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인물 & 화제

후원회원들의 ‘십시일반’으로 모노드라마 무대 올린 연극배우 양승걸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최문갑 기자

2002. 10. 08

동숭동 마로니에 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새드 셀카(Sad Selfcamera)>. 연기경력 16년째인 배우 양승걸씨가 ‘누구나 하고 싶지만, 아무나 못하는’ 모노드라마에 도전했다는 점만으로도 화제를 모은 무대다. 이 작품 뒤에는 그를 아끼는 1백여 명의 지인들이 모아준 2천여만원의 후원금이 있다고 해서 더욱 가슴 훈훈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오로지 연극배우가 꿈이었다는 양승걸씨가 털어놓은 나의 인생, 나의 무대.

후원회원들의 ‘십시일반’으로 모노드라마 무대 올린 연극배우 양승걸
9월 5일. 대학로 마로니에 소극장. 생애 최초의 모노드라마를 끝내고 난 양승걸씨(40)는 무대 뒤 연습실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혼자서 2시간 여동안 11역을 소화하며 종횡무진 이끌어온 탓에 피곤할 법도 하련만, ‘과연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걱정에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다. 기도를 끝낸 그의 귀에 엔딩 음악이 줄곧 들려왔다. “음악 좀 끄지!”라고 소리 지른 그에게 후배는 상기된 표정으로 “연극이 끝났는데도, 관객들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음악을 끌 수가 없다”며 객석의 반응을 전했다. 옷을 갈아입은 그가 좁디 좁은 소극장 통로로 나갔을 때까지도 관객 십여 명은 벽에 기대서, 혹은 책가방을 받친 채 공연평을 적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여러분의 뜨거운 반응에 감사 드릴 따름이지요. 공연한 지 이제 1주일밖에 안되고, 또 90석밖에 안되는 좁은 소극장인데도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게다가 30대 이상 관객이 많이 들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는 반대로 20대 관객들이 많이 찾고있는 것도 고무적이고요.”
1인 11역을 연기하느라 3, 4초 만에 옷 갈아입는 실력 발휘
<새드 셀카>는 설암을 선고받은 연극배우가 자신의 연극 인생을 셀프카메라에 담아 애인에게 남긴다는 줄거리. 그 구비구비에는 배우생활 6년 만에 처음으로 월세 5만원짜리 자기 방을 마련했던 기쁨, 연출가와 갈등을 빚고 방황했던 순간, 연극 무대에 섰을 때의 흥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했던 추억이 녹아있다. 이 극에서 양씨는 전도사에서 마술사, 양아치, 파우스트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무려 11인 역을 해낸다. 따라서 극 중에서 갈아 입는 의상만도 20 여벌.
“모노드라마는 배우 혼자서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배우가 눈에서 사라지면, 이내 관객들은 지루해 합니다. 극의 흐름이 끊어지는 거죠. 전 그래서 최대한 암전을 줄이려고 3~4초 내에 옷을 갈아입는 훈련을 했어요. 옷에 ‘찍찍이’도 달아서 효율성도 높이고 말이지요. 그래도 가끔 실수를 합니다”
연극계에는 ‘모노드라마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떠돈다. 그만큼 모노드라마가 어렵고 힘들다는 방증이다. 어지간한 자신감과 연기력이 없는 한 명함을 내밀지도 못한다. 주거니 받거니 함께 극을 이끌어나갈 상대 배역이 없는 만큼 배우는 모든 ‘기’를 연극에 다 쏟아넣어야 한다. 그래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한 해 1백50여 편이 넘는 연극공연 중 모노드라마는 한 손에 꼽을 정도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 동안 모노드라마를 시도한 남자 배우도 <빨간 피터의 고백> 추송웅, <콘트라베이스> 명계남, <진술> 강신일, <슬픈 조용팔씨의 마지막 노래> 이인철 등 손 꼽을 정도.
