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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인물 & 화제 │ 아름다운 이별

정년퇴임 초등학교 교장 이상선씨의 신랄한 자기반성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박진숙 ■ 사진·지재만 기자

입력 2002.10.08 15:07:00

지난 8월28일 성남 은행초등학교에서는 이색적인 교장 퇴임식이 열렸다. 전교조 출신 1호 교장인 이상선교장은 이날 44년 5개월간의 교직생활 동안 자신이 저지른 죄를 낱낱이 고백해 눈길을 끌었다.
그가 뒤늦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은 이유와 교직이 천직이라고 믿으며 남다른 교육행정을 펼쳐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외길 인생을 들어보았다.
정년퇴임 초등학교 교장 이상선씨의 신랄한 자기반성

아이들에게 교장선생님이라기보다 자상한 할아버지로 통했던 이상선씨

“참회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44년 5개월 동안 교사로 지내면서 잘못한 게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저지른 큰 죄는 세가지입니다. 바로 민주주의 교육 못한 죄, 통일교육 제대로 못한 죄,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몬 죄….”
조촐하게 마련된 교장 퇴임식에서 ‘참회의 고별사’는 후배교사와 학부모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과거에 내가 잘못 가르쳤던 교육을 반성하고 참회하며 후배들에게 절대 그런 교육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별강론을 하게 되었지요.”
자신이 평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새 학기마다 강압적으로 아이들에게 1년 동안 지켜야 하는 규칙을 말하고 못 지키면 매가 몇 대라며 윽박질렀던 일, 아이들 앞에서 본때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매를 들었던 일, 쪽지 시험, 월말고사, 기말고사 등으로 점수 경쟁을 하도록 한 일, 반 평균이 내려간다고 성적이 낮은 아이는 시험 보는 날 오지 말라고 한 일, 북한은 원수라고 가르치며 반공 교육을 한 일 등 그가 고백한 죄들은 예전엔 당연하게 받았던 우리의 교육 내용들이었다.
“난로도 못 피울 정도로 어려웠던 겨울에는 등수대로 햇볕이 드는 곳에 아이들을 앉히고 그랬어요.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앉히고…. 나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선생님들이 다 그랬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배웠거든요. 경쟁교육이라는 것이 말로는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고 못하는 아이고 모두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요. 이것은 친구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만드는 교육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월요일마다 뙤약볕 아래서 오랜 시간 동안 알아듣지도 못하는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을 들어야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예전부터 내려온 관행들이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아직까지 뿌리 깊이 박혀 있어요.”
생계를 위해 선택한 교사의 길
전라남도 광주가 고향인 이상선씨(65)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탁월한 암기력으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우등생이었던 그.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담임선생님은 학비를 대줄 테니 시험에 응시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기 어렵다는 중학교 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선생님은 학비를 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선생님도 6학년 담임을 맡아 자신의 제자를 명문중학교에 입학시켰다는 명예를 얻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입학은 포기했지만 공부를 중단할 수는 없어서 동네 서당에 다녔습니다. 한문책을 베껴쓰면서 석달 정도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셨더라고요. 미안하셨던 모양이지요? 근처에 시골 중학교가 새로 생긴다면서 장학생으로 추천해주셨어요.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죠.”
중학교 공부를 마치고 대학 가기를 포기한 그는 광주사범학교에 합격,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그 당시 교사의 길을 선택한 건 6형제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이교장이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를 대야 하는 절박한 생계문제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나온 내가 역사의 진실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교사 노릇을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광주사범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우리나라의 진실을 어떻게 배울 수 있었겠어요. 생각해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는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느라 33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지금의 아내와 선을 보고 일주일 만에 식을 올린 초고속 결혼이었다.

