깔만은 못하지만 초여름의 연두빛과 늦가을의 노을빛을 닮은 장미 나무 열매는 백일은 너끈히 그 빛 그대로일 것이다. 어머니는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울퉁불퉁 제멋대로 휘어진 장미 나무 열매 옆에 지난 몇년간 내가 외지에서 주워온 작고 보드라운 자갈돌들을 꺼내놓는다. 나도 질세라 그들 옆에 어제 주워온 도토리와 꽃사과를 얹어놓는다. 세월을 담은 것중에 자갈돌만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어머니는 내 말에도 아랑곳않고 버릇처럼 안경 밑으로 손을 가져가 눈가를 훔친다. 어머니, 강가에 백일홍 수십 그루 피어 있는 곳을 알았어요. 이름이 예쁘기도 하죠, 어은정(漁隱亭)이라니. 생각중이거나, 할 말을 잃었을 때처럼 안경테를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표정이 달빛처럼 밝아지신다. 시월엔 일을 좀 줄이고, 아침 산책을 하도록 해야겠다, 호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육교 너머에라도.

외지로 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시간은 한동안 제자리에서 맴돈다. 들끓는 추억으로 머릿속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가을이 깊어지고 깊어져서 겨울이 올 때까지 나는 한 곳에 고정된 욕망의 포로처럼 밖으로 나갈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눈부시게 은사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호수도, 싸리나무 배롱나무 붉은 꽃을 피우는 육교 너머 동산도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풍경일 뿐이다. 그런데 어은정이라니. 그곳이 어디인가, 어머니를 배웅하며 약속을 한다. 시월엔 일을 좀 줄이고, 아침 산책도 하고, 그리고 여행을 가도록 하지요. 기나긴 서해 대교를 건너 안면도에도 가고 만경평야 거쳐 채석강에도 가고, 그리고 순창이라는 데도 가지요. 백일홍이 강 언덕에 붉게 피어 있을 거예요, 보기 좋을 거예요.
백일홍을 보러 가야지, 시월 아침 잠깨어 하늘을 본다. 어머니는 아침 산책도 조심하신다, 경주 사는 언니가 안부 전화를 걸었다가 말끝을 흐린다. 아직 시간이 있다. 이제 가을도 중순, 시월이 가기 전에 그곳에 가야 한다. 백일하고도 하루 이틀이 지나도 꽃은 피어 어머니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외지로 떠났다가 돌아오던 그때처럼 어머니 어깨에 기대어 마지막 붉은 꽃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여성동아 2002년 10월 4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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