“안 그래도 최종원 선배에게 모노드라마를 하겠노라 그랬더니 ‘아니, 이 놈이 나도 아직 못해본 걸 하려고 해…’ 다짜고짜 퉁을 주시더군요(웃음). 연극계에서는 50대 이전에는 모노드라마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거든요. 하지만 전 40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록도 중요하지만 기가 승할 때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양씨는 “매너리즘에 빠진 연극계에 자신의 시도가 충격을 주었으면 한다”면서 “제가 좀 뻔뻔스러워서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뻔뻔스러움만으로 연기가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연습실 옆에 조그만 방을 얻고 필사적으로 연기연습에 매달렸다. 연기에 필요하리라 믿고 탭댄스와 맘보춤도 배웠고, 연극에 필요한 마술 역시 눈속임으로 할 게 아니라며, 친분있는 마술사 정은선씨에게 직접 사사했다. 그뿐인가. 눈물 나오는 연기를 실감나게 하기 위해 한달 동안 매일 아침 TV <아침마당>의 ‘그 사람이 보고 싶어요’ 코너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연습까지 했다고 한다.
“한동안 눈물을 끊었더니, 우는 연기가 힘들더군요. 예전에는 제가 눈물이 많았어요. 그런데 연기 초창기에는 걸핏하면 눈물이 흐르는 제 모습이 너무 느슨해 보여서 일부러 독하게 눈물을 끊었거든요. 메말랐던 눈물샘을 다시 복구하려니 힘들더군요.”

<새드 셀카>는 그가 직접 대본을 썼다. ‘양승걸 작 양승걸 연출’이라 쓰는 게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팸플릿에는 ‘양지월’을 필명으로 내걸었지만 말이다. ‘양지월’이란 이름은 <품바>로 유명한 고 김시라 선생으로부터 받은 이름. 지난 배우생활을 돌이켜보며 한줄 한줄 기록해간 그의 노트가 대본의 바탕이 됐다. 아마도 그 노트의 첫장에 씌어진 말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번도 버리지 않은 이름, 배우’가 아닐까.
광주에서 나고 자란 양승걸은 어렸을 때부터 끼가 있었다. 이소룡이 출연하는 영화 <정무문>이나 <당산대형>이라도 보고온 날이면 동네 조무래기를 모아놓고 그는 “꺄오옷~~” 하는 이소룡 특유의 괴성을 동작과 함께 흉내내곤 했다. 대사와 함께 선보이는 극적인 장면들이 하도 실감나는지라 코흘리개 친구들은 집에서 몰래 집어온 부침개며 닭다리 한조각 등을 그에게 건네며 “승걸아, 한번만 더 보여줘봐” 하기 일쑤였다. 이런 그의 못 말리는 끼는 어쩌면 집안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부친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각자 고 양수아 화백. 어머니 역시 그림을 그리는 분으로 양승걸은 3남1녀 중 막내. 지금 큰형과 작은형은 각각 화랑운영과 애니메이션 감독 일을 할만큼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가정이었다.
“당시 제가 광주교대 부속초등학교에 다녔어요. 4학년 때 특활활동으로 동극반(童劇班)에 가입했어요. 그런데 학예회 때면 나보다 연기도 못하는 애들이 엄마 치맛바람에 주연을 맡는 게 그렇게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5학년 때 난생 처음 3인극의 주연으로 뽑혔죠. 그때의 벅찬 경험이 절 배우로 이끈 거 같아요.”
연극 제목은 <나비를 따라가는 소년>이었다. 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연기하던 어린 양승걸. ‘아, 내가 죽는구나’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데 너무나 슬퍼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긴 한줄기의 눈물은 그대로 흘러 귓바퀴에 차갑게 닿았다.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그다.