“신혼여행도 못 갔지요. 휴가는 있었지만 학기중에 한 결혼이라 아이들 수업 걱정 때문에 갈 수가 없었어요. 일요일에 결혼식을 하고 다음날 바로 출근했죠. 아내는 신혼여행도 못 가고 모진 세월을 잘 참아주었어요. 그래서 퇴임식 다음날 제주도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때 가지 못한 신혼여행 대신 말이죠(웃음).”
그가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탄압을 받았을 때도 마음 졸이며 묵묵히 지켜봐 주었던 아내와 식구들이 그에게는 가장 큰 지지자였다. 이씨가 파면이나 구속을 당하면 당장 생계가 끊기는 절박한 상황을 자주 접하다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던 아내의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보안사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한 날들이었어요. 학교에서, 바깥에서 그런 감시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아내가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이제는 건강을 많이 회복한 상태라 다행입니다.”
자녀들을 단 한번도 학원에 보내거나 과외를 시켜본 적이 없다는 그는 1남2녀의 자녀들이 비록 지방대학을 나왔지만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갔기 때문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녀를 걱정하는 이씨는 영락없이 걱정 많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을‘늦된 교사’라고 했다. 30년 넘게 국가의 지시에 따라 교직생활을 하던 그는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거리에서 만난 대학생들이 “학교에서 거짓을 가르친 선생님들을 존경할 수 없다. 왜 유신헌법을 훌륭한 법이라고 가르쳤느냐?”라는 힐난에 충격을 받았다. 그이후부터 교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의식 있는 다른 교사들과 의기투합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인 경기교사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전교조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밤마다 공부를 하면서 깨우치게 됐어요. 우리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교육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러던 중 89년, 초등학교 2학년을 가르칠 때였어요. 그때는 전두환 전(前)대통령에 대한 내용이 교과서에 실려있었는데 이미 역사의 진실을 안 이후라 교과서에 있는 그대로 가르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죠. 그래서 그냥 그 부분을 슬쩍 넘어갔더니만 한 녀석이 왜 안 가르쳐주냐고 질문을 하지 않겠어요? 얼마나 답답하던지요. 정말 떨리는 마음으로 훌륭한 대통령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광주항쟁을 진실 그대로 알려주었죠. 아이들은 모르던 사실이었기에 깜짝 놀라더군요. 그 이야기를 해주고 나서 10여일 동안 악몽에 시달렸어요. ‘이제 영락없이 붙잡혀 가겠구나, 고문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렵더군요. 그런데 아무 일이 없는 겁니다. 그 당시 학부모님들도 나를 이해해주었던 것 같아요. 그 일을 겪고 나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진리와 진실을 양심에 따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됐죠.”
이후 옳고 그름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교사여야 한다는 그의 소신은 굽혀진 적이 없었다. 경기도 포천군 지현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학교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를 쓰면서 그의 남다른 행적은 시작되었다. 학부모들에게 운영위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회의 방식을 일일이 교육시켜가며 학교의 주인으로서 행사해야 할 권리를 알렸다. 그리고 농사를 짓느라 바쁜 학부모들을 위해 회의를 밤에 진행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보람을 느낀 일은 학부모 모임에서 걷던 기부금을 없앤 겁니다. 대개 학부모 모임에서 모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더라구요. 그래서 학교 재정과 예산을 공개하면서 학부모들의 돈은 필요 없다고 말했지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학교 재정을 공개하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알 권리를 잃고 있었던 거예요. 학부모들이 학교가 돈을 어떻게 쓰고, 우리의 세금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알게 되면서 참여율도 높아지고 신뢰도 얻게 됐어요.”
이후 성남 은행초등학교장으로 가자마자 그는 한달간 급식실과 행정실에서 다과회를 베풀며 공개토론의 장을 만들어 학부모와 학생, 교사들의 의견을 듣고 학교운영 계획서를 발표했다. 의견을 취합한 결과 무려 1백16개의 학교운영 개선안이 나왔다.
그는 일의 경중을 따져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일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급식업체 선정은 학부모와 교사가 참여하는 급식위원회로 이관해 견적 입찰로 바꾸었다. 그렇지 않아도 잡무에 시달리는 교사들을 아침저녁마다 길거리로 내몰던 교통정리 업무를 중지시키고 대신 수업준비에 전념토록 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던 애국조회와 주번제도를 폐지하고, 어린이신문 구독을 정지시켰으며, 소풍이나 체육대회 때의 의례적인 접대 향응을 일절 없애는 등 그의 공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교사 때부터 어린이신문 구독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교육적 가치가 있다하더라도 신문은 특정 상품인데 공공기관인 학교에서 구매, 알선행위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획일성입니다.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아침 자습을 위해 같은 신문을 이용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신문의 내용면에서도 전문성이 떨어져 교재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를 검토하고 학부모 회의를 거쳐 신문구독을 중단했지요.”
전국 최초로 어린이신문 구독을 거부한 이교장의 사례는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관행을 타파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었다.