“그때 마음 굳게 먹어버렸죠. 난, ‘이걸 할거야’ 하고 말이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줄곧 그의 꿈은 연극배우. 그러나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다가 내리 고배를 마시면서 결국 전문대로 진학해야 했다. 다시 중앙대 진학을 준비하려는 찰라 영장이 날아왔고 그는 곧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했다. 제대후 돌아온 그에겐 연극배우가 되는 길은 요원하게만 보였다. 당시 광주지역에는 극단이 드물었고,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극단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망한 그는 잠시 회사에 몸을 담기로 한다.
“면접 전날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타다가 미끄러져 얼굴과 어깨를 심하게 다쳤어요. 너무 어깨가 쓰라려서 와이셔츠를 입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슴이 파인 누나의 보라색 티를 빌려입고 갔으니 사장 보기에 얼마나 황당한 놈이었겠어요.”
당연히 낙방일 거라 생각했던 그는 요행히도 특기란에 써둔 ‘축구부’ 경력이 ‘축구광’인 사장의 눈에 들어, 예상을 뛰어넘고 면접을 통과했다. 그렇게 해서 1주일간의 회사 연수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우연히 중앙 일간지를 집어든 그의 눈에 조그만 박스 광고가 눈에 띄었다. ‘극단 맥토 단원 모집.’ 그 다음날 서울로 무작정 올라가버렸다. 물론 회사연수도 내팽개친 채였다.
“어머니는 1주일간 회사 연수를 간 걸로만 아시고 계시다가 나중에 서울에 있는 시집 간 누나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옴마, 갸가 왜 거길 가 있디야’ 깜짝 놀라셨지요, 뭐.”

꿈에 그렸던 극단 생활. 그러나 무대에는 한번도 서보지 못하고 포스터 붙이기, 수금하기, 티켓 팔기, 극장 청소 등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단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연극배우들은 다 그랬다. 그러다가 94년 <사기꾼들>에 출연하기에 이른다. 비록 5분여를 출연하는 단역배우였지만 이 연극은 그에게 큰 의미로 남는다.
“이 연극을 통해 첫사랑과 다시 만나 결혼에까지 이르렀으니까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만나 3개월여 풋풋한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졌던 ‘첫사랑’의 이름은 이애란(38).
“어느 토요일, 한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양승걸씨라고 거기 계세요?’하는데 느낌이 이상해요. “전데요” 하는데 한동안 말이 없어요. 한참 후에야 ‘저, 모르시겠어요?’ 하는데 모르겠더군요. 잠시 후에 그녀가 ‘고향이 광주 아니예요?’하는 데도 감이 안 와요. 그래서 아는 여자 후배가 장난치는 전화인 줄 알고 그냥 끊어버렸죠.”
당시 그는 배우들을 키워줄 생각은 않고 그저 잡일만 시키는 극단 분위기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연극계 풍토상 명분 없이 싫다고 극단을 떠날 수는 없는 상황. 결국 그가 생각해낸 핑계는 ‘결혼’이었다. 극단주에게는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후배 연기자를 훈련시키면서 더블팀으로 공연하겠노라 했다. 후배가 제 몫을 해내면 바로 극단을 그만둘 생각을 하면서.
“후배가 저 대신 처음으로 무대에 선 날, 그녀가 연극을 보러 온 거예요. 그런데 연극에 제가 안 나오니까 대기실로 찾아왔어요. 그렇게 만났는데, 처음엔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공연 소식지를 들고 정장을 입고 있길래 기자인 줄 알았다니까요. 정말 자신을 못 알아보는 눈치이니까 실망했는지 그녀가 씁쓸히 웃는데, 그 입매가 딱 낯이 익는 거예요. 바로 놀라서 ‘애란씨~’그랬죠.”
알고 보니 이씨는 학력고사 끝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그만 이사를 가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삼성에 취직,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것. 그들이 이렇게 다시 만난 건 운명의 힘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평소 연극에 큰 관심도 없었고, 사는 곳이 강남이라 동숭동에 올 일이 거의 없었던 이씨가 회사에서 나눠준 공짜 연극표를 들고 대학로를 찾았다가 이내 첫사랑의 사진과 이름이 박힌 포스터를 보게 된 것이니 말이다.
그후로 그들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극단을 나오기 위해 둘러댔던 ‘결혼’이라는 핑계는 이제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6월에 만나 이듬해 4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연극배우와의 결혼생활. 누구도 반기지 않을 그 결혼생활로 선뜻 들어와준 아내가 그는 고맙다.
“배우라는 제 위치를 잘 이해해줘요. 아내가 돈을 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연극에 몰두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제가 돈을 허투루 쓰는 사람도 아니니까, 아내는 돈 못 벌어온다고 제게 스트레스 줘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후 배우극장과 극단 예후를 거치면서 <마지막 키스> <붉은 방> <카스파> 등의 작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경력을 쌓아갔다. 96년부터 98년까지는 월간 ‘한국연극’이 선정하는 ‘올해를 빛낼 연기자’로 3년 연속 선정되는 등 인정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16년 연기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은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데 힘을 모아준 1백여명의 후원회원들이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대본을 완성했는데, 무대에 올릴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1구좌당 관람권 10권을 묶어 15만원이라는 금액을 정하고,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지요. 공연이 무산이 되면 바로 환불하겠다는 단서조항을 달고 설명하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흔쾌하게 ‘나, 1구좌 할게’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3월 한달 동안 무려 4백만원이 모였다. 과연 사람들이 호응해줄까 반신반의했던 그는 ‘인간 양승걸’ ‘배우 양승걸’에게 거는 주변의 뜨거운 믿음에 놀랐고 또 감동했다. 그 돈이 어느새 1천만원을 넘어갈 때는 정말로 공연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8백만원이 모일 때쯤 처음으로 겁이 나더군요. 그리고 이내 죽기를 각오하고 해내야겠다고 각오를 다졌어요.”
후원금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마술협회 정은선 회장은 그에게 재료비도 안 받고 마술을 가르쳐주었고 음악을 맡은 김태근을 비롯해 후배들은 노 개런티 혹은 교통비 정도만 받고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돈 없는 거 뻔히 아는 연극계 후배 하나는 “형의 1구좌를 3개월 할부로 사면 안될까요?”라고 말해 그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후배에게 네 마음을 이미 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는데, 정말 가슴이 짜아하더군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던가. 돈키호테식 발상이었지만 기어코 무대는 만들어졌다. 다행히 지금껏 관객 반응도 좋아 이래저래 연습하는 목소리에 절로 힘이 붙는 요즘이다.
자신의 연극에 관객들이 들면서 요즘 그가 관심을 새롭게 가지게 된 건 ‘연극운동’이다. 그건 거창하지 않다. 소박하기조차 하다. 이를 테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시에 공연하고, 관객을 맞을 땐 적어도 정장을 입고 정성스레 맞이하는 것. 말하자면 ‘대학로 연극’의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요즘 보면 관객이 든다니까 너나없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추세 아닙니까. 정극도 있고, 코미디극도 있고, 또 어딘가엔 정말 야하면서도 제대로 만든 성인극도 있고…. 이렇게 다양하게 가야 하는데, 날이 갈수록 정극이 설 자리가 없어져요.”
엄청난 물량과 볼거리로 대중을 현혹하는 블록버스터형 뮤지컬, 한번 관객이 든다니까 너나없이 시도하는 이른바 ‘넌버벌 퍼포먼스’. 이런 움직임에 밀려, 실제로 ‘대학로’를 먹여살려왔던 소극장 연극들은 힘을 잃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저 유행 따라 흥행 따라 ‘우~~’ 몰려다니는 연극계에 자성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이 따끔하다.
“전 지금도 잘된 공연을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반면 엉터리 공연을 보면 화가 나 미칠 것 같고요.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런 감정은 계속될 겁니다. 좋은 배우로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 그게 제 꿈입니다.”
연극에만 미쳐 살아온 배우 양승걸.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왜 주변 사람들이 흔쾌히 15만원이라는 거금을 쾌척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