그는 다른 교장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남모를 아픔도 많았다.
“제가 한 여러가지 일들이 알려지면서 다른 학교 학부모들이 자기 학교에 항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러니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 교장들은 내가 얼마나 밉겠습니까? 전교조활동이나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을 벗어난 학교운영으로 교장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했지요. 참 외롭게 지냈습니다. 동문회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할 정도로‘왕따’되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어요. 함께 술 한잔하자는 사람도 없고, 나와 놀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피하기만 하니까 굉장히 힘들더군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옳은 길이고,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꿋꿋하게 지켜나갔어요. 그리고 나를 지지해주는 후배들을 보면서 힘을 얻고 이겨낼 수 있었던 거죠.”
이씨가 추구하는 교육은 매우 간단했다. 국가 중심이 아닌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이들과 학부모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요자들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자치적으로 운영하여 아이들에게 다양성과 창의성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을 기죽게 만드는 교육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가 무엇을 잘하는지는 관심 없고 오직 성적순으로 평가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교육입니다. 아이들 개개인은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지요. 이런 재주를 키워주는 것만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특기와 적성을 눈여겨 보고 격려해줘서 이후 직업이나 취미로 연결시켜줘야 해요.”
때문에 그는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우등상’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시상하는, 성적에 대한 모든 상장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각자의 재주에 맞는 상을 주었다. 노래를 잘하는 아이에게는 ‘꾀꼬리상’, 웃기는 재주가 있는 아이에게는 ‘코미디상’, 춤을 잘 추는 아이에겐 ‘댄스상’ 등 재주에 걸맞은 상을 만들어 아이들을 격려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교육시켜야 합니다. 바로 인성을 중시하는 교육이 되어야지요. 우리 아이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남이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함께 축하해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지요. 그리고 특기적성을 살리는 교육, 이 두 가지를 형평성 있게 조화시켜야 합니다. 예전 시대가 요구하던,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평균인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전문인들이 필요하지요.
결국 학벌보다는 능력을 우선으로 치는 사회에 맞는 교육을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현실은 참 어렵습니다. 학교가 제대로 아이들을 키워낸다면 학부모들이 지금처럼 사교육에 의존하겠습니까? 공교육 정상화를 해야지요. 학급당 아이들 수를 줄이고 좋은 선생님을 많이 양성해 투입해야죠. 그리고 열악한 상황이지만 아이들은 교사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이니만큼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해요. 특히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지요. 아이들에게 정성과 정열을 쏟고 살아있는 혼으로, 깨어있는 혼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의 철학적 접근도 필요합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그는 이제 ‘제3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교직생활을 마치며 아이들에게 자신이 늘 강조하던 이야기를 시로 남겼다. 시의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반성해 본다.

“오늘의 우리 교육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교과서 지식 달달 외우게 하여
머리통 터지게 하는데
시험이다 시험이다 닥달하고
점수 올려 점수 올려 다그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등수 가리는데
사지 선다형 ○, ×가려내는
시험기술자 만드는데
그 속에서 너희들은
사랑보다 미움을, 우정보다 시샘을 배우게 하는데
공부 잘하면 대접받고 못하면 개밥에 도토리 되는데
커 갈수록 웃음을 잃고
안으로 안으로 마음을 닫아가게 하는데
너희들에게 나는
무슨 얘기를 들려주어야 할까?



얘들아!
민들레처럼 메마른 땅 곳곳에 흩어져
뿌리내리고 꽃피워 갈 사랑하는 아이들아!
강한 아이는 약한 아이를
괴롭히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
많이 가진 아이는 못 가진 아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나누어주어야 한다.
영리한 아이는 미련한 아이를
속이지 말고 가르쳐 주고 깨우쳐 주어야 한다.
잘났다고 못난 아이
깔보지 말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건강한 아이는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를
놀려대지 말고 부둥켜 안아야 한다.
남누리 아이 북누리 아이
서로 미워하지 말고 얼싸 안아야 한다.”

여성동아 2002년 10월 4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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